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여긴 어디지?’
어두컴컴한 의식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려 눈을 떠보니 어째서인지 눈앞이 흐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어지러운 머릿속에서는 기억의 파편조차 남아있지 않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일어난 건가.”
아무리 봐도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뒤에 보고하는 듯한 남자의 말투에 샐리는 대충 지금 상황이 결코 좋지 못하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분명히 대신관을 만나고 난 다음에 기억이 없어.’
입에 물린 재갈 탓에 샐리는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또한 뒤로 묶여있는 손과 함께 발목에 느껴지는 차가운 사슬의 감촉으로 보아하니 저쪽에서도 단단히 준비한 것이 틀림없었다.
분명히 마지막 기억 속에서 자신의 모습은 클로에와 함께 황궁 안에서 대신관을 만났는데,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으니 그녀로서는 단정 지을 범인이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대신관이 저지른 건가.’
클로에와 대화하던 도중 등장한 대신관은 애써 사람 좋아 보이게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 속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인상에 샐리는 자신을 편하게 대해도 된다는 대신관의 말에도 넘어가지 않고 경계의 벽을 세워두었다.
그러더니 대신관은 클로에와 신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샐리는 그 이야기에 끼어있는 것이 불편하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대신관이 샐리를 막아 세웠다.
이유인즉슨 최근 샐리가 발표한 대륙횡단 열차 계획에 흥미가 있다는 이유로 함께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샐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 대신관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매몰차게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에 애매했기에 결국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뭘 했더라….’
샐리는 어떻게든 어지럽혀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성녀는 왜 데려온 거야?”
“나야 모르지. 너랑 똑같이 명령받은 대로 해야 할 일을 할 뿐인데.”
어렴풋이 들리는 남자들의 대화에 샐리는 서서히 초점이 맞춰지는 시야 속에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어두운 실내에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시야가 제대로 돌아온 샐리는 자신의 바로 옆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곤히 쓰러져있는 클로에를 발견했다.
‘클로에, 클로에!’
입에 재갈이 물려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샐리는 다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지만 느껴지는 것은 축축한 천의 식감뿐이었다. 행여나 잘못된 것은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에 샐리는 어떻게든 클로에 근처로 기어가 그녀의 숨소리를 체크했다.
‘자고 있는 건가.’
일정한 박자로 조곤조곤하게 들리는 숨소리는 클로에의 몸에 다행스럽게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증거가 됐다. 다만 지금 제법 긴급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듯 편안하게 엎드려 있는 클로에를 어떻게든 깨우기 위해 샐리는 몸에 쥐가 날 정도로 몸부림을 치며 그녀를 깨우기 위해 노력했다.
“어라, 한 명이 일어났는데?”
“어느 쪽이야.”
“음, 갈색 머리인 걸 보아하니 스테판 공작 쪽이네.”
이쪽의 신분도 확실한 걸 보아하니 계획된 범죄가 분명했다. 그것도 대신관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남자들의 일말의 긴장감조차 없는 목소리에서는 본인들에게 어떤 화도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렇다면 그 귀족 나리께서 좋아하시겠네.”
“귀족 나리라니. 그 거지 꼴로 여전히 자기보고 귀족이라며 예의를 갖추라는 걸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그건 그래. 큭큭.”
남자들의 대화로 유추해보니 지금의 납치극은 단순히 대신관 본인의 의지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물론 대신관 쪽에서도 돌아가는 이득이 있으니 이런 일을 저질렀을 것으로 보이는데, 남자들이 언급한 귀족 나리의 정체는 샐리의 머릿속에서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대신관에게 이득이 돌아가려면 분명히 1 황자와 연관이 있을 텐데.’
이런 대담한 납치극은 보통의 도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표적이 자신과 성녀인 클로에가 됐다는 것에서 샐리는 지금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을 1 황자로 유추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일을 벌일 인물은 1 황자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샐리의 추측은 앞에 있는 남자들의 대화 탓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또 나를 노리고 있는 인물이 있다고? 그렇다면 클로에는 도대체 왜 납치한 거지? 그리고 대신관은 어디로 갔고.’
서서히 느려지는 마차 속도에 샐리는 더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으읍.”
그때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샐리는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눈을 뜬 클로에는 잔뜩 당황해 식은땀까지 흘리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빡빡하게 결박된 밧줄이 가녀린 여자의 몸부림으로 풀릴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샐리의 경우 입에 재갈이 물려있는 상태이기에 언령이라는 특별한 능력조차 사용할 수가 없었다.
