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70화 (70/111)
  • #70

    “빠르네, 확실히 실력이 좋은걸?”

    가까스로 피하여 목숨을 건진 주안과는 달리 제이스는 복면 아래로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재밌다는 듯이 주안의 실력을 평가했다.

    “그런데 아쉽네.”

    그렇게 말한 제이스는 원래라면 검이 들려있어야 할 왼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주안은 자신의 뒤에서 들려온 나지막한 신음에 다급하게 뒤를 돌아봤고, 주안의 눈에는 심장에 제대로 꽂힌 칼을 부여잡고 힘없이 쓰러져가는 발론이 들어왔다.

    “교수님!”

    등 뒤에 적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주안의 눈빛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장 발론에게로 달려가고자 했지만, 그 순간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주안은 제대로 자세를 잡지도 못한 채로 제이스의 공격에 대응했다.

    “너, 너는.”

    안타깝게도 주안은 순식간에 자신의 품으로 들어오는 날카로운 검을 쳐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주안은 검으로 의해 관통된 몸에서 올라오는 통증조차도 잊어버릴 정도의 충격적인 사실에 서서히 죽어가야 할 그의 눈동자에 생기가 감돌며 오히려 커졌다.

    “이런, 얼굴이 드러난 건 이번이 처음인걸.”

    “넌 성녀를 모시는 시종이 아닌가. 어째서 그런 자가 이런 추악한 짓거리를 하는 것이냐. 성녀의 이름을 가지고 부끄럽지도 않나.”

    “그 녀석은 내가 이러는 거 몰라.”

    클로에의 존재가 언급되자 이전까지 여유를 부리던 분위기가 몰라볼 정도로 싸늘하게 식었다.

    “이런 일을 저지르는 이유가 뭐냐.”

    “그걸 내가 말해줄 이유는 없을 텐데?”

    “어차피 죽을 사람한테도 해당되는 말인 건가.”

    어차피 죽어서 말도 못 할 테니 그냥 말해 달라는 일종의 패기였다.

    “뭐, 사적인 원한이라고 해둘게.”

    “사적인 원한? 교수님이 너에게 질만 한 원한이 도대체 뭐가 있다고. 그리고 네가 이런 짓을 하는 걸 성녀가 원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러니까 몰래 하는 거야. 그 녀석이 멈추라고 하면 멈춰야 해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제이스는 또 다른 단검을 주안의 몸 깊숙한 부분까지 찔러 넣었다.

    ***

    “저 좀 도와주세요.”

    “도와달라고? 어떻게?”

    누군가에게 급히 쫓기고 있다는 것이 여자의 산발 머리와 신발조차 신지 않아 상처투성이인 발이 말해주고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남자에게 매달리는 여자는 바로 왓튼 왕국의 왕녀인 클로에 왓튼이었다.

    “저를 숨겨주세요. 그렇게만 해주시면 원하시는 건 뭐든 해드릴게요.”

    “정말?”

    자신의 급박한 상황과는 정반대로 여유가 넘쳐흐르는 남자의 태도에 답답하면서도 화가 났지만, 여기서 이 남자를 설득하지 못하면 자신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제국의 기사들에게 목숨을 뺏길 것이 뻔했다.

    애초에 버림받은 왕녀라는 별명으로 궁내에서도 존재감 없이 숨만 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던 클로에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제국군에게 수도가 함락당하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왓튼 왕국의 씨를 말려버리라는 명령과 함께 왕궁의 모든 사람을 죽이기 시작한 제국의 병사들이 화려한 금발의 시녀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찾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클로에가 왕녀라는 사실을 모르기에 쫓아온 병사가 겨우 셋 정도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제국군은 그 숫자와 관계없이 강력한 오러를 자랑했기에 안심할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저들에게서 보이는 붉은색과 검은색이 합쳐진 흉흉한 빛은 분명히 곱게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부분을 말해주고 있었다.

    “얌전히 오면 목숨만은 살려줄 수도 있어. 여기 친구가 금발이라면 아주 환장하거든.”

    “그래, 그래. 덤으로 우리도 맛 좀 보자고.”

    병사들은 이미 클로에가 몸을 숨기고 있는 남자에게는 관심 따위 없다는 듯 음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너희가 제국군이야?”

    “뭐냐, 너는.”

    “이 근방에 왕국이 하나 있지 않았나. 그런데 제국군이 이런 곳에는 무슨 볼일이지?”

