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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62화 (62/111)

#62

헨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아픔에 대한 분노였고, 셀바는 흥미로운 마력과 더불어 자신에게 잘 대접해준 이에 대한 분노였다.

결은 조금 다르더라도 두 사람 모두 샐리를 위해 그녀 몫만큼 화를 내고 있었다.

“남은 건 이게 전부네요.”

샐리는 몰랐던 장소이자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분노나 좌절이 아닌 원통함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위해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녀의 엄마는 이토록 고통스러운 일을 참고 견디는 가여운 인생을 살다가 힘없이 져버린 아름다운 꽃이었다.

‘너무 늦게 알았어.’

그녀가 느끼는 원통함은 다른 게 아니었다.

애초에 공작은 그녀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대고 더 고통스럽게 죽였어야 한다는 후회가 있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샐리의 초점은 그 당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 어머니에 대한 슬픔으로 향했다.

그저 너무 늦게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알게 된 것에 대한 미안함. 힘이 되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

이 두 가지가 섞이자 샐리는 눈물에 의해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

“그대….”

어두운 침실 안에서 샐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여전히 넋을 놓고 어두운 허공을 바라보며 침대 위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그녀는 그대로 굳은 채 도저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느끼고 있을 슬픔을 도무지 쉽게 입에 올릴 수가 없던 헨리는 그녀의 상태가 걱정되면서도 쉽사리 손을 뻗어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헨리는 그녀가 괜찮기를 바라며 살포시 그녀의 작은 체구를 자신의 품으로 집어넣으며 조금이라도 온기가 전달되기를 바라며 기도했다.

“당신은 사람이 죽는 걸 자주 봤겠죠?”

“그렇소.”

당황스러울 수 있는 질문임에도 헨리는 자연스럽게 샐리가 던진 질문에 그렇다며 대답했다. 서재에서 나온 뒤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에 샐리의 상태가 걱정되었던 헨리에게는 이런 질문을 던져주며 말문을 열어준 것만으로도 고마움이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어떤 기분이었나요.”

그 사이에 또 눈물을 흘린 것인지 샐리의 목은 잠겨있었다. 샐리는 언제나 당당하면서도 또박또박 말하는 것을 선호했다. 의사전달도 확실히 하면서 본인의 자신감을 표출하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태도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목소리는 웅얼거리는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말하는 데 있어서 발음 역시도 잠겨버린 목에 묻혀 또박또박 들리지 않았다. 다행히도 귀가 밝은 헨리였기에 그녀가 한 말에 토시 하나 놓치지 않고 모두 주워 담을 수 있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크게 두 가지였소. 상대가 죽을 때는 솔직히 말하자면 별생각이 들지 않았소.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전쟁터에서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다.

그렇기에 헨리는 자신의 검에 무참히 쓰러지는 적을 보면서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에 온 이상 목숨을 보전한다는 생각 따위는 이미 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근데 아군이 죽을 때는 느낌이 다르더군.”

“어땠나요.”

“눈물이 맺힌 눈으로 하나 남은 자기 동생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하는 병사에게 내가 해줄 말이라곤 믿음을 주는 것밖에 없었소.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라는 말. 그 말 한마디에 미소를 띠며 눈을 감는 병사를 보고 한때 나 역시도 무기력해졌을 때가 있었소.”

얼마 남지 않은 기력으로 낸 목소리에서 살고 싶다는 말보다 남아있는 동생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유언으로 남기는 것을 본 헨리는 그날 처음으로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눈물을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흉흉한 황금빛 눈동자에서 살기를 빛내며 적들의 목을 베는 전사는 애처롭고 안타까운 죽음에 순간 자신의 위치를 잊어버렸다.

“이것이 그때 생긴 상처요.”

수많은 전쟁터에서 상처 하나 없이 살아 돌아오는 괴물.

그것이 헨리 크리스토퍼라는 인간을 전 대륙의 모든 기사들의 로망으로 만든 초인적인 실력이었다. 그러나 그도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상처가 바로 왼쪽 갈비뼈 부근의 근육에 남아있었다.

“아프지 않았나요? 그 병사를 본 슬픔에 잠기고, 적의 기습까지 받은 상태에서 당신은 어떻게 멀쩡히 살아갈 수 있었던 거죠?”

서재에 있던 비밀의 방에서 본 공작의 추태. 그리고 그 추태의 희생자가 자신의 엄마라는 사실은 샐리를 정신적으로 무너지게 만들었다.

어쩌면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지금 이토록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프지 않았소. 나도 처음 칼에 찔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정말 아프리라 생각했었소. 그런데 신기한 게 뭔 줄 아시오?”

여전히 초점이 없어 흐리멍덩한 샐리의 눈동자에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헨리의 얼굴이 담겼다.

“아프기보다는 내 가슴이 더 뜨거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오. 분명 적의 날카로운 검이 내 몸을 관통했음에도 머릿속에는 이미 내 병사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지.”

헨리에게도 그 당시의 기억은 생생했다.

기사단장직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전투. 이전보다 어깨에 짊어진 짐이 훨씬 늘어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부하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한 것은 그에게 향후 나아갈 길을 제시해준 것과 마찬가지였다.

“상처도 있고 부하의 시체를 껴안은 채 전쟁터를 빠져나갔소. 말 그대로 미친 거지. 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시체를 포기하고 생존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맞는 판단이니까.”

전장에서는 언제나 냉정한 판단이 중요했다. 조금이라도 감정에 치우친 판단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보통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아마 지금의 헨리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부하의 시체를 껴안고 나가는 일 따위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상처받더라도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으면 언제든지 더 강해지기 마련이오. 샐리 그대 역시도 가슴에 품고 있는 꿈이 있지 않소.”

헨리의 그 말에 샐리의 눈동자에서 조금씩 생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충격을 받을만한 일은 맞았으나 여기에 얽매여 약해진다면 결국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살기 위해 노력해온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자신을 믿고 있는 많은 사람을 실망하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나 눈앞에 있는 이 사람. 자신의 반려가 될 사람. 단순히 계약을 넘어 정말로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은 이가 있었다.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고마워요.”

오늘따라 눈물이 많아진 샐리였다.

이번에도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 눈물에 담긴 감정이 아까와는 달랐다.

아까는 그저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이었다면 지금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요.”

그녀가 흘린 눈물이 무거운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제야 헨리는 속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사실 이렇게 괴로운 상황을 이겨내는 방법이 한 가지 더 있소.”

“그게 뭔가요?”

혈색이 돌아온 얼굴. 여전히 눈물을 그치지 못한 상태에서 지어 보이는 미소가 얼마나 심장에 해로운지 헨리는 깨달았다. 그 때문에 그는 주체하지 못하는 심장박동과 함께 전신에 퍼져나가는 왕성한 혈기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건….”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행동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제 막 상처를 훌훌 털어낸 샐리에게 어쩌면 크나큰 무례를 저지르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헨리는 처음으로 여자를 보고 왕성해진 혈기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그대로 샐리의 입술을 덮쳤다.

“으읍.”

샐리도 갑작스럽게 자신을 덮쳐온 거친 행동에 처음에는 당황했는지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이내 머릿속이 점점 멍해지더니 자연스럽게 그의 거친 템포에 맞춰 살포시 눈을 감고 헨리에게 몸을 맡겼다.

“후아.”

한참 동안 이루어진 거친 키스에 헨리와 샐리 두 사람 모두 상당히 거칠어진 호흡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약간의 여유를 가질 새도 없이 헨리는 다시 샐리의 입술을 거칠게 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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