“자, 아가씨들 이제 도착했다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 둘이 말에서 내려 샐리와 클로에가 갇혀있는 마차의 문을 열고 두 사람에게로 손을 뻗었다.
“악!”
샐리는 깨어난 지 제법 되었기에 이미 상황 파악을 완료한 뒤였다. 현재로서는 뾰족한 수단이 없기에 쓸데없는 반항은 본인에게 악영향만 가져올 것이란 걸 말이다. 그러나 본인이 납치됐다는 것을 인지하여 패닉 상태에 빠진 클로에는 샐리처럼 차분하게 상황을 그저 지켜만 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음흉한 얼굴로 다가와 손을 뻗는 남자의 얼굴을 세차게 발로 차버렸다. 클로에의 힘이 실린 발차기를 맞은 남자는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마차 아래로 나가떨어졌다.
“이게!”
짜악.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성녀이고 공작이고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자신의 동료가 걷어차여 나가떨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또 다른 남자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곧장 클로에의 멱살을 잡아 올려 자신의 큼지막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때렸다.
“으읍, 읍!”
“흐흐, 왜 분해?”
남자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샐리의 눈빛에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희열을 느끼듯이 비웃으며 그녀의 턱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하아, 난 오히려 기센 여자들이 좋더라. 그 눈빛 아주 마음에 들어.”
몸까지 부르르 떨며 웃는 남자를 보니 샐리는 저절로 몸에 소름이 돋았다. 여기서는 오히려 더 자극하기보다는 자존심을 조금 구기더라도 눈에 힘을 조금 빼야 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자, 그럼 이제 기다리는 분도 있고 하니 가보자고.”
그렇게 남자의 손에 끌려간 샐리는 어느 허름한 오두막 안에 내팽개쳐졌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 따위도 없이 매정하게 내던져진 샐리는 그대로 차가운 오두막의 나무 바닥에 얼굴을 제대로 부딪치며 무언가에 긁힌 것인지 볼 쪽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상처 따위에 신경 쓸 새도 없이 눈앞에 나타난 그림자의 정체에 샐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읍, 으읍!”
“큭큭, 꼴이 아주 좋아.”
레너드 스테판.
어느 날 소리소문없이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던 스테판 공작가의 전 공자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샐리를 바라보며 호쾌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귀족과도 같은 자태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 허름한 행색에 샐리도 한눈에 알아보지는 못했다.
“날 이 꼴로 만들고도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어?”
얼굴을 뒤덮은 거무스름한 수염들과 아무렇게나 떡진 머리는 이 사람이 공작가의 자제라고 주장했을 때 믿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거지꼴에 가까운 행색이었다. 그래서인지 아까 남자들이 레너드를 얕보는 듯한 대화 내용도 이해가 갔다.
그래서 샐리는 더더욱 의문이 들었다.
이런 거지꼴을 한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인간이 어떻게 신전의 대신관을 포섭할 수 있었던 것인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나 보네.”
레너드는 곤혹스러운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샐리를 보며 통쾌함을 숨기지 못했다. 샐리가 이빨을 드러낸 이후로 언제나 궁지에만 몰리던 레너드의 입장에서는 상상 속에서만 이루던 일을 해낸 것이니 기쁠 만도 했다.
“그래, 이거지. 이게 옳게 된 세상이지. 진작에 이랬어야 하는데 말이야. 아주 꼴이 좋아.”
잔뜩 신이 난 레너드는 그동안 응축됐던 분노를 풀기 위해 샐리를 실컷 조롱하기 시작했다.
‘하아, 짜증나네.’
감정 통제에 관한 능력에 있어서 통달했다고 자신하는 샐리도 예상치 못한 고난을 맞이함과 동시에 자신에게 이런 역경을 안겨준 인물이 언제나 무시해오던 레너드라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이, 이 녀석 재갈 좀 풀어봐.”
레너드는 샐리가 분에 못 이겨 부들대며 자신을 욕해주기를 오히려 기대하는 듯 보였다. 조금이라도 이 상황을 즐기고 싶었는데, 때마침 그날 자신이 분에 못 이겨 샐리에게 폭력을 행사하였다가 폭삭 망했던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때 화를 참지 못하는 자신을 비웃던 건방진 여동생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며 계속해서 속을 긁었는데, 그것을 지금이라도 조금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