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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72화 (72/111)
  • #72

    언제나 좁은 왕궁 밖을 벗어나 자유롭게 세상을 누비는 즐거운 상상은 그녀의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간이었다.

    “왜 웃어?”

    “아니, 그냥. 좋게 변하는 게 보기 좋아서.”

    “네가 곁에 있어 줘서 그래.”

    때마침 부는 바람에 살랑이는 금발. 태양 빛을 받아 평소보다도 더 화사해 보이는 미소에 클로에를 바라보는 제이스의 얼굴이 일순간 붉게 타올랐다. 처음 그녀를 발견했을 때부터 시작된 전조가 드디어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괜찮아? 얼굴이 빨간데.”

    치유력을 보여준 이후로 클로에는 주변 사람들의 몸 상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평소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제이스의 이마에 자신의 손을 갖다 대며 체온을 체크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순수한 마음에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살핀 것인데, 그의 얼굴이 붉어진 것이 몸이 안 좋아서가 아닌 다른 이유라는 것을 의식하게 된 순간 클로에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아파서 그런 거 아니야.”

    “아, 그런 것 같네. 하하….”

    어색한 웃음이 좋았던 분위기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클로에 역시 제이스에게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묘하게 가벼운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어설프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오히려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위해 일부러 말투를 조금 가볍게 하고 썰렁한 농담을 던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특히나 사소한 꼬투리를 잡으며 티격태격한 사이를 유도하며 자연스럽게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눈치챘어도 지금은 비밀로 해줘. 나도 아직은 마음에 준비가 끝난 게 아니라 나중에 때가 되면 알아서 고백할 거야.”

    갑작스러운 고백 선언에 클로에는 발걸음까지 꼬여버렸다.

    그보다도 준비가 아직 안 끝났다니. 무슨 일이 됐던 다른 이들보다 한 발 더 빠른 판단으로 움직이는 제이스의 입에서 나온 머뭇거림이었기에 굉장히 어색하게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을게.”

    “어?”

    먼저 부끄럽게 만들어놓고 그에 대응해주니 오히려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간지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두 사람은 방금 말한 대로 이전처럼 서로를 친한 친구처럼 대했다. 이런 식의 행복과 평화가 지속되기를 클로에는 속으로 기도하며 남은 짐을 챙기기 위해 오두막으로 향했지만, 그녀가 바라는 그 행복은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환상이었다.

    ***

    “그래서 그 마을이 어디라고?”

    “테리노 숲을 한참 지나다 보면 나타나는 마을입니다. 숲 자체가 워낙 크고 복잡하다 보니 찾기가 힘들지만, 산짐승에게 공격당하고 나서 절 구해준 사냥꾼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국의 사상에 반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냐.”

    “예, 확실합니다. 워낙 외진 마을에다가 외지인의 방문도 거의 없다시피 한 곳이라 그런지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가 단 한 곳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저희 제국의 사상에 완전히 반하는 교육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입에 올리겠냐는 확신에 찬 부하의 눈빛에 제국의 장군 중 하나인 단테가 살기가 가득한 눈빛을 번뜩였다.

    “제국의 근방이라고 손을 놓고 있었더니 이것들이 정신을 놓았나 보군.”

    단테는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의 시체를 험하게 짓밟으며 이를 갈았다. 현 제국을 지배한다고 할 수 있는 황제가 항상 입에 올리는 전 대륙의 통일. 단테는 그 사상에 감화된 인물 중 하나로 그것에 반하는 인물을 결단코 용서치 않는 과격한 인물이었다.

    최근 대륙 통일을 최우선 목표로 지정하며 주변 마을이나 작은 국가를 침공하고 짓밟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단테는 그러한 일의 일선에서 활동하는 인물로 지금도 제국의 사상에 반하는 한 마을에서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든 학살극을 벌이고 난 뒤였다.

    “벌레 같은 놈들이 우리 제국의 근처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줄 몰랐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내가 나섰어야 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이제라도 제국의 명성에 걸맞은 분께서 황제가 되셔서 다행입니다.”

    “쯧, 아무리 그래도 입을 조심하도록 해라. 그러다 언제 목이 날아가게 될 줄 모를 일이니.”

    “네, 알겠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에 주의할만한 사항은 없었나.”

    “그 선생이라는 사람이 조금 범상치 않아 보이기는 했습니다.”

    병사는 그날 마을에서 신묘한 움직임의 검술을 가르치던 선생의 모습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부드러우면서도 유연한 움직임에 분명히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음에도 눈으로 좇아가기 힘든 검의 움직임까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나열했다.

