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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89화 (89/111)
  • #89

    “좀 더 느긋하게 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네요. 전 차기 황제로 2 황자님을 지지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그 말에 클로에와 제이스는 물론이거니와 헨리 역시도 처음 듣는 결정에 눈이 휘둥그레져 샐리 쪽을 쳐다봤다. 오히려 충격을 받아야 하는 입장인 두 사람보다도 눈동자가 훨씬 더 흔들리는 헨리에게서 연민의 감정까지도 느껴질 만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예요. 전 2 황자님이 제국을 제대로 이끌어나갈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클로에 당신을 이 저택으로 초대한 거예요.”

    “샐리가 황제가 될 생각이에요?”

    “제가 왜요 여기 황가의 혈통이 있는데.”

    샐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헨리를 가리켰고, 헨리는 상상도 못했던 황제의 자리에 대한 가능성의 이야기에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멍해졌다.

    “저쪽은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제이스는 전에 없던 당혹스러움으로 물든 헨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애초에 이런 꿍꿍이로 초대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전에 협의가 된 내용은 아닌 듯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저 표정은 보통의 연기력으로는 구현해내기 힘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전에 했던 얘기와는 다르잖아요.”

    샐리에게는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당황스러울 수 있는 깜짝 소식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머릿속으로 막연하게 클로에라면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으로 생각했다. 클로에라면 자신이 내린 선택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주던 무조건적인 호감 때문이었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그래서인지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클로에에게 샐리는 자기도 모르게 다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이해할 수 없어요. 샐리는 분명히 저와 함께 2 황자님을 지지하기로 했잖아요.”

    “생각해 본다고 했죠.”

    “그래도….”

    샐리가 추구하는 방향은 분명히 클로에 본인이 지지하고 있는 2 황자 토니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일치했다. 그러나 샐리는 2 황자를 지지하는 것이 아닌 독자적인 노선으로 갈아타겠다는 것이었고, 그 점에서 클로에는 서운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클로에가 황궁의 생활에 적응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줬던 인물이 바로 2 황자인 토니였다. 그에게는 이래저래 감사한 일이 많았고, 생각도 일치했기에 클로에는 받았던 은혜를 그냥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클로에가 샐리에게 느끼고 있는 서운함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클로에가 서운해할 이유는 없어요. 난 애초에 2 황자님과 함께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으니까.”

    “왜요. 전 샐리의 생각이 궁금해요. 어째서 2 황자님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두 사람의 논쟁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클로에는 어째서 방향성도 같고 신진 귀족 세력을 차츰차츰 흡수해나가며 세력을 성장시키고 있는 토니가 부족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반대로 샐리는 스스로 결단을 내릴 강단도 없고 능력도 뛰어나지 않은 2 황제에게 어째서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강단도 없고 능력도 없어요. 귀족 세력이 2 황자님에게 달라붙는 건 그냥 일종의 도박 같은 거예요.”

    “그래도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잖아요. 그리고 저희가 옆에서 도와드리면 충분히 제 역할을 해내실 수 있을 거예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유능한 군주 밑에 자연스럽게 유능한 신하가 들어가는 법이지요. 요행을 바라는 건 한 나라를 이끌어나가야 할 군주의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바라서는 안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냉혹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랄한 비판이 이어졌다. 샐리는 본인이 생각하는 바를 가감 없이 전부 입 밖으로 내뱉었다.

    애초에 독한 술을 준비한 이유는 클로에에게서 조금 더 진솔한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그 덕분에 그녀의 곁을 지키는 시종이 평범한 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두 사람이 제국에 와 황궁에 머물기까지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샐리는 원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도 생각지 못한 변수가 하나 있다면 술이 들어가 감정이 조금 더 격해질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애초에 샐리는 2 황자님을 곁에서 지켜본 적도 없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모든 걸 다 안다는 듯이 말할 수 있는 거죠?”

    감정이 격해진 것이 올라간 목소리 톤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클로에는 바로 옆에서 오랜 기간 토니를 지켜봐 온 사람이었다. 샐리의 말처럼 강단도 능력도 조금은 부족할 수 있지만, 이렇게까지 폄하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궁 안에서 그가 시종이나 하녀들을 대하는 것을 본다면 그가 가진 인덕은 말 그대로 훌륭했다. 샐리가 생각하는 황제는 아니더라도 그는 충분히 훌륭한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클로에의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이 이렇게 평가 절하되는 부분에서 그만 화를 참지 못하고 울분을 터트렸다.

