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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88화 (88/111)
  • #88

    여유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이 한없이 긴장감이 내려앉은 헨리의 얼굴에 샐리 역시도 경각심을 갖기 시작했다. 언제나 자신 있게 자신의 걱정을 덜어주던 이가 덩달아 긴장하는 것에서 제이스라는 남자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인지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되니 샐리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궁금증이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저 두 사람은 무슨 관계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헨리가 경계할 정도로 위험한 남자와 클로에가 함께 한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흐르는 미묘하게 어색한 기류는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것은 결코 가벼운 사이에서 흐를 수 있는 어색함이 아니었다. 특히나 눈에 원망스러운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클로에를 본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 원망스러움은 진심으로 그 사람을 미워해서 나오는 감정과는 결이 달랐다.

    제아무리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는 샐리라고 하더라도 자세한 사정도 모르고 겉으로 드러나는 일부의 단서만 가지고 모든 것을 알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 그래도 저녁 식사를 한 번 대접하고 싶었는데 잘 됐네요. 기왕 이렇게 된 거 같이 갈까요?”

    저쪽에서 먼저 제안한 것이니 덥썩 물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오늘 헨리와 단둘이 먼저 이야기를 나누려던 주제를 두 사람 앞에서 꺼낼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샐리였지만 그 속에는 음흉함과 함께 자신을 믿는 클로에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

    “술은 잘하시나요?”

    “나쁘지는 않습니다.”

    “흐음, 끝까지 숨기겠다는 건가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마차 안은 어색하다 못해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클로에는 여전히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제이스에 대한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고, 제이스 역시도 그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동시에 선뜻 자신들을 저택으로 초대한 샐리에 대한 경계심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헨리의 경우에는 제이스에 대한 경계심과 함께 그 둘을 저택으로 초대한 샐리에 대한 의아함과 걱정스러움을 동시에 드러내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와중에 지금 이런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샐리는 어째서인지 제이스를 향한 관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제이스는 자신에게 연신 질문을 던지는 샐리를 향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애초에 제이스가 먼저 제안한 것이기는 했지만, 샐리가 정말로 자신들을 저택으로 초대해달라는 제안을 흔쾌히 수락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고 나온 배짱 있는 태도였는데 역효과가 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평범한 시종처럼은 보이지 않아서요. 그리고 본인도 그 점은 인정하지 않았나요.”

    “그랬지요.”

    “그런데도 여전히 시종 흉내를 내는 게 조금 의아해서 묻는 말이에요.”

    “제가 편해서 이러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래요. 그러고 보니 클로에는 술을 잘 마시나요?”

    샐리는 말할 생각이 없는 사람을 굳이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저택에 도착하면 그는 싫다고 해도 본색을 드러내며 스스로에 대한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려고 마련한 자리였으니 샐리는 자신이 있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는 말은 술에 취해 본 적이 없다는 건가요.”

    “아니에요. 그냥 술 자체를 즐기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그렇군요.”

    “믿어주세요, 샐리.”

    “하하, 알겠어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클로에였다. 다른 것보다 제이스와 헨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불꽃이 튀고 있으니 좌불안석인 것도 당연했다. 그런 그녀가 계속해서 신경 쓰이던 샐리는 클로에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간단한 농담을 던져보았고, 그 덕분에 클로에는 이전보다는 편안해진 얼굴로 저택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샐리는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예요.”

    “지난번에 나랑 약속했잖아요.”

    “약속?”

    샐리의 말에 클로에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성녀의 존재와 관련해서 샐리에게 이야기해주기로 했던 것이 떠올랐다. 물론 그것에는 전제조건이 붙어있었는데, 1 황자를 물리치고 전쟁과 약탈이 아닌 혁신적인 방안으로 제국을 이끌어나가려는 샐리는 그 조건을 만족했다고 볼 수 있었다.

    “아, 물론이죠. 그 이야기라면 해드릴게요.”

    그렇게 어색한 침묵을 두 여자가 최대한 풀어가기 시작할 무렵 드디어 마차 안에서 스테판 공작가의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

    “음식은 입에 맞나요?”

    “정말 맛있어요. 이렇게 성대하게 대접받아도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클로에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죠. 제 생명의 은인인데요.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제 성의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즐겨주세요.”

