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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71화 (71/111)
  • #71

    지금 상황은 그리 여유가 넘쳐흐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알렉산더는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인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 탓에 주저앉은 자세에서 일어날 수가 없는 클로에는 우물쭈물하며 두 사람의 눈치만 살 뿐이었다.

    “꺄악!”

    남자의 품에 안겨본 것이 처음인 클로에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이건 따로 정산해줘야 할 것 같은데.”

    “내려주세요.”

    “싫어. 어차피 너 걷지도 못하잖아. 스승이 말했듯이 여기서 시간 더 허비해봤자 좋은 것도 없으니 부끄럽더라도 참아.”

    “부끄러워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뭔데.”

    “아니요, 그냥 부끄러워서 그런 거라고 할게요.”

    이렇게까지 폐를 끼치는 게 미안하다고 말하려던 클로에는 괜히 분위기를 처지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에 입안에 머물던 말을 그냥 집어삼켰다.

    “도와주는 사람한테는 미안하다는 말보다 고맙다는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나도 보람도 느끼고 기분도 좋지.”

    “아, 그러게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금방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눈물이 이 남자의 품에 안기자 금방 잦아들었다. 그의 말대로 이런 친절을 받았으면 울상으로 징징대는 것보다는 활기찬 모습으로 감사를 표하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에 공감이 됐다.

    “아, 참고로 내가 키가 커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데 아직 스물도 안 된 창창한 나이야. 너도 나랑 비슷한 나이 같아 보이는데 말 편하게 해.”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널 이렇게 안아준 것에 대한 보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참고로 내 이름은 제이스야. 딱히 특별한 성은 없으니까 그냥 이대로 부르면 돼.”

    “응, 알았어. 다시 한 번 고맙다고 말할게.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이름도 불러줘야지. 불러달라고 알려준 건데.”

    “제, 제이스!”

    약간 제멋대로인 느낌이 있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편안한 느낌에 클로에는 힘차게 그의 이름을 외쳤다.

    “하하, 뭐가 그렇게 전투적이야.”

    강력한 의지라도 담은 듯 전투적으로 외쳐진 자신의 이름에 제이스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덕분에 편안해진 분위기에 클로에는 그에게 안겨있는 것이 처음보다는 조금은 덜 어색해졌다.

    ***

    “누나! 클로에 누나!”

    마을의 개구쟁이로 유명한 콘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클로에를 애타게 찾았다.

    “무슨 일이니?”

    “큰일났어, 누나.”

    “무슨 일인데 그래. 자, 울지 말고 누나한테 천천히 얘기해봐.”

    클로에는 오두막에서 손수건을 가져다주며 울며불며 난리를 피우는 콘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콘은 정말로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클로에가 건네준 손수건을 외면하며 그녀의 팔목을 잡아당기며 악을 썼다.

    “빨리 가야 해. 빨리!”

    개구쟁이로 소문이 난 아이인 만큼 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일은 심한 장난을 치다 부모님에게 걸려 호되게 혼날 때였다. 그 이외에는 언제나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를 띤 채로 마을 전체를 휘젓고 다녔다.

    처음 봤을 때 참으로 아담하면서도 조용한 마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콘이라는 단 한 아이에 의해 시끌벅적해질 때가 많았다.

    그 정도로 간도 크고 눈물과는 거리가 먼 아이가 이렇게 다급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평소 보이지 않던 행동을 하니 클로에도 그가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아저씨가 울타리를 넘지 말라고 했었잖아.”

    “그게, 한 번 만져보고 싶어서 그만….”

    콘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넓은 들판의 목장으로 그 안에 한 소녀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보아하니 콘의 호기심에 동참했다가 목장 안의 말에게 호되게 당한 것이 확실했다.

    “도와줘, 누나.”

    본인의 잘못으로 친구가 이렇게 다쳤다는 것은 아는 것인지 콘은 무릎을 꿇은 채 클로에에게 싹싹 빌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애초에 클로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상태인 소녀를 구할 생각이었다.

    “누나한테서 떨어져 있어.”

    “응.”

    호흡을 가다듬은 클로에는 두 손을 쓰러진 아이에게로 뻗은 뒤 눈을 감고 집중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백색의 빛이 발현되기 시작하더니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상태의 아이는 그대로 편안한 얼굴로 곤히 잠들었다.

