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97화 (97/111)
  • #97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렇게 된 거 그냥 엎어버릴까.”

    “그래도 괜찮으실 겁니다. 스테판 공작이 함께 있거든요.”

    “스테판 공작이?”

    “네. 어째서인지 대신관 쪽에서 스테판 공작을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자리를 갖고 싶다면서 호의적으로 굴더군요.”

    “그건 의외네. 분명히 자기들 앞을 가로막은 쪽일 텐데 호의적이라니. 아니면 그쪽을 꼬셔보기라도 할 셈인가.”

    제이스는 그런 사탕발림에 샐리가 넘어갈 리가 없다는 생각에 본인이 말하고도 어이가 없었는지 웃었다. 그래서인지 제이스는 자기도 모르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불안감을 잊어버렸다.

    황궁 안이라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장소에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줄 수 있는 샐리의 존재가 제법 크게 느껴졌다.

    그렇게 자신의 안일함에 대해 후회하게 되는 시점은 결국 대신관이 황궁을 떠난 이후 성녀 궁에 들어간 한 하녀가 가지고 온 충격적인 소식과 함께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지막한 목소리기는 했으나 그 안에 응축된 분노에 다급하게 소식을 가지고 온 여린 하녀는 바들바들 떨며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제이스가 평범한 시종이 아니라는 점을 성녀 궁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모두 어렴풋이나마 알았다.

    다만 그가 한 차례 성녀궁의 사용인들을 불러 모은 뒤 자신이 가진 힘을 개방하여 보여준 어마무시한 기백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었다.

    “성녀님과 스테판 공작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대신관이 궁을 떠난 뒤에도 남아있는 신관들이 신전의 교리에 대한 교육을 핑계로 궁의 출입을 더 막았다는 것에서 제이스는 본인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깨달았다.

    ‘제길, 내가 너무 방심했어.’

    성기사들과 신관들이 떠난 다음에 방으로 향한 하녀는 몇 번의 노크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에 무례를 무릎 쓰고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곳에 남아있는 것은 사람이 있었는지 한참은 되어 보이는 싸늘한 기운과 코를 쑤셔오는 독한 향기뿐이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제이스는 다급한 마음에 길을 지나가던 한 기사무리를 붙잡았다. 그는 당장 뭐든 때려 부수고 싶어질 정도로 화가 가득 찬 마음을 겨우 달래고 평온한 얼굴로 헨리의 행방에 관해 물었고, 기사들로부터 헨리가 아직 황궁에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몸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바로 곁에서 함께 이야기를 듣던 또 다른 하녀이자 제이스가 심어둔 길드원은 헨리가 한 말의 의중을 곧바로 파악했다.

    ***

    “더 살펴볼 것이 있는 건가.”

    “그냥 혹시나 해서 찾아보는 거야. 시전자가 남긴 아주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있나.”

    “생각했던 것보다 열심히 해주는군.”

    헨리는 당연히 셀바가 대충 훑어본 뒤에 저택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모든 것을 하녀들이 해주는 스테판 공작가의 저택을 마치 지상낙원으로 여기는 것처럼 아예 눌러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상전이 된 것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에 찌들었으니 말이다.

    특히나 그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 바로 귀찮은 것이 싫다는 거였다. 그의 제자이자 이제는 떳떳한 발명가로서 샐리의 사업 파트너가 된 마린의 독려에도 셀바는 귀를 틀어막고 저택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기에 헨리는 이렇게 열심히 사건 해결을 위해 도움을 주려는 셀바를 보고 처음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냐, 그 얼굴은.”

    셀바는 역겹다는 듯 토하는 시늉을 하며 경멸스러운 눈으로 헨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헨리는 그런 셀바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언제나 만날 때마다 티격태격하면서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감은 참으로 특이했다.

    서로 딱딱한 말투로 사무적으로 대하면서도 어떨 때 보면 함께 한 시간이 꽤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해 보이기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뭐가 좀 나오나.”

    “전혀. 더는 힘들 것 같아.”

    “수고했어. 약속한 대로의 대금은 바로 지불하도록 하지.”

    “그럼 빨리 가자. 거기 케이크는 인기가 많아서 금방 떨어진단 말이야.”

    셀바는 진심으로 초조한 듯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본다면 그가 대마법사라고 믿기가 정말로 힘들었다.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케이크가 얼른 먹고 싶다며 보채는 걸 보고 누가 그를 대마법사라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누구냐.”

    사람의 출입을 금지한 시점에서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헨리는 곧바로 사나운 눈을 하며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아직 있었군.”

    “네가 여기 왜 온 거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과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서 헨리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곧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사라졌어.”

