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92화 (92/111)

#92

“미안해.”

그 때문에 제이스의 머릿속에서의 클로에는 강인한 여자 그 자체였다. 당시의 분노를 아직까지도 가라앉히지 못하고 행패를 부리는 자신보다도 훨씬 어른스럽고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클로에가 이토록 서럽게 우니 제이스의 입장에서는 미안하다는 말 이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얘기하자, 우리.”

주위를 둘러보니 탈출구가 없는 낭떠러지밖에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어떻게든 서럽게 우는 클로에를 달래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한 번 터진 눈물이 쉽게 그칠 리가 없었다. 그것도 서운함이 쌓이고 쌓이다 터져버린 눈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녀의 굵은 눈물에는 그동안 힘들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담겨있었다.

“미안해, 내가 진짜로 잘못했어. 응?”

클로에는 자신을 안으려는 기다란 팔을 어떻게든 떼어내려 몸부림쳤지만, 제이스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녀를 품에 안지 않으면 대화를 시작조차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 역시도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결국 힘에서 이겨버린 제이스는 클로에를 품에 안는 데 성공했다. 그녀가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하더라도 제이스는 클로에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이거 놔.”

“싫어. 얘기하자면서 왜 도망가려는 건데.”

“안 해줄 거잖아!”

“아니야. 할 거야. 진짜 하려고 했어.”

다급하게 사람을 부여잡는 목소리는 확실히 신뢰가 있었다. 클로에는 겨우 울음을 그치고 제이스의 얼굴을 살짝 올려다봤는데, 그의 눈동자에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격한 흔들림을 포착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응.”

이제는 두 사람이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면 될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그때.

“잠깐만.”

제이스는 황궁의 감옥 방향에서 느껴지는 방대한 마력량에 흠칫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클로에를 자신의 품에서 떼어냈다. 사정을 모르면 충분히 서운할 만한 행동에 클로에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제이스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잠깐만 기다려줄래?”

“어, 어디가.”

심상치 않은 마력 방출량은 제이스를 뒤도 안 돌아보고 황궁의 감옥이 있는 곳으로 뛰쳐나가게 만들었다. 지금 두 사람이 거닐고 있는 정원에서 황궁의 감옥까지는 제법 거리가 되었다.

그런데도 미세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 온몸으로 체감이 될 정도의 마력이 느껴지는 것은 분명히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클로에를 지켜. 혹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알지?”

“물론입니다.”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어디서부터 지켜본 것인지.

언제나 클로에를 지켜오던 하녀가 갑자기 수풀에서 뛰어나오며 제이스가 내린 명령을 확인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가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응.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여기서 기다려. 알았지?”

***

“정말 죄송합니다!”

사건이 발생한 바로 다음 날.

저택으로 들이닥친 1 황자에 대한 소식에 기분 좋게 샐리와의 아침을 맞이하려던 헨리는 여전히 불쾌한 소식과 함께 침대에서 일어나야 했다. 그런 부분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것인지 그의 얼굴에서 여전히 가득 찬 분노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젯밤 황궁 감옥을 지키던 병사들은 화가 잔뜩 나 있는 헨리의 앞에 그대로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다.

안 그래도 헨리가 수도 방위대 대장으로 부임한 이후로 굉장히 엄격한 체계가 계속되다 보니 그와 친분이 없던 일반 병사들은 지레 겁을 집어먹기 일쑤였다. 평소에도 그런데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그를 바로 앞에서 마주친 지금 그들은 두려움에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했나? 그것도 여기 있는 인원이 한날한시에 단체로 잠이 들다니.”

“네, 그렇습니다.”

1 황자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당시 황자의 범죄에 대한 증언을 일선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말하던 귀족 둘이 살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무엇인가 날카로운 것으로 깔끔하게 경동맥을 잘라낸 것이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특히나 황궁 감옥을 감시하는 모든 인력이 어느 순간 갑자기 잠이 들었다는 부분이 헨리의 신경을 거스르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인물의 소행은 아니라는 생각에 골이 아파져 와 미간을 더 찡그리게 되었고, 그 탓에 1 황자 탈출에 대한 책임이 있는 병사들은 더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대들을 깨운 사람이 있다고?”

