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으으.”
침대가 부서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격렬했던 밤을 보내고 나니 뒤늦게 몰려온 통증에 샐리는 일어나자마자 깊은 신음을 냈다. 어제는 이성이 날아가 버릴 정도로 좋았던 감각은 이내 쓰라린 통증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어젯밤 헨리의 넘치는 에너지를 감당했던 몸은 물 먹은 스펀지처럼 무거워져 있어 쉽게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샐리는 침대에서 일어나는 대신 바로 옆에서 아직도 곤히 잠에 빠져있는 헨리의 얼굴을 구경하는 선택지를 골랐다.
“잘생겼다.”
지금은 감겨있지만, 어젯밤 뜨겁게 타오르던 그의 눈동자가 여전히 선명하게 느껴졌다. 고통이 아닌 쾌락에 일그러진 얼굴이 그토록 사람 마음을 애태울 수 있다는 것을 샐리는 간밤 동안 깨달았다.
샐리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건드렸다. 서로가 숨기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이고 나니 확실히 사람을 보는 눈뿐만 아니라 행동마저도 변한 것이 느껴졌다.
“으음, 그대 잘 잤소?”
“덕분에요.”
“하하, 나는 그대를 재울 생각이 없었는데.”
한 번으로 끝낸 것도 아니었고, 에너지 레벨도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먼저 지쳐버린 샐리는 옷매무새를 다잡을 정신도 없이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래서인지 어제 채 채우지 못했던 갈증이 이제야 느껴지기 시작했다.
“혹시 물 한 잔 가져다줄 수 있어요?”
밤을 새우며 목을 쓸 일이 워낙 많아서인지 샐리는 다소 잠긴 목소리로 부탁했다. 헨리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있는 물병에서 물을 한 잔 따라서 가져왔다.
상온에 내놓고 시간이 제법 지나서인지 물의 온도가 미지근하기는 했지만, 갈증을 느끼던 샐리에게는 이보다 더 시원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이제는 정말 부부가 됐네요.”
지금까지 함께 한 시간도 있었고 서로에 대해 알게 된 것도 많지만,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첫날밤까지 보내고 나니 이제는 정말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더군다나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부끄러운 차림새를 하고, 이렇게 애틋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 샐리는 아직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러게 말이오. 나도 아직은 어색하지만, 그대에게 좋은 남편이 될 수 있도록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겠소.”
“저야말로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결혼식 때도 올린 언약이지만 이렇게 단둘이만 있을 때 하려니 새삼스럽고 쑥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둘은 서로를 민망하다는 듯이 웃으며 바라보다가 이윽고 메리가 내온 아침상을 맛있게 먹으며 어제 결혼식에서 쌓였던 피로를 풀며 잠시나마 여유로운 한때를 보냈다.
***
“정말로 괜찮겠소?”
제국의 관습에 따라 결혼식을 올린 부부들에게 결혼식을 올린 당일 이후 며칠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제국이 열심히 생활하는 관료들을 위해 마련한 일종의 복지였는데, 이것이 자연스럽게 퍼지면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었다.
헨리와 샐리 역시도 어제 결혼식을 올린 부부였기에 그 관습대로 신혼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헨리는 1 기사단과의 경합과 새로 재편된 조직을 관리하기 위한 업무에 힘을 쏟아야 했다. 샐리는 셀바와 함께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연습함과 동시에 최근 지방의 한 영지에서 발생한 도적 때 습격 사건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그 이외에도 지금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본인들을 위한 일종의 포상이라고 생각하고 여행을 떠나려 했는데, 샐리가 제안한 여행지에 헨리는 경악하여 처음에는 기를 쓰고 반대했다.
“당신이 함께 가는 데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샐리가 선택한 여행지는 바로 제국의 골칫거리 중 하나인 야만족들이 머무는 땅이었다. 그들은 거친 산맥에 살며 그곳을 요새로 사용하여 지금까지 제국을 포함한 다른 세력들의 침입을 철저하게 봉쇄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최근에는 산맥 근처에 인접한 농가들에서 야만족의 습격으로 인한 피해가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된 것이었다.
“정말로 그들이 한 짓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이오.”
달콤한 하룻밤의 꿈도 아주 잠시뿐이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샐리는 자신의 위치를 공고하게 만들 수 있는 성과를 올리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성과로 적절해 보이는 것이 바로 야만족과의 영토 문제였다.
그러나 그녀가 그들의 영토를 여행지로 삼은 것은 단순히 성과에 대한 욕심으로만 정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샐리가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된 근거는 바로 헨리의 태도였다.