    “그래봤자 촌구석의 뜨내기 검사에 불과하겠지. 게다가 그런 외진 마을일수록 외부의 침입에 취약할 수밖에 없어.”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솔직히 말하면 병사는 그날 봤던 그 선생이라는 인물의 검술에 대해 여전히 노심초사한 마음이 있었다. 몇 번을 머릿속으로 되짚어 봐도 일반적인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움직임인지 의심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이런 말을 더 늘어놓는다면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는 도끼의 또 다른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기에 병사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

    “그래서 아저씨는 정말 불사신인 거야?”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렇다고 볼 수 있는 건 뭐야.”

    어딘지 모르게 의뭉스러운 구석을 남기는 답변에 클로에는 볼을 부풀리며 자신의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어느덧 여행을 떠난 지 약 한 달이라는 기간이 흘렀기에 두 사람의 사이도 가까울 만큼 가까워졌다.

    이제는 두 사람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만 나오지 않을 뿐, 이미 수년을 함께한 부부와도 같은 사이처럼 보이는 두 사람에게 여관 주인도 호탕하게 웃으며 무슨 각방을 쓰냐며 방을 하나만 잡아줬다.

    들어올 돈까지 포기할 정도의 호탕함에 두 사람은 당황스러웠지만, 잠만 따로 잘 뿐 늦은 밤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기에 딱히 상관은 없다는 뉘앙스로 제이스는 여관 주인이 건네는 방 열쇠를 받았다.

    그리고 지금 제이스는 자신의 스승인 알렉산더에 대한 클로에의 호기심을 해결해주기 위해 그녀가 던지는 질문에 답변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런데 조금 특이한 부분이 있는 것뿐이지.”

    “특이한 부분?”

    “타인의 손에 의해서만 죽을 수 있다는 거야. 시간이 지나면 평범한 인간이라면 보통 늙어 죽잖아. 그런데 스승은 그런 게 아니라더라고. 스스로 죽어보려고 시도도 해봤는데 안 됐대.”

    제법 심각한 이야기에 클로에는 입을 떡 벌리며 놀라워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 비밀을 알고 있던 제이스는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듯 심드렁한 태도로 설명했다.

    “참고로 스승의 나이는 나도 몰라. 본인도 세다가 까먹어서 이제는 자기도 모르겠다고 하더라.”

    “신기하다.”

    본인의 나이도 모를 정도로 오래 살아온 사람이라니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클로에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냥 어느 날 우연히 만났지.”

    “그렇게 말하는 건 치사하다고 생각해. 나는 내 이야기 숨기지 않고 다 해줬는데.”

    이 부분에서는 충분히 서운함을 느낄 클로에였다. 본인은 과거사를 여과 없이 모두 다 털어놓았다. 수많은 왕족 사이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자그마한 궁에 버려진 안타까운 처지를 전부 다 말해줬다.

    그렇기에 여기서 제이스는 애매하게 둘러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이거 듣고 나 싫어할 수도 있는데.”

    “그럴 일 없어.”

    “음, 스승을 처음 만나게 된 건 우리 집에서야. 뭐 다른 집이랑 차이가 있다면 우리 아버지가 살인마였다는 점?”

    그 뒤로 덤덤하게 아내에게 바람맞고 여성 혐오증이 생겨 연쇄 살인마라는 괴물로 변해버린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제이스를 클로에 역시 덤덤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야기하기를 꺼린다고 해서 그가 이런 끔찍한 과거에 얽매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그렇기에 클로에는 지금 필요한 건 동정이나 경악스러워하는 과장된 표현이 아닌 그저 묵묵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그냥 너무 참기가 힘들었어. 피 냄새에 익숙해지고 사람이 끔찍하게 죽어가는 게 당연시되는 일상이 뭐랄까 징그럽게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어찌 됐든 한 번은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아버지를 죽였더라고.”

    숲속의 오두막에서 지내는 것이 살인마답다고 해야 할지. 어떻게 보면 그것이 제이스가 자신의 스승인 알렉산더를 만날 수 있었던 계기였다.

    방랑자 신세로 이곳저곳을 떠돌던 알렉산더에게는 쉴 곳이 필요했고, 때마침 제이스가 사는 오두막을 발견했던 것이었다. 그 뒤로 제이스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알렉산더는 그를 마을에 맡겨두려고 했으나 제이스는 거부했다.

    그리고 끈질기게 달라붙은 끝에 제이스는 알렉산더의 검술 제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함께 방랑자 생활하며 정처 없이 여기저기를 떠돌며 지냈었다.

    “하아, 이래서 얘기하기 싫다고 한 거야. 괜히 분위기만 무거워지고.”

    “나도 그렇고 제이스 너도 그렇고 참 힘들게 살았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웃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이미 많이 웃고 있어.”

    제이스와 함께 하면서 클로에는 세상이 참 넓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니 여행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클로에의 삶은 제이스를 만나기 이전과 확연하게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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