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87화 (87/111)
  • #87

    샐리는 숨겨야 할 부분은 숨겨가며 자신들이 마정석을 발견하게 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샐리는 그들이 원하는 것처럼 미지의 세력을 야만족으로 지칭하며 제국 변방의 영토를 빼앗은 야만족을 토벌하는 것으로 마정석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긴가민가하는 반응도 있었지만, 지금 1 황자를 순식간에 치워버린 샐리의 능력을 눈앞에서 바로 본 터라 약간 어색한 부분이 있는 이야기에도 신용이 올라갔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생각해낸 방안에 대해 설명을 드릴게요.”

    그렇게 시작된 대륙횡단 열차에 대한 샐리의 원대한 계획은 신진 귀족세력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물론이고, 중도파 귀족들 역시도 솔깃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제국이 지금까지 추구하던 뼈를 주고 살로 취하는 약탈 정책의 업그레이드 된 버전이었다. 잃는 것이 없이 얻는 것만이 있는 정책은 제국을 자연스럽게 대륙의 중심으로 올려놓을 수 있는 말 그대로의 혁신이었다.

    특히나 한 방울만으로도 열차를 움직일 동력을 제공해주는 마정석의 존재는 모든 이들을 혹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이제 제국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물론 샐리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제국을 이끌어갈 지도자에는 1 황자 오언도, 2 황자인 토니도 없었다.

    “당신, 오늘은 집에 일찍 돌아와 줄 수 있어요?”

    1 황자의 존재로 앞으로 바빠질 헨리였지만, 쑥스럽게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자신에게 이른 귀가를 요구하는 샐리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

    “샐리, 그런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회의가 끝나고 이제 저택으로 귀가하려던 샐리의 발걸음을 멈춘 사람은 다름 아닌 클로에였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반가운 목소리로 샐리의 발걸음을 기꺼이 붙잡았다. 최근에는 독에 대한 치료도 거의 끝나고, 헨리와 정식으로 결혼을 한 다음부터 저택으로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 때문인지 샐리는 잠시 잊었던 그녀의 존재가 자신에게로 먼저 다가와 주니 괜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전 그냥 차려진 상에 포크만 얹었을 뿐이에요.”

    샐리는 클로에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이 마린을 치켜세웠다. 그녀의 말대로 마린이라는 뛰어난 발명가의 존재가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한 덕분에 머리를 아프게 하던 많은 문제들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샐리가 이렇게 겸손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제가 말한 건 그게 아니에요. 그냥 이런 식으로 귀족 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방법을 어떻게 생각하셨냐는 거예요.”

    클로에가 감탄한 부분은 샐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약간 달랐다. 분명히 마정석을 이용한 대륙횡단 열차의 계획은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 계획을 발표한 시기가 말 그대로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진행 방식으로 귀족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능력. 그것에 클로에는 샐리가 발표를 진행하는 내내 거의 하트에 가까운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래서 제가 샐리를 좋아하나 봐요.”

    얼굴을 붉히며 눈을 살짝 치켜세우는 수줍은 미소에 어째서인지 샐리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샐리는 입으로 아니라고 하지만 한 번 마음을 열면 그 사람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부분이 있었다.

    특히나 이런 불도저 같은 성미를 가졌으면서도 은근히 여리여리하면서도 귀여운 타입에 약했다.

    이 모든 요소는 샐리의 남편인 헨리와 그녀의 소꿉친구인 페드로. 두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물론 클로에처럼 대놓고 호감을 드러내면 수상쩍으면서도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어쨌든 클로에의 부단한 노력은 결국 결실을 보는데 성공했다.

    “칭찬 고마워요.”

    그렇게 두 여인 사이에서 훈훈한 대화가 오고 가는 와중에 헨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멀찍한 곳에서 바라보던 제이스에게로 접근했다. 그리고 제이스는 자신에게로 다가올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멀리서 보면 성녀를 성심성의껏 모시는 시종이 자신보다 높은 직위의 사람에게 예법에 따라 인사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헨리는 이 상황이 오히려 제이스가 자신을 기만하려는 것으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행동 가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1 황자에게 무기를 판 범인이라는 것은 그날 화약이 터지며 성이 완전히 날아가 버리는 것을 몸소 겪고 알았다. 이 정도 양과 강도의 화약은 단순히 개인의 힘으로 조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 밖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탔지만, 전쟁터에서 살아왔던 헨리의 눈에 산산조각 난 각양각색 무기들의 잔해가 잔뜩 보였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는데.”