    그 말에 뒤에 나올 샐리의 충격적인 발언은 생각지도 못한 채 클로에는 자신의 앞에 놓인 화려한 만찬을 마음껏 즐겼다. 그런 와중에 제이스는 입맛이 살아나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는 클로에를 만족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본인의 앞에 놓인 생선을 한 점 야무지게 발라먹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식사가 마무리되는 단계가 됐을 무렵 샐리가 사전에 준비했던 대로 하녀들이 술이 따라져 있는 잔을 조심스럽게 들고 와 식사 자리에 앉아있는 모든 이의 앞에 놓았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술이에요. 마음에 들면 얼마든지 말해요. 더 있으니까.”

    샐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클로에는 별다른 의심 없이 앞에 놓여있는 잔을 들어 한 모금에 들이켰다.

    “우와! 이게 뭐예요?”

    “마음에 들어요?”

    샐리의 물음에 클로에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알코올의 맛은 거의 없이 과일의 달콤한 향이 가득 채우며 목 넘김까지도 부드러운 술맛은 클로에의 취향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원한다면 더 준비할 수 있으니 말해요.”

    마치 아이들이 먹는 것을 보고 흐뭇해하는 어머니처럼 인자한 미소였다. 물론 그 미소 속에는 클로에와 제이스를 향한 약간은 음흉한 의도가 숨어있었는데, 제이스는 그 의도를 읽기라도 한 것인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로 앞에 놓여있는 잔을 유심히 살폈다.

    “이게 뭐죠?”

    “뭐긴요.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술이죠.”

    누가 봐도 의심하는 티가 나는 헨리의 질문에도 샐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심지어는 이 특별히 제조한 술의 레시피도 마음에 든다면 알려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됐습니다.”

    제이스는 딱히 흥미가 없다는 듯 다소 냉랭한 말투로 샐리와의 대화를 뿌리친 뒤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이건….’

    클로에가 호들갑을 떨며 황급히 한 잔 더 주문한 이유에 대해 바로 알 것 같은 얼굴로 제이스는 입안 전체에서 퍼져나가는 향긋하면서도 달콤한 향을 천천히 음미했다. 그리고 만족한 기색이 역력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샐리의 입꼬리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 술은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술이었다. 다만 클로에와 제이스에게 전달된 잔은 그 도수가 훨씬 더 높은 술로 구성된 것으로 두 사람에게서 조금이라도 진실한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한 샐리의 계획이었다.

    물론 샐리와 헨리의 앞에 놓인 잔에 들어있는 술의 도수는 낮은 것으로 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럼 술도 들어갔겠다. 두 사람의 얘기를 좀 들어보고 싶은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주도하는 탓에 이미 독한 술을 두 잔째 걸친 클로에의 입은 한없이 가벼워져 있었다. 그 덕분에 샐리와 헨리는 성녀의 존재가 탄생하게 된 일화를 생각했던 것보다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애초에 이 부분은 클로에가 말해주기로 약속한 것이기는 했지만, 분위기에 취한 탓인지 클로에는 자신의 과거에 관한 이야기도 술술 풀었다.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신전 역시도 엮여있다고 봐야겠군.”

    애초에 신전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 헨리는 이야기가 시작됐을 무렵부터 거의 확실시하고 있었다.

    “대신관이라는 분이 황제를 처음 대면하는 데 도움을 주셨죠.”

    “대신관이?”

    “다짜고짜 황제를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우선 신전으로 가서 제 능력을 보여줬더니 그쪽에서 일을 알아서 진행했어요.”

    “확실히 신전이 제국에게 우호적이기는 했지.”

    그렇게 말을 마친 헨리는 샐리 쪽을 쓰윽 쳐다봤다. 그리고 샐리는 그것에서 마정석 때의 일을 떠올리라는 헨리의 눈빛으로부터의 신호를 곧바로 읽었다. 즉, 샐리가 지금부터 제국을 이끌어나가는 데 있어서 신전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역시 평범한 시종이 아니었군요.”

    “뭐, 그래서 쫓아내기라도 하게?”

    “전혀요. 당신은 클로에의 소중한 사람이잖아요. 딱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저도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자비를 베풀겠다는 샐리의 말에 조마조마하게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클로에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곧바로 샐리가 준비한 특별한 술을 한 잔 더 주문했다.

    “이런 이야기나 나누자고 부른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제이스는 서서히 알딸딸해지며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하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판단력마저도 흐려지는 시기가 올 것이 분명했기에 그는 샐리에게 빨리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할 것을 권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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