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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84화 (84/111)
  • #84

    “하아, 기껏 쉬러 나왔는데 머리가 더 아프네.”

    실제로 머리를 짓누르는 두통에 제이스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클로에가 좋아하던 스테이크를 맛있게 굽기 위해 손을 멈추지 않았다.

    “음?”

    그런데 갑자기 주방 밖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제이스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쳐다봤다. 클로에가 나가고 닫혀있는 문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묵직하면서도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클로에일 리는 없었을 뿐더러 수상한 낌새가 다분히 느껴졌기에 제이스는 곧바로 허리춤에 착용한 두 자루의 검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의 날카로운 형체가 날아들어 왔다. 미묘한 살기를 벽 너머로 느낀 헨리가 먼저 선수를 쳐 검기를 날려 보낸 것으로 제법 강한 힘을 실었기에 웬만한 실력자도 나가떨어질 정도의 강도였다.

    그러나 제이스는 웬만한 실력자 수준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자신을 덮친 공격에 당황스러울 법도 한데 제이스의 얼굴에서는 당황한 기색 따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평온한 얼굴로 자신에게 날아든 황금빛의 검기를 받아친 뒤 뽀얀 연기 속에서 걸어 들어오는 그림자를 똑똑히 응시했다.

    “이거 수도 방위대 대장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너는 분명히 성녀를 모시는 시종이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시종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본인이 감지했던 살기에서 시작해서 날린 검기를 가볍게 받아친 뒤 여유가 보이는 저 얼굴이 그 증거였다.

    “성녀님께서 종종 이곳으로 피서를 오신답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문제 될 것이 있지. 최근 제국 내에서 불법 무기 밀매를 일삼은 세력이 있는데, 이곳이 그 주둔지로 추정되는 장소거든.”

    “그렇습니까.”

    “그냥 넘어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난 지금 자네뿐만 아니라 성녀까지도 이 일에 연루되어있다고 생각 중이니까.”

    헨리는 자신을 덮쳤던 괴한을 떠올리며 곧바로 눈앞에 보이는 수상한 시종의 정체를 단정 지었다. 확신에 가까운 그의 직감은 언제나 옳았으니 말이다.

    “내가 너무 안일했네. 여기까지 친히 발걸음하신 걸 보면 확신이 있었던 거였을 텐데 말이야.”

    제이스는 곧바로 어설픈 연기를 그만뒀다. 그리고 헨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곧바로 자세를 취한 뒤 진심으로 자신에게 달려들 상대를 맞이할 준비를 단단히 마쳤다.

    ***

    “이게 무슨 소리지?”

    아래층에서 들리는 연이은 굉음에 건물까지도 흔들릴 정도였다. 당연히 이러한 소란을 클로에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특히나 고막을 짜증스럽게 건드리는 날카로운 날붙이끼리 부딪치는 소리는 지금 벌어진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이거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요.”

    “내려가 봐야겠어.”

    “안 됩니다.”

    “비켜줘.”

    “절대 안 됩니다.”

    눈앞에서 자신의 앞을 막는 이가 평범한 하녀였다면 지금 저 굳건한 신뢰의 눈빛으로 떳떳하게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당황한 기색은커녕 하녀는 자신에게 걸리적거릴 여지가 있는 치마의 아랫단을 허벅지에 숨기고 있던 단검으로 찢어버렸다.

    “당신은 평범한 하녀가 아니었군요.”

    “정체를 숨겨서 죄송합니다.”

    충분히 머리가 혼란스러울 만한 상황임에도 클로에의 얼굴은 이전의 다급함이 사라진 뒤 오히려 평온해졌다. 그녀는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다양한 경우의 수를 정리했고, 그 결과 이 정체를 숨긴 하녀는 제이스의 밑에서 그의 일을 돕는 일원 중의 하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신은 제이스에 대해 알고 있군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안 사이죠?”

    “그것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이런 식으로 습격당할만한 일을 최근에 한 적이 있나요.”

    클로에의 질문에 하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있습니다.”

    하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 하나의 경우의 수. 아래에서 느껴지는 맹렬한 기세들에 그녀는 지금 서 있는 것도 용한 것이었다. 클로에의 경우야 성녀라는 특별한 존재이기에 오히려 이런 것에 둔감했지만, 그녀는 지금 오금이 저려와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빨리 피하시죠.”

    “아래에 제이스가 있는데 왜 피해야 한다는 거죠?”