    “괜찮아진 거야?”

    “응. 상처가 심해서 자연스럽게 잠든 거뿐이니까 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다.”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닦아내기 위해 눈을 비비던 콘은 그제야 안심이 됐다는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간이 큰 개구쟁이라고 하더라도 눈물범벅이 되어 엉망인 얼굴을 보니 확실히 여타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누나, 나도 안아주면 안 돼?”

    “미안한데 누나도 힘이 없어서 그건 힘들 것 같아. 우리 콘은 씩씩하니까 혼자 걸을 수 있지?”

    “그치만,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간단 말이야.”

    역시 쉽게 일이 끝날 리가 없었다. 단순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축축하게 젖은 바지는 콘이 얼마나 긴장했었는지 심리상태를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사색이 되어 땀에 잔뜩 젖은 채로 뛰어온 모습을 봐서는 지금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어쩌지….’

    이 상황을 해결할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한 명씩 따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아이의 상태가 정상인 아닌 지금은 불가능했기에 클로에는 고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을 사용하고 난 뒤에는 몸 전체가 피로해졌기에 클로에의 지금 상태도 그리 좋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우와! 깜짝아.”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참으로 신기했다. 마을에 지내면서 무언가 힘든 일이 발생하면 도대체 어떻게 안 것인지 제이스가 어김없이 등장하여 클로에를 도왔다. 특히나 지금처럼 극적인 상황에서 그에 대한 놀라움과 고마움은 평소보다도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콘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내가 봐줄 일이 있었어.”

    “그 힘을 사용한 거야?”

    “응.”

    “몸은 괜찮고?”

    “약간 몸이 무거운 느낌이긴 한데, 이전처럼 아프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아. 아무래도 몸도 이제 적응했나 봐.”

    처음 마을에 왔을 때 클로에는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제이스와 알렉산더가 머무는 마을은 작은 시골 마을로 외부에서의 왕래도 거의 없고 말 그대로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신분도 모를 자신을 경계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을로 들어설 당시 클로에는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경계하는 것 없이 오히려 자신을 환영해줬고, 겁먹지 말고 먼저 부딪히라는 제이스의 조언에 따라 다가오는 사람들을 피하지 않았다. 그 결과 클로에는 마을에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가 있었다.

    “꼬맹이 너도 사고 좀 그만 쳐라. 언제까지고 봐줄 수도 없는 노릇이란 거 알지?”

    “응. 미안해, 누나.”

    “다음부터는 조심해.”

    “알았어.”

    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는 놀라운 치유력.

    잊히고 버려진 왕녀라는 별명에 맞지 않는 특별한 능력은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발현된 특별한 힘이었다. 처음에는 창문으로 날아든 작은 새를 치료해준 것에서 시작된 것으로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던 클로에는 그 뒤로 단 한 번도 왕궁에서 힘을 쓴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마을에 지내면서 클로에는 언제나 마을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은 낡은 헛간이 무너지며 헛간 주인의 다리가 건물 잔해에 깔려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클로에는 자신의 힘을 사용했고,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클로에를 바라보다가 이내 자기들끼리 쑥덕이더니 예전처럼 평범하게 클로에를 대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사용하네.”

    “마을 사람들 덕분이지, 뭐.”

    그 뒤로도 마을 사람들은 클로에에게 치유력에 대해 질문을 하거나 혹은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일조차 없었다.

    “아저씨는?”

    “스승? 오늘은 보충수업이 있다던데. 그러고 보니 준비는 다 했어?”

    “아직 더 해야 해.”

    두 사람은 마을 밖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것은 제이스의 소원에서 시작된 계획이었다. 애초에 마을을 떠나 홀로 수련 여행이라는 테마로 이곳저곳을 떠돌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던 제이스였다.

    다만, 스승인 알렉산더의 경우 이곳에 학교를 차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제이스의 여행에 동행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나랑 같이 여행 가자.]

    [여행?]

    [응, 혼자 가기 심심하거든. 그러니까 같이 가자.]

    갑작스러운 제안에 클로에는 당황했지만, 감옥과도 같이 느껴지던 왕궁 안에 갇혀 살아가던 그녀에게는 제법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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