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조금은 해진 옷을 입더라도, 으리으리한 왕궁이 없더라도 행복했다. 클로에는 그때 그 암울하던 시절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홀가분해진 몸과 마음으로 지금과 같은 시간이 앞으로도 계속됐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하나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하게 되었다.
“오래 걸었더니 피곤하다.”
“그래? 그럼 침대는 클로에 네가 써. 난 소파에서 잘 테니까.”
그렇게 말한 제이스는 그대로 소파에 가서 누웠다.
“정말 거기서 자게?”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졌다고 방심하지 마. 스승이 했던 말, 잊었어? 남자는 다 늑대라고.”
“지금 자기보고 늑대라고 하는 거야?”
약간의 농담조가 섞인 말에 클로에는 재미있다는 듯이 쿡쿡 웃었다.
“그거보다도 더한 짐승이 될 수도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그러니까 난 소파에서 잘게. 지금도 많이 참아주는 거니까 그만 자라.”
본인이 말하고도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온 것인지 제이스는 그대로 소파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얼굴을 숨겼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피곤하다고 말하던 클로에는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것인지 제이스에게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남자다운 척하는 제이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고 싶다는 생각에 클로에는 그의 귓가에 조심스럽게 입을 갖다 대며 놀래줄 준비를 마쳤다.
“그 정도 인기척도 못 느낄 줄 알았어?”
그러나 이미 클로에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챈 제이스는 그런 장난은 자신에게 통하지 않는다며 그저 경고의 말을 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고개를 돌리다가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이 스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난 분명히 경고했어.”
제이스가 클로에의 손목을 잡아채 그녀를 소파로 눕힌 뒤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거칠게 덮치는 제이스의 손길에 클로에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저항할 생각조차 없었다.
이것은 그녀도 원하는 일이었다.
그를 만난 이후로 세상이 달라 보였다. 삶이라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보는 풍경이라도 언제나 새롭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마음은 제이스에 대한 호감으로 귀결되었다.
언제나 그가 시선에 들어오면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하며 떨려왔고, 이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녀는 더 이상 그런 고민에 시달릴 필요가 없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뿐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넌 뭐지?”
“전 이 마을의 촌장 되는 사람입니다. 보아하니 여행객은 아니신 것 같은데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자신을 촌장이라고 소개한 노인은 보통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독기와 살기가 가득한 눈을 가진 덩치 큰 사내의 앞에서도 목소리를 내며 정체를 물었다. 그러나 남자의 범상치 않은 기운에 연로한 노인의 다리가 후들거리는 부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나는 제국의 장군 단테다. 이 마을에 있는 반동분자들을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오면 나머지 목숨은 살려주지. 하지만 끝까지 버티겠다면 미리 말하지만 지금 이 정도로도 많은 자비를 베푼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군.”
단테는 본인의 손에 들려있는 날카로운 도끼날을 촌장의 목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여기서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답변이 나온다면 날카로운 도끼는 촌장의 목을 땅에 떨어뜨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촌장님, 무슨 일이세요? 거기 있는 사람들은 누구고요.”
“아메, 물러서거라.”
최근 병환이 점점 깊어지는 연로한 아버지 때문에 매일 마음을 졸이며 살고 있는 촌장의 딸인 아메는 갑자기 집안에서 사라진 아버지를 찾다가 한적한 마을의 입구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웬 낯선 장정들이 서 있었고, 그중 하나가 날카로운 도끼를 자신의 아버지의 목에 갖다 대고 있으니 딸의 처지에서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촌장은 곧바로 자신에게로 달려오려던 딸 아메의 발걸음을 그 자리에 멈춰 세우기 위해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어이, 난 참을성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어.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반동분자들을 끌고 오던가.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네놈과 네 딸부터 죽여주지.”
“죄송하지만, 이 마을은 제국의 영토가 아닙니다.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평범한 장소이고, 장군께서 말씀하시는 그 반동분자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으니 그 명령에는 따를 수 없습니다.”
촌장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촤악.
그리고 촌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며 공중에 피가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단테를 필두로 한 학살극은 그 광경을 보며 비명을 지르는 아메의 목마저 베어버리는 것으로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
“다들 놀라겠지?”