    하녀가 제이스에게 가지고 있는 신뢰 그 이상으로 클로에는 제이스가 가지고 있는 실력에 대해 단 하나의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고요한 성에서 습격을 당한 것은 분명히 큰일이었다. 그것도 그녀처럼 성녀라는 중요한 존재로서 자리매김한 사람이라면 지금 사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이스라는 남자에 대한 믿음은 그가 침입한 누군가를 이곳으로까지 보낼 리가 없다고 굳건히 믿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믿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콰앙!

    굉음과 함께 바닥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자 그제야 클로에는 이곳에 침입한 괴한이 보통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나 형형하게 넘쳐흐르는 황금빛의 기운에서 클로에는 지금 제이스와 검을 맞대고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짐작되었다.

    “어서 도망쳐!”

    그 말에 클로에와 대치하고 있던 하녀는 곧바로 그녀를 들쳐메고 곧바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기다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아래 있는 사람 헨리 크리스토퍼 경이잖아. 그 사람이랑 내가 대화를 해봐야겠어.”

    클로에의 말에 하녀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이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수도 방위대의 대장의 역할을 맡고 있는 헨리 크리스토퍼였다.

    그의 존재가 클로에의 입에서 나온 이상 더는 물러날 수가 없었다.

    “제 입에서는 원하시는 대답을 들으실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이스 님께서 시키는 일만 할 뿐입니다.”

    “알겠어요.”

    클로에는 우선 제이스가 자신을 속이고 남몰래 벌이는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우선순위로 둬야 할 것은 다른 무엇보다 두 사람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었다.

    제이스는 본인이 마음에 둔 남자이기에 걱정되는 것이 당연했고, 헨리의 경우에는 그 역시 다른 의미로 걱정이 되었다. 헨리는 자신의 마음에 둔 샐리의 남편이었다. 이 두 사람이 부딪치는 일은 그녀가 생각했던 사건의 범주를 벗어난 일이었다.

    그렇기에 클로에는 자신이 지금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배후로 지목되는 것보다 두 사람이 최대한 다치지 않고 지금 벌어진 싸움이 끝나기를 기도하기로 마음먹었다.

    ***

    “말해라. 성녀도 이번 일에 가담한 것인가? 그렇다면 너희들은 2 황자 곁에 왜 붙어있는 거지?”

    “그걸 내가 말해줄 이유는 없는데.”

    “지금 말하면 편하게 눈을 감게 해주지.”

    자신감에 가득 찬 헨리의 말에 제이스는 성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로 크게 박장대소했다.

    “뭐가 웃기지?”

    “아니, 그냥 날 앞에 두고 그렇게 자신감에 차 있는 사람은 오랜만이라서.”

    제이스는 지금까지 자신이 쓰러트려 온 상대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자신감보다는 거의 오만에 가까울 정도로 본인의 실력에 집착하던 이들은 언제나 쉽게 꺾이기 마련이었다. 그때 그들이 지어 보이는 절망스러운 표정은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재밋거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는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저 자신감은 제이스도 인정할만한 근거가 충분한 말 그대로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그래서인지 제이스 역시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대라는 것을 인정하자마자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기대되는 걸.’

    드디어 자신과 수 싸움을 하며 칼을 맞댈 수 있는 상대를 찾은 것에 대한 기쁨. 과연 어떤 식으로 적을 몰아붙일 것인지에 대한 기대. 여러 가지 것들이 섞여 고양되는 감정은 예전에 가슴이 뜨거웠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랑 내기 하나 하는 거 어때.”

    “내기?”

    “그래, 난 이 상황을 좀 더 즐기고 싶거든.”

    상대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헨리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챈 상태였다. 그러나 기세에 눌리기는커녕 오히려 여유로운 얼굴로 황당한 제안을 입에 올리는 것이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

    “그래서 원하는 조건이 뭐지?”

    “넌 날 잡으러 온 거잖아. 그렇지?”

    “그래.”

    제이스는 헨리가 이미 자신의 정체에 대해 눈치를 챘다고 단정을 지어 말했고, 헨리는 그의 말에 곧바로 동의하며 반응했다. 최근 수도를 어지럽히는 주범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에 놀란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칫 더 위험한 상상을 보탠다면 성녀와 2 황자까지도 엮여있을 수 있었다.

    “먼저 말하자면 그 둘은 관계없어.”

    “연쇄 살인에 무기 밀수 및 밀매까지 한 범죄자의 말을 믿으란 거냐.”

    “믿는 게 좋아. 네 아내를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다면.”

    “허, 내 아내가 위험에 빠진다고?”

    제이스의 도발에 분노라는 감정이 순식간에 헨리의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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