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96화 (96/111)
  • #96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걸.”

    그때 레너드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에 재갈이 제발 풀리기만을 기도하던 샐리는 움찔하며 레너드의 뒤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그림자 쪽을 유심히 쳐다봤다.

    “넌 뭐야.”

    “길거리에서 죽을 뻔한 걸 구해놨더니 벌써 잊은 건가? 버르장머리도 없는 녀석.”

    목소리 자체가 서늘한 것도 있었지만, 몸 전체를 가리고 있는 허름한 천 속에서 느껴지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은 레너드를 다그치는 인물이 결코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죄,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말조심하도록 해.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예의 없이 굴었다가는 누가 진짜 위인지 깨닫게 해줄 테니까.”

    예의 따위는 눈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던 레너드가 저리도 공손하게 허리까지 숙여가며 사죄하는 모습에 샐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마치 임자를 제대로 만난 똥강아지처럼 몸을 떨면서까지 공포를 느끼는 것은 말 그대로 이질적이었다.

    “너희들 공작님 목에 이것 좀 채워드려.”

    망토를 뒤집어쓴 남자가 건넨 것은 가운데 새빨간 보석이 박혀 있는 목줄이었다. 그리고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만하게 굴며 샐리를 이곳을 옮겨온 건장한 체격의 남자 둘은 허겁지겁 그의 앞으로 달려가 명령한 바를 수행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읍, 으읍.”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 말 정도는 할 수 있게 해줄 테니까.”

    남자의 말에 샐리는 자신을 붙잡는 남자들의 기분 나쁜 손길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을 멈췄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에게 채워질 목줄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기운에 대한 거부감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흐음, 확실히 감이 좋은 것 같네. 원래라면 이런 누추한 곳에 모시면 안 되는데 말이야. 그 유명하신 스테판 공작을 이렇게 모셔서 미안하긴 하네. 당신 같은 귀족에게는 맞지 않는 허름한 오두막이지?”

    “하아, 아까부터 말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그러다가 내가 들어서는 안 될 정보라도 누설하면 어쩌려고 그래.”

    “들었던 대로 기가 세기는 하네.”

    정체불명의 남자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며 어떻게든 이겨 먹으려는 샐리를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나도 그렇게 기가 센 인간을 좋아하지는 않아서 입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아, 그리고 아가씨의 능력은 지금 차고 있는 목줄 때문에 쓸 수 없을 테니 참고해두고.”

    이렇게까지 객기를 부릴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말에 샐리는 놀라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샐리가 가진 능력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손가락 안에 들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들도 정확한 능력을 알지는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지금 이 정체불명의 남자는 정체가 뭐길래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 샐리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많이 당황한 모양이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옆에서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레너드는 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듯 멍하니 서서 감히 끼어들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사람을 붙여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내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꽤나 까다로운 능력을 얻었네.”

    단순히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아는 수준을 넘어선 듯한 거슬리는 말투였다.

    “그래서 날 납치한 이유가 뭐야. 아니, 제국의 공작과 성녀를 납치한 이유가 뭔지 물어야겠네.”

    “아직도 입장이 이해가 안 된 건가? 이제는 내가 그쪽을 심문하는 역할이야.”

    “내가 그냥 입을 열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그렇게 객기를 부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니까? 아가씨가 입을 안 연다고 하면 내가 그냥 별수가 없겠다는 생각에 그냥 넘어가야겠구나 하고 그냥 갈까 싶어?”

    이 협박이 단순한 위협용이 아니라는 것은 샐리가 지금까지 경험해오면서 쌓인 직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이유 정도는 알 수 있잖아. 원하는 게 있으니 이런 일을 벌이는 거 아니야?”

    샐리는 이전보다 많이 유순해진 말투로 다시 한번 도전했다. 저들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두워진 밖을 본다면 지금쯤이면 헨리 쪽에서 눈치를 채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래, 그래. 그렇게 얌전해지니 조금 봐줄 만하네.”

    망토 안에서 드러나는 새하얀 건치와 함께 튀어나오는 비릿한 웃음이 역겹기 짝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저 누군가 구하러 와주기를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가 눈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직접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은 샐리에게는 희귀한 경험이었다.

    지금 느껴지는 무력감만큼이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는데, 그렇기에 샐리의 가슴속에는 헨리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수밖에 없었다.

    “특별한 이유야 있겠어? 그냥 우리 일을 방해하니까 데리고 온 거지.”

    “그럼 이렇게 시간을 끌 필요가 뭐 있어. 그냥 죽이면 그만인걸.”

