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78화 (78/111)
  • #78

    “페드? 언제 온 거야?”

    “방금 수도에 도착해서 바로 오는 길이야.”

    제법 긴 시간 동안의 여정에 지쳤을 만도 한데 페드로는 쉬지 않고 곧바로 자신이 알아낸 충격적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곧바로 스테판 저택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샐리 역시 제법 비장한 표정의 페드로를 보고 그가 가지고 온 정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바로 눈치채고 곧바로 주변을 물렸다.

    “일단 그 여자의 행방을 겨우 찾긴 찾았어.”

    “정말? 어떻게?”

    “운이 좋게도 1 황자 쪽을 감시하기 위해 붙여둔 애한테서 연락이 왔거든.”

    이 부분은 샐리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페드로는 샐리가 작위를 이은 시점에서 최대한 자신의 정보원을 활용해 그녀에게 가장 위협이 될 인물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페드로는 1 황자가 개인 소유의 영지를 제국의 한 지방에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그 영지로 정보원 하나를 파견했는데 거기서 성과가 나온 것이었다.

    “1 황자의 영지에서 봤다고? 그 여자를?”

    “그 여자를 도운 세력과 연관이 있다는 거지. 그런데 문제는 도착하자마자 그 여자는 영지의 기사들에게 끌려갔다고 했어.”

    “그 가방 안에 든 건 뭔지 모르겠지?”

    “처음 기사들이 끌고 가려고 하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발생했고, 가방이 터지면서 지폐가 쏟아졌다는 보고를 받았어.”

    그 말을 듣자마자 샐리는 스테판 전 공작이 벌인 사기극으로 인한 피해자들의 돈의 행방이 그의 정부였던 여자의 손에 들어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어떻게 안 것인지 1 황자 역시 돈의 행방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모종의 이유로 그 돈을 빼앗기 위해 여자를 도왔던 것이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좋은 성과인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 광경을 보기 전까지는.”

    페드로는 우연히 발견한 충격적인 사실에 대해 그가 본 전부를 샐리에게 보고했다. 페드로가 그날 항구에서 본 것은 늦은 밤 마치 밀항해 온 배로 추정되는 곳에서 끌려 내려오는 노예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목에는 목줄 같은 것이 채워져 있었고, 덩치 큰 남자들이 그들을 끌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밤에도 항구를 관리하는 관리인들은 이미 돈이라도 먹은 것인지 그들을 보고도 모른 척하며 그냥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 말 정말 사실이야?”

    “응, 분명히 노예장사를 하는 놈들이었어. 그리고 그 녀석들은 여러 대의 마차를 사용해 노예들을 조금씩 이곳 수도로 올려보내더라고.”

    끈질기게 그들의 뒤를 쫓은 페드로는 어떻게든 들키지 않고 어딘가로 향하는 마차의 뒤를 쫓았고, 그 마차가 멈춘 곳은 바로 수도의 카지노였다. 가장 큰 카지노로 귀족들도 이용한다는 그 유명한 카지노의 뒷문으로 마차를 타고 온 노예들이 들어가는 모습까지 확인한 뒤에 스테판 저택으로 바로 온 것이었다.

    “이상하지 않아? 저 노예들을 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커다란 배를 통해 제국으로 들어오고, 항구의 관리들조차 포섭하면서 수도의 한 가운데의 카지노에서 대놓고 노예장사를 한다? 과연 그 노예를 사는 이들은 누구고 그 사람들의 수요를 맞출만한 스케일을 다룰 수 있는 인물이 누구일까. 난 이거 꽤나 큼지막한 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확실히 일목요연한 설명을 듣고 나니 이 문제는 그 배후를 밝혀봐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샐리는 나중에 돌아올 헨리와 빨리 이 문제를 논의하고 싶어졌다.

    ***

    헨리는 아직도 주안의 죽음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름이 적혀있는 묘비를 보고도 차갑게 식어버려 그의 거뭇거뭇한 피부에 남아있는 눈물 자국이 더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앞으로도 전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게는 슬픔에 잠겨 제자리에 머물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미안하다.”

    함께 지낸 세월의 깊이만큼 슬픔을 짊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였다.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묻어나는 촉촉함은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날벼락과도 같은 비보에 사무치는 감정을 토해내지도 못하는 현실이 오늘따라 가혹하게 다가왔다.

    “알고 있으니 이만 나와라.”

    그렇기에 헨리는 자신의 뒤를 몰래 밟아온 이 존재를 결코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기척을 완벽하게 지우지도 않은 것을 보아하니 일부러 신경을 건드리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헨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무 뒤에서 나온 검은 그림자는 정체를 숨기기 위한 검은 복면을 쓴 괴한이었다. 그것도 양손에 날카로운 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목적은 따로 물어볼 필요가 없어 보였다.