    “큭큭, 어디 시골에 사는 촌놈 같은데 모르면 그냥 여자만 넘기고 가라.”

    병사들은 이미 승리를 확신했는지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조차 뽑지 않은 채 클로에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녀를 뒤에 숨기고 있는 남자는 움직이지 않고 있음에도 그들은 그저 제국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 얼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하며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커억.”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서 흐르던 여유는 순식간에 울대를 쳐버린 남자의 주먹에 의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제국군에게 걸린 이상 끝이라는 생각에 클로에는 그냥 자진해서 병사들에게 갈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별 볼 일 없는 존재 때문에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이 다치는 것 따위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바닥에 널브러진 병사들을 보고 클로에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구해주면 뭐든 해준다고 했지?”

    “아, 네.”

    “그럼 네가 누군지 사실대로 말해줘.”

    예상치 못한 질문에 클로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올려다봤다. 짙은 어둠이 깔린 숲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윤기가 흐르는 흑발에 곱게 자란 것 같은 뽀얀 피부. 짙은 눈썹과 더불어 보자마자 뇌리에 박히는 날카로운 눈빛. 앞으로도 잊기가 힘든 잘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방금 그가 의표를 찌르는 질문을 했음에도 클로에는 그의 잘생긴 외모에 그만 머리가 하얘지고 말았다.

    “뭐야, 본인이 누군지도 몰라?”

    “아니요, 그게 뭘 원하신다고 하셨죠?”

    게다가 이 남자에게서 흐르는 맑고 투명한 기운은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특이한 눈으로 본 것 중 가장 깨끗한 빛이었다.

    “제이스, 갑자기 혼자 어딜 간 거니.”

    “스승, 이리로 와 봐요.”

    스승이라고 불리는 이는 제이스와는 또 다른 느낌의 사람이었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가 흐르는 인물로 특히나 뾰족한 귀가 눈에 들어왔다.

    “당신은 누구죠?”

    말 안 듣는 제자에 미간을 찡그리며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는 목소리였으나 말투는 정중했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가냘파 보이는 선이 얇은 외모에 파란 하늘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여자라고 하기에는 다소 굵직한 목소리는 그의 성별에 혼동을 일으키게 했다.

    “전 왓튼 왕국의 왕녀 클로에 왓튼입니다.”

    “귀하신 왕녀께서 어째서 이런 곳에 있냐고 물어보려고 했으나 상황을 보니 대충 짐작이 가는군요. 아, 제 이름은 알렉산더라고 합니다. 여기 이 녀석은 제 제자고 이름은 제이스라고 합니다.”

    킁킁거리며 무언가 냄새를 맡던 알렉산더는 제이스가 때려눕힌 병사들을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마을로 데려가자.”

    “진심이냐?”

    “뭘 그렇게 놀래. 스승이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게 아니라고 말했잖아.”

    “그건 그렇지.”

    잠시 고민하던 알렉산더는 결국 클로에의 동행을 허락했다. 왕녀라는 사실과 제국에게 쫓기는 것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그들이 자신을 외면한다고 해서 원망스러운 감정 따위를 가질 게 못 된다고 생각하던 클로에였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본인을 도와준다니. 이런 중대한 결정에 정말 고민을 한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빠르게 사안이 결정이 나다니.

    클로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호의에 눈앞이 흐려졌다.

    “흑, 흐윽.”

    뒤이어 누가 쫓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클로에는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질질 짜며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잊힌 왕녀로서 왕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쓸모없는 존재로 멸시당해와 박살이 난 자존감이 하필이면 지금 터져 나온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감격스러움까지 여러 가지 감정이 겹치며 지금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죄송해요.”

    입으로는 죄송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한번 터진 눈물샘은 멈출 줄을 몰랐다. 본인 스스로도 민망한 상황에서 이런 광경을 보고 있는 둘은 얼마나 황당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클로에는 떨리는 목소리로 제이스와 알렉산더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달했다.

    “네가 죄송할 게 뭐 있어. 우리가 멋대로 널 돕는 건데.”

    참으로 담백한 어투였다.

    친절하지도 상냥하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빙빙 돌려서 하는 말보다 오히려 더 위로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공짜로 도와주는 것도 아닌데 뭘. 분명히 말했었지? 도와주면 원하는 건 뭐든 하겠다고.”

    “네, 맞아요. 시키실 일 있으면 뭐든 편하게 말씀하세요.”

    “뭐 그건 나중에 얘기하는 걸로 하고 일단은 여길 빨리 뜨는 게 좋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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