농가를 습격한 세력이 산맥의 야만족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처럼 그들을 변호하는 느낌의 화법에서 샐리는 당연하게도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소.”
“아니요, 전 제가 직접 확인해봐야겠어요. 무엇보다도 헨리 당신이 숨기고 있는 게 뭔지 궁금해졌거든요.”
따로 밝히지도 않았건만 샐리는 이미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알겠소. 당신의 고집을 꺾을 수야 없지. 이 일은 내 선에서 해결하고자 했지만, 그대와 함께 가는 것이니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겠소.”
결국 두 사람의 행선지는 샐리의 고집대로 야만족의 세력이 주둔하고 있는 산맥으로 정해졌다. 가는 길 자체도 워낙 험하고 무슨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장소임에도 샐리는 조금의 망설임조차 없어 보였다.
애초에 헨리는 신혼여행지로 스테판 공작가의 영지 중 넓은 호수가 일품인 곳을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의 계획은 보기 좋게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오히려 샐리에게 자신이 어째서 그 야만족 세력을 두둔하는 뉘앙스로 말을 하는 것인지 해명까지 해야 하는 판국이었다.
“나 역시도 처음에는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믿었소. 야만족들이 산맥에서 내려와 농가를 습격하여 사람을 죽이고, 그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약탈해간다는 말을 듣고 내 마음대로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산맥으로 향했지.”
아무리 헨리의 실력이 뛰어나고, 부하들에게 신임이 두텁다고 해도 결국 기사단의 단장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처음 출정할 때 목표로 정해져 있는 세력을 공략하는 것 이외에 독단적인 행동은 군법에 따라 금지되어 있었다.
특히나 그 군법을 어긴 사람이 헨리라는 것이 샐리에게는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근면함의 상징과도 같은 헨리가 군법을 어기고 독단적인 행동을 선택했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는 않았지만, 헨리는 이미 그 뒤에 벌어진 이야기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산맥에 대한 소문은 확실하더군. 지형 자체가 워낙 험난하여 산맥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부상자가 발생할 정도였으니 말이오.”
“정말 위험한 일이지 않나요?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샐리가 누누이 하는 이야기.
큰 이득을 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헨리의 이야기는 이 말에 해당되는 대목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행여나 야만족을 처리한다고 해도 그 공적을 황궁에서는 그리 높게 쳐줄 것도 아닐 것이고,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비했을 때 그 위험성이 너무나도 컸다.
“그렇지, 그때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던 건지 모르겠소. 그러나 그대가 만약 그 현장을 봤다면 나와 똑같이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뭔가 다른 걸 봤군요.”
샐리의 말에 헨리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야만족이 휩쓸고 갔다는 말에 딱 들어맞는 참혹한 광경이 마을에 도착한 헨리와 부하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 광경을 본 야닉과 주안은 분개하며 그 야만족들이 눈에 띄는 순간 곧바로 숨통을 끊어버리겠다고 으르렁거리며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돌봤다.
그러나 헨리는 길거리에 널브러진 시체들로부터 짐승의 이빨 자국 같은 상처가 보이자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날 밤 야닉과 주안을 포함해 몇몇 부하들만을 데리고 곧바로 산맥으로 향했다.
“험난한 산맥을 오르는 것부터가 난관이었으나 얼마 올라가지 않아 그들을 만날 수가 있었소.”
“그들이라면….”
“우리에게 야만족이라고 불리는 이들 말이요.”
제국군의 복장을 보고 곧장 헨리에게 달려들려던 이들을 그 뒤에서 나오는 잿빛 머리의 남자가 멈춰 세웠다. 놀랍게도 그들은 야닉과 같은 혈통을 지닌 부족한테서 떨어져 나온 세력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잿빛 머리의 남자는 헨리와 그 부하들을 자신들의 은신처로 선뜻 안내했다.
“정말로 제국군인데 곧바로 공격하지 않았나요?”
“다른 이들은 다 적개심에 가득 찬 눈빛이었지. 그들이 안내한 은신처에 있는 이들도 말이오. 하지만 그 남자만은 달랐소.”
헨리가 말한 남자는 분명 그들의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잿빛 머리의 남자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 도착한 것 같군.”
이번에도 역시 두 사람은 셀바가 열어준 포탈을 이용했다.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마탑으로 통하는 연결통로보다도 그 길이가 훨씬 길었는데, 아무래도 목적지로의 거리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여기가 그들이 산다는 산맥이에요?”
이야기로만 듣던 거대한 산맥은 딱 보기에도 거칠어 보였다. 나약한 자는 결코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묘한 아우라가 풍기는 산맥에 샐리는 잠시 그 기에 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