“네, 저기 있는 성녀님을 모시는 시종이 입구에서 저희를 깨우더군요.”

병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떨떠름한 얼굴의 제이스가 서 있었다. 그런 그를 본 헨리의 얼굴은 훨씬 더 험악해졌다.

“자네가 왜 여기 있지?”

헨리의 물음에 제이스는 바로 대답하기보다는 발걸음을 옮겨 헨리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가까운 거리까지 좁혀지자 병사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 사람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시종의 무례를 타박하며 헨리에게 다가가는 그를 저지했어야 마땅했지만, 머리가 새하얀 도화지가 되어버린 지금 그들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따로 얘기하고 싶은데.”

“짚이는 부분이 있나.”

그 말에 제이스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헨리는 눈짓으로 병사들에게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날 황궁 정원에 있었는데 감옥 쪽에서 심상치 않은 마력을 느껴서 말이야.”

“그곳에서까지 느껴졌다고?”

“그래, 내 생각에는 1 황자를 탈출시키는 데 마법사가 동원된 것 같아. 그것도 제법 실력 있는 마법사가.”

제이스의 말에 이 사건의 실마리를 풀 인물로 헨리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 뒤로 감옥으로 왔는데 병사들이 모두 잠들어 있었다는 건가.”

“그렇지.”

마법사의 존재는 새롭게 등장한 변수였다.

“어쨌든 마법사의 존재가 뒤를 봐주고 있는 이상 여기서 끝일 리는 없어.”

“그렇다고 봐야지.”

대화를 이어가던 도중 헨리는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는지 제이스 쪽을 빤히 쳐다봤다.

“뭐야, 왜 그런 눈빛으로 보냐.”

“웬일로 이렇게 적극적인가 해서. 제국을 무너뜨리고 싶은 게 네 목적 아니었나?”

“맞지. 근데 1 황자가 엮인 얘기라면 다르지. 클로에가 위험해질 수도 있거든.”

1 황자는 분명히 샐리를 극도로 경계하며 간계를 꾸밀만한 인물이었다. 이대로 그냥 넘어가서 나중만을 바라보며 기다릴만한 성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결국 샐리와 엮인 인물인 성녀 클로에는 1 황자인 오언이 보기에도 확실히 의심할만한 관계였다.

“나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거든. 나야 1 황자가 깽판을 쳐준다면 환영할 입장이야.”

제이스는 자신의 속내를 딱히 숨기지 않았다. 기왕 1 황자가 탈출하게 된 거 제국은 더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이 당연하게도 예상되는 수순이었다. 그런 난장판이라면 제이스와 그가 이끄는 길드에게는 활약할 판이 마련된 것이었고, 그것은 곧 제이스가 염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터였다.

“지금이라도 1 황자에게 붙으면 되지 않나.”

“그건 클로에가 싫어해서 안 돼.”

“그런 것치고는 살인도 서슴치 않더니.”

헨리는 제이스의 이중적인 태도에 코웃음을 쳤다.

“난 내 행동을 멈출 생각이 없어. 다만, 이번에는 약간 예외를 둘 뿐이야.”

“미안한데 이곳은 황궁 안이야. 내가 명령만 내리면 널 잡는 건 어려울 것도 없어.”

“지난번에 했던 내기 기억 안 나?”

제이스 역시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 황자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고 해도 헨리와 샐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무슨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눈앞에서 봤으니 말이다.

“그게 언제까지고 유효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이번 일까지는 협력하는 게 어때. 그 뒤로 우리 둘이 승부를 보자고.”

자신들이 사랑하는 여자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동맹 제안이었다. 오언은 분명히 샐리를 노리고 있을 것이고, 또한 성녀의 존재도 노릴 것이었다. 그에게 남은 수단은 그 두 가지가 전부이니 말이다.

“그럼 이제 그건 멈추는 거냐.”

“1 황자를 잡을 때까지는. 그리고 내가 널 죽이고 난 뒤에는 다시 시작할 거야.”

“그럴 리는 없을 거다. 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결심했으니까.”

굳건하게 빛나는 헨리의 황금빛 눈동자에서 그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제이스는 말을 아끼며 시종이라는 자리에 맞게 예의를 차려 인사한 뒤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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