    “정말 실망이에요.”

    “대체 뭐가 실망이란 거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거요. 전 샐리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지금 되게 유치하다고 생각 안 해요?”

    “유치하다고요?”

    처음으로 클로에가 샐리를 바라보며 시퍼렇게 눈을 떴다. 처음에는 조금 논리적으로 보이던 두 사람의 논쟁은 이내 의미 없는 소모전으로 변해버렸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서 느낀 서운함과 황당한 감정들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렇게 되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제이스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잔을 비웠다. 애초에 클로에는 마음 자체가 여렸다. 본인이 진 은혜를 언제나 마음속에 새기며 살아갔다. 그것이 아주 작은 크기더라도 한 번 호감을 얻은 인물과는 끝까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것이 그녀의 성격이었다.

    그런 호감도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을 건드렸을 때만큼은 클로에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냈다.

    “어떻게 우리 둘도 풀어야 할 게 남아있지 않나?”

    “여기서 그 이야기를 해도 괜찮다면 난 상관없다만.”

    “술기운도 깰 겸 밖으로 나가는 게 어때.”

    “원한다면.”

    그렇게 헨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샐리와 클로에의 언쟁을 지켜보는 메리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켜줌과 동시에 여기서 더 과열되면 말리라는 언질을 남기고 제이스와 저택 밖 정원으로 나갔다.

    ***

    “그래, 아직 더 할 게 남은 건가?”

    “당연하지. 제국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남아있는데.”

    “성녀의 생각은 다른 것 같은데.”

    헨리는 역시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데 능통했다. 클로에와 제이스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분위기를 읽음과 동시에 두 사람이 근본적으로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바로 눈치챈 것이었다.

    “확실히 눈치가 빠르네.”

    “자네가 제국에 원한이 있는 건 알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 없는 제국인들에게 해를 끼치려 한다면 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물론, 이미 그대가 저지른 범죄들을 눈감아 줄 생각도 없고.”

    헨리는 다시 한 번 제이스에게 단단히 경고를 날렸다. 과거의 아픈 사정이 있다고 해서 봐줄 생각 따위 눈곱만큼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주안의 목숨을 앗아간 상대의 손속을 봐준다니 헨리가 정한 스스로의 규율에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너한테 용서받을 생각 따위 추호도 없어. 그리고 말이야, 너희 제국의 병사들이 마을 사람들을 죽일 때 뭐라고 했었는지 아나?”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 제이스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눈에는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확연하게 보이는 독기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제국의 이름으로 죽였다고 했어. 그래서 난 그 녀석이 말했던 것처럼 복수의 대상을 정했을 뿐이야. 내가 왜 그 일에 연관된 녀석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녀야 하는 거지. 난 그딴 거 몰라. 내가 아는 건 그저 제국인이라는 것뿐이니까.”

    “그래서 제국인이라고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거냐.”

    헨리는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제이스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 그 정도 정보는 황궁에 들어오고 2 황자 덕분에 얻었어. 다만, 정말로 그런 일을 벌인 것에 가담한 인물인지 모르는 것뿐이야.”

    제아무리 밀린다고 해도 결국 황자는 황자였다. 궁 안에서 끼치는 영향력 덕분에 제이스는 쉽게 제국의 영향을 바로 받지 않는 시골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펼친 학살극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가담한 인물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제이스가 선택한 방법은 나름대로 유력한 인물들을 추려 실제 가담 여부에 상관없이 죽여 온 것이었다.

    “어쨌든 실제로 상관없는 사람들을 죽여 온 것이로군. 내 부하를 포함해서 말이야.”

    “거기에 관해서는 할 말 없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여 놓고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나.”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뭐?”

    “설마 황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왔던 건 아니지? 정말 제국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정벌하며 스스로가 정의롭다고 생각해왔던 거냐. 그렇다면 넌 정말 소름 끼치는 인간이로군.”

    그 말에 헨리는 그동안 물리쳐왔던 적들을 떠올리며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한 얼굴로 허공을 쳐다봤다. 생각해 보니 헨리는 제국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일념 하나로 말 그대로 개처럼 일했다.

    그 험한 전쟁터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며 제국에 위협이 될 만한 세력들을 하나하나 처단해왔다. 웃기는 건 황제를 혐오하면서도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적들에 대한 의구심을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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