    웬만하면 지금 이 장소를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으나 살기가 가득한 괴한의 눈을 보아하니 장소를 옮길 여유 따위는 없어 보였다.

    “헨리 크리스토퍼가 맞나?”

    “그래.”

    “거기 묻혀있는 게 네놈의 부하였던 이도 맞겠지?”

    그 말에 딱히 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았던 헨리의 황금빛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입에 내 친구를 담지 마라.”

    큰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사자후와도 같은 아우라가 느껴지는 경고였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오금이 저려 반항할 생각조차도 못 하는 기세임에도 괴한은 오히려 우습다는 듯 헨리에게 나지막하게 들릴 정도의 소리로 그의 말을 비웃었다.

    들릴 듯 말 듯한 크기의 웃음소리는 오히려 헨리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싫다면? 원래 싸움에서 진 개는 말이 없는 법이야. 그런 패배자를 농락하는 것은 승자의 권리지.”

    아예 작정을 한 듯한 도발적인 멘트였다.

    “그러고 보니 거기에 묻혀있는 놈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겠군.”

    복면에 가려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비릿한 미소가 눈에 선히 보이는 듯했다. 그렇기에 헨리는 더 이상 참아줄 수가 없었다.

    카앙.

    검과 검이 부딪히며 울려 퍼지는 청량한 소리와 함께 헨리가 휘두른 검을 맞받아친 괴한의 몸이 잠시 공중에 떴다 내려오면서 뒤로 밀려났다. 실로 어마무시한 힘의 차이를 경험하자마자 괴한의 복면 안의 여유롭던 얼굴이 어느새 딱딱하게 굳었다.

    “하하, 확실히 소문이 과장된 것은 아니었군.”

    어색한 웃음.

    검을 맞대기 전에 보였던 여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모습에서 괴한의 심리상태가 드러나고 있었다. 단 한 번 검을 맞대봤을 뿐이지만, 아무리 실력이 없는 멍청이라도 수준 차이를 절실히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묵직함과 강도가 다른 날카로움이 서려 있는 경지를 헨리가 보여준 것이었다.

    “너 누구야.”

    갑작스럽게 날아든 질문에 괴한은 당황스러운 듯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정체를 물어보면 본인이 순순히 밝힐 거라는 멍청한 생각이라도 한 것이냐는 듯한 어이없는 눈빛으로 헨리를 쳐다봤다.

    “내 질문의 의도는 무엇 때문에 이야기를 지어내며 내 앞에 섰느냐는 말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확실히 머리가 나쁜 모양이군. 정말 그런 어설픈 솜씨에 내가 속아 넘어갈 거라 생각했나?”

    가까이서 봐온 만큼 주안의 실력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헨리였다. 그리고 주안의 실력을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사람으로서 헨리는 지금 눈앞에 맞닥뜨린 괴한의 실력으로는 주안을 그렇게 깔끔하게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아봤다.

    야닉조차도 분노와 슬픔 속에서조차 감탄했던 실력. 지금 눈앞의 괴한은 단순한 사칭범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헨리는 속이 분노로 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말 그대로 주안에게 모욕과도 마찬가지인 행위였으니 말이다.

    “난 널 정말 용서할 생각이 없어. 원래라면 널 끌고 가 고문했겠지만, 그냥 여기서 죽여야겠다.”

    전쟁터에서 헨리를 마주한 적들이 공포에 질리는 이유였다. 그는 심기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말 그대로 자비가 없었다. 오히려 가혹할 정도로 잔인하게 상대의 손속 따위 봐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단순히 이런 난폭한 모습을 샐리에게 보여주지 않을 뿐이었다.

    “크윽.”

    이리를 연상케 하는 맹수의 눈빛. 바로 앞에 들이닥친 검과 함께 가까이서 보니 소름이 절로 돋을 정도의 맹렬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괴한은 이런 감상에 잠겨있을 여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윽고 맹렬하게 달려들며 자신의 목을 떨어뜨리려는 날카로운 칼날을 피하고 쳐내며 뒷걸음질 치기에도 벅찼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서서히 괴한의 몸에 상처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거친 호흡과 함께 피와 땀에 젖어가며 무거워지는 몸을 겨우 이끌며 받아쳐 봤지만, 헨리는 순식간에 괴한의 팔다리에 치명상을 입히며 제압을 완료했다.

    “커헉!”

    바닥에 널브러진 괴한의 가슴팍을 발로 밟으며 헨리는 괴한의 복면을 벗겼다.

    “배후를 말할 생각이 있나?”

    “하아, 하아. 역시 명성은 틀리지 않았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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