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90화 (90/111)
  • #90

    [황제를 믿고 일하다니 멍청하기 그지없네.]

    그 말은 헨리에게 비수처럼 날아 들어와 꽂혔다. 헨리는 그동안 자신을 굳건하게 지탱해오던 신념이 서서히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넘치던 사람에게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가 가장 위험했다.

    그리고 헨리는 지금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좋지 않은 정신상태에서 평소에는 엄두도 못 낼 높은 도수의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윽.”

    워낙 독했던 술이어서 그런 것인지 목 넘김이 시원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타들어 가는 듯한 기분 나쁜 느낌만이 진한 여운으로 남았다. 그래서인지 술을 거칠게 들이켠 헨리의 입에서는 시원하게 취기가 섞인 추임새가 아닌 격통이 느껴지는 신음이 튀어나왔다.

    “먼저 마시고 있었네요.”

    어색한 배웅을 마친 샐리는 불이 켜지지 않은 어두운 방 안으로 슬며시 들어왔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손에는 헨리가 지금 마시는 것과 똑같은 도수가 높은 독한 술이 담긴 병이 들려있었다.

    “오늘은 그런 기분이 드는 날이라.”

    “나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잔에 마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거 정말 독한 술인데.”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소.”

    헨리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퉁명스러움에 샐리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그가 어째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감이 잡혔다. 확실히 샐리는 그와 상의도 없이 황가의 혈통에 대한 언급을 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상황상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이건 분명히 헨리에게 있어서 예의가 아니었다.

    “그대가 아까 한 이야기. 난 모르는 이야기던데.”

    “당신에게 황제가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다만 저 둘에게 우리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어요.”

    샐리가 헨리의 혈통을 언급한 이유는 단순한 위협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언질이라도 줄 수 있었던 거 아니오. 그대는 항상 그런 식이지. 가끔 보면 샐리 당신은 날 그저 도구로 밖에 여기지 않는 것으로 보여.”

    격양된 감정은 절제된 이성의 선을 넘어버렸다. 그의 말에 격한 울분의 감정이 담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샐리에 대한 단순한 하소연이 아닌 원망이 섞인 단어들에서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헨리에게 그런 말을 들은 샐리는 적잖이 당황한 듯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미안해요.”

    한 번 내지르면 속이라도 시원할 줄 알았건만 충격에 그대로 굳어버린 샐리의 얼굴을 보니 오히려 참담해진 심정에 헨리는 다시 한번 독한 술을 거친 기세로 들이켰다. 제발 이 이상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음에도 술이 들어가 더 진솔해진 입에서는 샐리에게 그동안 느꼈던 서운한 일들이 하나하나 나열되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한 번 열린 입은 다시 닫힐 줄을 몰랐고, 그렇게 시작된 길고 긴 하소연이 끝나자 헨리는 마치 힘든 훈련을 마치고 나온 것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샐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그의 옆으로 와 앉았다.

    “정말 미안해요.”

    “아니오. 그냥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나 스스로 조절을 못한 것 같소. 오늘 했던 말들은 모두 잊으시오.”

    “싫어요.”

    마음에 담아뒀던 말들을 시원하게 내지르고 나니 그제야 술기운이 깬 듯 헨리는 제정신을 차리고 샐리에게 자신이 했던 말들에 대해 오히려 미안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스스로가 너무 어린애 같았다는 생각과 함께 오늘의 부끄러운 기억은 서로 그냥 잊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샐리가 오히려 너무 단호하게 싫다고 말을 하니 헨리는 자기가 했던 말이 그녀에게 심한 상처로 남았다며 혼자 어림짐작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요. 특히 오늘 일은 당신한테 할 말이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이제는 샐리의 입에서 서운하다는 말이 나올 차례라는 생각과 이대로 착실하게 쌓아온 관계가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에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헨리는 침착하게 자기 잘못만을 인정하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마치 발작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놀라는 헨리를 보며 샐리는 가볍게 웃으며 무거웠던 방 안의 공기를 조금은 가볍게 만들었다.

    “그게….”

    “왜요. 내가 당신이 한 말을 듣고 상처받았을 줄 알았어요?”

    그 말에 헨리는 곧바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보통이라면 이 시점에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따지고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샐리가 자신의 혈통을 언급하며 2 황자 쪽을 압박하는 행동에 딴지를 걸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샐리의 그 행동에 말을 덧붙여주지 못한 것에 대해 지금은 후회가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오히려 샐리는 본인이 이 정도까지 판을 차려줬는데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조차 얹지 못한 것을 타박해도 될 정도였다.