“정해진 기간에 여행 갔다 온 건데 사람들이 놀랄 게 뭐가 있어.”
“꼭 그렇게 꼬투리를 잡아야겠어? 우리 기념품도 많이 샀잖아.”
“하긴, 그래도 놀라는 것보다는 좋아한다고 하는 게 난 더 맞다고 생각해.”
“알았어. 그런데 이제 막 저녁이 된 건데 마을이 왜 이렇게 어둡지?”
지금쯤이라면 모든 집이 한창 저녁 준비를 하며 창밖으로 불빛이 빠져나와 있어야 했다. 그런데 마을에서는 불빛이라고는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몸이 으스스 떨릴 정도의 음산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여기 있어.”
“어?”
“뭔가 이상하니까 여기 숨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서는 안 됐다.
제이스는 바람을 타고 와 코끝을 기분 나쁘게 찌르는 비릿한 향에 단번에 마을에 안 좋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딱 봐도 수상한 마을 상태에 비릿한 피 냄새까지 불안감을 점점 고조시켰다. 제이스는 클로에에게 절대 마을 근처에도 얼씬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기고 다급하게 달려갔다.
‘제발, 제발 아니기를.’
바람을 가르며 미친 듯이 달리는 제이스는 속으로 제발 별일이 없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몇 번이고 외쳤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스승을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제이스였다. 그렇기에 마을에 변고가 생겼다는 현실은 그가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결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극의 전조는 이미 현실로 다가온 뒤였다.
“촌장님?”
이미 싸늘하게 식어 굳어있는 시체를 본 제이스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이미 굳어있는 시체를 끌어안은 제이스는 그녀의 배를 관통한 상처와 바닥을 적신 핏자국을 유심히 살폈다. 그 와중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메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이었다. 그것을 통해 제이스는 아메가 도망치기 위해 무의식중에 뒷걸음질을 쳤으나 순식간에 덮쳐온 괴한에게 당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분명 보통 실력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머리를 굴려봤으나 이런 외진 마을을 덮칠만한 세력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마을의 바닥, 건물 할 것 없이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으며 그 근방은 전부 피로 물들어있었다.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든 참혹한 광경에 제이스는 클로에의 몸을 숨겨둔 뒤에 혼자 와보기를 잘했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제이스가 곧바로 뛰어간 곳은 바로 자신의 스승인 알렉산더가 운영하는 학교였다.
“스승?”
중죄를 지은 죄인의 최후를 과시하기 위한 작업. 학교에 도착한 제이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축 늘어진 채로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고 있는 알렉산더였다. 처음 스승의 참혹한 몰골을 본 제이스는 순간 이것이 현실이 맞는 것인지 헷갈린 나머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상상도 못 했던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애초에 알렉산더가 멀쩡했다면 마을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알렉산더에 대한 제이스의 믿음은 굳건했다. 신비로운 존재이자 자신에게 삶의 의미를 새겨준 은인의 처참한 몰골은 영원히 굳건하게 자신의 곁을 지켜줄 것이라던 믿음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이었다.
“이게 뭐야….”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겨우 움직여 한 마디를 내뱉었다. 스승인 알렉산더는 물론이고 언제나 해맑게 공부하는 것을 즐거워하던 마을의 아이들이 알렉산더가 걸려있는 십자가 밑에 시체로 쌓여있었다.
이 모든 잔인한 광경이 현실이라는 것을 겨우 인지하고 나서야 제이스의 마음에는 분노라는 감정에서 시작된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불꽃이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형! 제이스 형!”
당장 허리춤에 찬 칼을 꺼내 뭐라도 베어버리고 싶은 심정은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눈물이 섞인 목소리에 겨우 가라앉았다. 그리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제이스의 눈에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콘이 들어왔다.
“너 어디 있었어.”
“혀엉! 나, 나 너무 무서워.”
“진정해, 콘. 형이 왔으니까 이제 다 괜찮아.”
“흐어어엉.”
도대체 어디에 숨었기에 이런 참극에서 살아남은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다른 것보다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제이스는 자신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우는 콘을 먼저 달래야겠다는 생각에 아이의 작은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