    굳이 그 두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어도, 굳이 추가적인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어도 헨리는 곧바로 제이스의 말을 알아들었다.

    샐리가 위험하다.

    자신의 아내가 위험하다.

    헨리는 그 순간 이성을 잃고 황궁 감옥 밖으로 뛰쳐나갈 뻔했다. 만약 셀바의 만류가 없었다면 그는 아무런 정보도 목적도 없이 그렇게 이성의 끈을 놓고 날뛸 뻔했다.

    “진정해. 이런다고 달라지는 거 없다는 거 알잖아.”

    그 말에 헨리는 앞으로 달려 나가려던 발걸음을 겨우 멈춰 세우고 놓아버렸던 이성을 다시금 잡기 위해 침착하게 깊은 호흡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칠어진 호흡에서 그가 현재 어떤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줄 수 있나.”

    “나도 자세한 건 몰라. 단지 클로에와 함께 성녀궁에 방문한 뒤로 대신관이 황궁을 방문했고, 그 뒤로 두 사람이 사라졌어.”

    “그렇다면 신전 쪽에서 움직였다는 거로군.”

    “그렇다고 봐야지. 하지만 짚이는 행방은 전혀 없어. 그것들이 멍청하게 두 사람을 신전으로 데려가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상황 설명은 그것으로 끝인가?”

    그 말에 제이스는 곰곰이 아까 하녀에게 들었던 보고를 되뇌었다. 지금의 상황은 그에게도 절실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심정이었기에 본인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으면서도 믿을만한 인물을 찾아온 것이었다.

    “하나 더 있어.”

    “그게 뭐지?”

    “처음에는 대신관이 먼저 떠났다고 하더군. 그 뒤로 몇몇 신관들이 남아 교육을 더 진행했다고 하던데 어쨌든 이상한 점이 많아.”

    “애초에 대신관이 방문한다는데 이쪽에서 평소 같을 수가 없어.”

    “그것도 그렇지.”

    대신관이라는 거물이 행차하는데 황궁 안이 평소와 같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대신관의 방문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무작정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내가 한 번 봐줄 수도 있는데.”

    “그러고 보니 그쪽은 누구지?”

    “나? 마탑의 마법사 셀바토레스인데.”

    “마법사라고?”

    상상도 못한 정체에 제이스는 놀란 눈으로 헨리를 바라봤고, 헨리는 애써 그 따가운 시선을 피했다.

    ***

    “그래서 어때.”

    헨리와 제이스는 동시에 셀바를 바라보며 성녀궁 방 안의 상태에 대해 물었다. 두 사람이 느끼기에도 마법이 시전 되고 난 뒤의 잔여 마력이 제법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애초에 제국의 황궁에서 제국 최고의 귀족가인 스테판 공작가의 공작과 성녀를 납치한 사건은 보통 중대한 사항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수월하게 벌일 수 있을 정도의 실력 있는 마법사가 가담했다는 것이니 헨리와 제이스의 입장에서 그들을 추적할 수 있는 든든한 마법사의 존재가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셀바에 대한 두 사람의 기대치가 높아지는 것이었다.

    “이거 대놓고 이쪽을 무시했군.”

    셀바는 남아있는 강대한 마력의 흔적들을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이렇게 본인이 마력을 많이 써서 제법 고위 마법을 시전했다는 것을 대놓고 광고한 것도 모자라 사용한 마법을 추적할 수 있는 여지까지도 남겨놓은 것이었다.

    제아무리 제국이 마법을 경시한다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대놓고 남아있는 마력의 흔적을 추적하는 정도는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일이 조금은 쉽게 풀리는 건가.”

    “아니, 오히려 어렵다고 봐야지.”

    “어째서 말이 그렇게 되는 거지?”

    “그야 저쪽에서 정말로 본인들을 대놓고 쫓아 달라고 하고 흔적을 남겼을 리는 없잖아.”

    듣고 보니 맞는 말에 헨리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일부러 이런 흔적을 남겼다는 건가.”

    “그렇다고 봐야지. 이 정도 고위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실력이 있는데 이런 강대한 마력의 흔적을 놓쳤다는 건 말이 안 돼. 그쪽이 어지간히 멍청하지 않고서야 이런 건 오히려 설계된 쪽이라고 봐야지.”

    “수사에 혼선을 주려고 일부러 남겨놨다는 거로군.”

    “그렇지. 제대로 이해했어.”

    “그래서 어렵다는 건 무슨 말이지?”

    상대방의 노림수를 이렇게 쉽게 눈치를 챘음에도 일이 쉽게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어렵다고 말하는 것에서 헨리는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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