    “보아하니 성녀와는 각별한 사이인 건가? 그렇게 감싸는 걸 보아하니 그런 것 같은데 말이야. 그리고 본인이 한 짓거리를 숨기려는 것을 보니 부끄러운 건 아는 것 같은데.”

    “입을 조심해.”

    “정답이로군. 그날 이후로 계속 잘 지내는 건가? 그쪽의 쥐새끼같이 저지르던 일들을 전부 들킨 것 같은데.”

    정곡을 제대로 찌른 말에 드디어 헨리는 염원하던 얼굴을 제이스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제이스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약점이었다.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무결해 왔던 그에게 과거 제국이 벌인 잔혹한 학살극 사건 이후로 생긴 아킬레스건이었다.

    “이제야 진짜를 보여주는군.”

    헨리의 말뜻은 제이스가 여유로운 얼굴의 가면으로 가리고 있던 진짜 감정을 드러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들쑤셔놓으면 나도 내가 뭔 짓을 할지 모르는데.”

    “이미 인간 이하의 짓거리를 해놓고서는 더 나락으로 떨어질 일이 있나? 난 지금 당장이라도 내 부하를 죽인 네놈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는 거야.”

    헨리 역시도 기세에서 밀리지 않았다. 아니, 밀릴 이유 따위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너무 대놓고 적의를 드러낸 탓인지 그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샐리와 클로에에게까지 닿아버렸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요?‘

    샐리의 질문에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이 전부 뜨끔해 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지난번 칼부림을 하며 대놓고 싸운 두 사람과 피신하기는 했지만 제이스와 검을 맞댄 존재가 헨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던 클로에였다.

    “그, 그러게요. 제 시종이 무슨 무례라도 저지른 건가요?”

    시작은 클로에가 끊었지만 누가 봐도 당혹스러워하는 것이 더듬거리는 말투에서 드러났다. 그래서인지 순식간에 자리 잡은 고요한 적막이 세 사람의 숨통을 조여 오며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무례라고 해야 할지 조금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황을 대충 마무리하고 자리를 뜨려던 찰나에 제이스를 유심히 지켜보던 샐리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떠나려던 그를 붙잡았다.

    “시종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손에 굳은살이 상당한데. 무엇보다도 제 남편에게 무엇을 저질렀기에 마음에 안 든다는 소리까지 나온 건지 궁금하네요.”

    이대로 넘어가나 싶던 찰나에 갑작스럽게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샐리의 관심에 제이스는 적잖이 당황한 듯 말문이 턱 막혔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헨리 경께서 저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다고 하니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이겠지요.”

    “내가 묻는 건 그 잘못이란 게 뭐냐는 거예요.”

    “저기 샐리 제가 따끔하게 혼낼 테니까. 이만 넘어가 주세요.”

    그러나 한 번 꽂힌 일에 쉽게 화제가 전환될 리가 없는 샐리였다. 이미 그녀의 눈에는 이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자신을 평범한 시종이라고 소개한 제이스에게서 하나둘 느껴지는 위화감에 서서히 눈초리가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해줘요. 그게 아니라면 나 역시도 정석적인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어요.”

    이 말에 클로에는 안절부절못하며 제이스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그녀의 날카로운 직감에서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저희를 공작가의 저택으로 초대해주시지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클로에를 대신해서 제이스가 나섰다. 애초에 이런 자리에서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기왕 이렇게 된 거 시원하게 질러버린 것이었다.

    “좋아요.”

    제이스의 제안에 샐리가 동의하자 이번에는 헨리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오늘 밤 일찍 돌아오라는 샐리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던 그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임이 틀림없었다.

    “샐리, 저자를 정말 저택에 들일 생각이오.”

    “당신이 그렇게 걱정하는 걸 보니 더 궁금하네요. 아무리 봐도 평범한 시종은 절대 아닌 것 같았는데.”

    “그대가 위험해질 수도 있소.”

    “당신이 옆에 있는데도요?”

    “아마 저쪽도 동반자가 있으니 괜찮겠지만, 하여튼 저자는 위험한 자라는 것만 새겨두시오.”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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