    그런데 샐리는 오히려 헨리 자신이 느꼈던 서운함을 공감해주며 나섰다.

    “그야 내가 그대의 말에 제대로 호응도 못 하고 오히려 이렇게 징징대고 있지 않소.”

    “그 부분은 이미 저쪽에 충분히 압박이 된 거니 상관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충분히 서운할 만하죠. 지금까지 나한테 다 맞춰줬는데.”

    샐리는 이미 분에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본인이 설계한 대로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렇게 든든하고 사랑스러운 남자를 남편으로 얻었으니 말이다.

    언제나 본인이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던 샐리의 입장에서는 헨리가 이렇게 서운함을 토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말해줘서 고마워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도 시기상 지금 말한 게 다행이라고 느껴지고 있소.”

    곪아가는 상처는 점점 수복하기가 힘들어지기 마련이었다. 두 사람은 오히려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기 전에 서로에게 서운했던 부분을 진솔하게 나눌 수 있다는 것에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게요. 이런 건 오히려 빠르게 잡고 나갈 수 있다면 좋으니까요. 그래서 혹시 더 서운했던 건 없어요?”

    “정말 없소. 이건 진심이오.”

    “음, 일단 같이 한잔할까요? 여기 잔도 가져왔어요.”

    “그대가 가지고 온 술은 내가 마시던 것과 조금 다른 것 같은데.”

    “같은 종류이기는 한데 이건 도수가 좀 낮은 거예요.”

    “그럼 난 내가 마시던 걸로 마시겠소.”

    “흠, 그거 되게 독한 건데 괜찮아요?”

    “오늘은 조금 취하고 싶은 기분이라.”

    오늘따라 유독 정신적으로 힘들어 보이는 헨리의 모습에 샐리는 그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가 들고 있던 술병을 가져와 잔에 따라줬다.

    “자, 마셔요.”

    “고맙소.”

    “천천히 마셔요. 아직 술도 이 남았는데 벌써 취하면 곤란하니까.”

    “술이 그렇게 약한 편이 아니라 괜찮소.”

    여전히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서글픔은 샐리가 이미 헨리가 취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힘들었던 일들을 좀 훌훌 털고 가요. 일단 저의 경우에는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이랑 함께하면서 힘들었던 적이 전혀 없어요.”

    “정말이오?”

    “그럼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는데 힘들게 뭐가 있어요. 물론 그것 때문에 당신이 마음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그 부분은 앞으로 고쳐나갈게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했던 말은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우리 앞으로는 더 많이 대화해요.”

    샐리는 지금의 관계를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그를 위해 살아갈 것이라 결혼식에서 맹세했으니 말이다. 그 맹세에는 거짓 따위 한 점도 없는 진실한 맹세였다.

    “부부관계는 한쪽만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한테 서운한 게 있거나 하면 바로바로 말해요.”

    “그러다가 서로 감정이 상하면 어떻게 하오.”

    “제국 최고의 기사님이 왜 그렇게 겁이 많아요.”

    “그대를 잃고 싶지 않아서 그렇소.”

    그토록 굳건하게 적을 짓밟던 헨리도 사랑하는 이와 혹시라도 관계가 틀어질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꾹 참고 넘어가던 지난날의 서운한 감정이 끝내 오늘에서야 터지고 만 것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앞으로는 말해주세요. 제가 그런 부분에서는 눈치가 없어서.”

    배시시 웃으며 멋쩍게 머리를 긁는 샐리를 보자 헨리는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인지하기 시작한 순간 헨리는 샐리를 순식간에 덮쳐버렸다.

    “잘못한 게 있으니까 오늘은 마음대로 하세요.”

    “그 말 후회하지 않소?”

    샐리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헨리는 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자를 거칠게 탐하며 그동안 쌓아왔던 각양각색의 감정들을 모두 풀기 시작했다.

    ***

    “고생이 많으십니다, 황자님.”

    어둡디 어두운 지하 감옥 안에서 울려 퍼지는 음흉한 목소리에 구석에 쭈그려 잠을 청하고 있던 1 황자 오언이 눈을 떴다. 고귀하디 고귀한 황자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죄수의 생활에 벌써 익숙해진 듯 거친 촉감의 천으로 이루어진 침대에서 잠을 잘 자고 있었다.

    “어째 기분이 좋아 보인다?”

    말에서 송곳과도 같은 날카로움이 묻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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