    “큭큭, 아깝게 그럴 수야 있나. 특히나 저기 계신 분이 그렇게 쉽게 죽이는 걸 그냥 지켜볼 리가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아까 자기 수하를 부리는 것처럼 다루던데.”

    “뭐 그런 관계도 있는 법이지. 어쨌든 그쪽은 실험체로서의 가치도 있으니 살려둔 거야. 그게 아니었다면 아가씨의 말처럼 진작에 죽이고 끝냈겠지.”

    실험체로서의 가치.

    저 말은 정체불명의 사내가 언급한 샐리 본인이 가진 힘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금 목에 채운 특별한 장치까지 준비했을 정도로 저쪽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함과 동시에 이 힘에 대한 흥미도 동시에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시간은 충분할 것 같네.’

    어쨌든 저들의 목적이 단순한 살해에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샐리는 어떻게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본인이 저들의 장난감이 되어 망가지기 전에 헨리가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도 내 실험에는 아가씨가 조금은 협조적으로 나와줘야 해서 그쪽이 궁금해할 만한 것들은 얘기해줄게.”

    정체불명의 마법사는 머리를 덮고 있던 허름한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가 후드를 벗자마자 나온 인간의 몰골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흉측한 얼굴에 샐리는 기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남자는 자신의 흉측한 몰골에 대해 질색하는 샐리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강제로 눈을 뜨게 만들었다.

    “똑똑히 봐라. 이 계집년아.”

    남자의 손이 닿자마자 샐리의 머릿속에는 이 정체불명의 흉측한 몰골을 가진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억의 파편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당신 정체가 뭐야.”

    “그냥 평범한 마법사라고 알아 둬. 어쨌든 여신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 넌 내 실험체가 되어줘야겠어.”

    샐리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기억의 파편을 통해 자신이 봤던 카넬로 아스트리아의 모습을 똑똑히 봤다. 차갑게 내뱉은 말과 함께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의 사람에게로 쏟아지는 무자비한 빛의 폭격은 분명히 보통 사람에게 퍼부을만한 공격은 아니었다.

    “설마….”

    “역시 눈치가 빠르군. 어쨌든 오늘 당장 아가씨에게 볼일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야.”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샐리의 눈앞에서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허름한 오두막에는 샐리와 레너드 그리고 샐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괴한 둘만이 남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전 귀족 나리.”

    “밖에 있는 녀석들을 전부 들여보내.”

    조금 전까지 위축된 채로 눈치만 살피던 레너드는 이내 기세등등한 태도로 샐리를 내려다보며 안에서 함께 대기하고 있던 남자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레너드의 명령을 받은 남자가 밖에 나갔다 들어오자마자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우르르 좁은 오두막으로 들어왔다.

    “다신 자기 남편에게로 돌아갈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버려.”

    레너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들은 열띤 환호와 함께 샐리에게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레너드는 어떻게든 남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샐리를 비웃으며 그녀의 비참한 결말을 두 눈에 똑똑히 담기 위해 구석진 자리에 있던 의자를 바로 앞으로 가져와 앉았다.

    “대신관이 찾아왔다고?”

    “그렇습니다.”

    “그럼 다른 하녀를 시켜서 전할 것이지, 왜 직접 온 거야.”

    제이스는 괜한 불안감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모든 감각적인 면이 일반적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말도 안 되게 발달한 그에게도 대신관의 웃는 얼굴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분위기는 그가 클로에를 찾아올 때마다 불안하게 만들었다.

    성녀의 존재가 얼마나 귀중한지 인지하고 있었기에 제이스는 지금 자신에게 보고하고 있는 길드의 일원을 하녀로서 클로에의 곁에 붙여놓은 것이었다. 클로에에게 접근하는 이들의 동태를 살핌과 동시에 행여나 그녀에게 위해를 가하기라도 한다면 단칼에 목을 베어버리도록 명령어까지 입력해둔 상태였다.

    그렇기에 제이스는 클로에가 대신관과 만나는 자리임에도 근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이탈해 자신을 찾아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성기사들이 성녀궁 근처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세웠습니다.”

    “뭐? 그 녀석들이 무슨 권한으로 제국의 황궁에서 그런 행패를 부리는 거지?”

    제이스가 신전의 인물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들은 지금은 죽은 선대 황제의 뜻에 어울려 대륙의 평화와 안전에 이바지한다는 본인들의 규율을 어기고 서서히 부패한 집단으로 변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금처럼 클로에를 만나는 자리에 있어서 그들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성녀의 존재를 자신들의 것처럼 부린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대신관이 직접 방문한 지금 상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클로에를 만나기 위해 방문하는 모든 신관들은 하나같이 고개가 빳빳하면서 클로에를 자신들의 아랫사람으로 대우해왔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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