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흠, 보통 서재에 이런 공간을 따로 만들어놓나?”
“보통은 안 그렇죠.”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공간에 셀바는 들어가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안의 공기는 눅눅한 느낌이 짙기에 그러는 것 같았지만, 통로 너머에서 강력하게 느껴지는 주술은 확실히 흥미로웠다.
“이 문이에요.”
얼마 걷지 않고 도착한 곳에는 누군가 연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굳게 닫혀있는 철문이 앞을 막고 있었다.
“이 방의 용도로 짐작 가는 게 있어?”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어릴 때 공작이 저희 엄마를 데리고 항상 서재에 가는 건 알았어요.”
“그것과 이 비밀의 방이 연결되어있다는 거로군.”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 나쁜 공간에 샐리 역시도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피어나는 불쾌한 상상들이 서서히 샐리를 좀먹기 시작하면서 그녀를 조금씩 약해지게 만들었다.
“괜찮소.”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지금 혼자 이 난관에 부딪히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을 감싸는 따뜻한 온기에 샐리는 고개를 돌렸고, 헨리는 두려움에 빛이 가라앉은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침착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옆에 있지 않소.”
“그러게요. 당신이 옆에 있어 주니까 참 든든하네요.”
샐리 역시도 그를 바라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덕분인지. 아니면 그를 따라 미소를 지어 보인 것이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조금 전 자신을 좀먹던 부정적인 생각들을 머릿속으로부터 쫓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떤가요?”
정리된 머리는 한결 가벼워지며 그녀의 몸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샐리는 철문에서 흐르는 강력한 마력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응시했다.
“뭔가 보여?”
“마법진 같은 게 보이는 것 같은데요.”
“마법진 같은 게 아니라 마법진이야.”
샐리의 눈에 보인 것은 형광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는 복잡한 마법진이었다. 이런 특이한 마법진은 처음 보는 것이라 샐리는 잠깐 화려하게 타오르는 마법진을 감상했다.
“어디 꽁꽁 싸매고 있는 게 뭔지 확인해볼까.”
아직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샐리가 보기에도 푸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이는 복잡한 마법진이었다. 그러나 셀바는 곤란해하기는커녕 재밌다는 듯이 철문으로 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모를 깃펜으로 마법진의 술식을 풀기 시작했다.
“공작이 마법사와도 연관이 있었나 본데.”
“그건 저도 처음 안 사실이에요.”
“마법진을 봐서는 제법 고위마법사야. 흠, 제국의 공작씩이나 되는 인물이 마법사와 손을 잡고 있었다니 제국도 볼 장 다 봤구만.”
스테판 전 공작을 겨냥한 말이었으나 그 말에 샐리 역시도 살짝 뜨끔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그녀야말로 마탑의 마법사인 셀바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알기론 마법진을 통해 역으로 상대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다던데 가능한가?”
“흠, 불가능해. 머리를 제법 굴렸는지 위치를 알아내는 데 필요한 수식을 복잡하게 꼬아버렸군.”
“그럼 풀 수 없는 건가.”
“마법진 자체도 고위마법사가 아니면 펼치는 게 불가능한 거야. 그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위치 추적과 관련된 부분은 확실히 신경을 썼겠지.”
말로만 들으면 푸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보였으나 깃펜으로 술식을 푸는 셀바의 손놀림은 어렵다고 말하는 것에 비해 빠르고 가벼웠다.
“술식을 푸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요?”
“금방 돼.”
“어려운 술식이라고 하지 않았나.”
“흥, 어중이떠중이들이나 이런 걸로 쩔쩔매지, 나 정도 되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야.”
그렇게 말한 셀바는 이전보다 더 빨라진 손놀림으로 술식을 풀었다. 그가 말한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철문에 그려진 마법진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샐리의 눈에 보였다.
철컥.
끼이이이익.
술식이 풀린 마법진이 샐리의 눈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기분 나쁘게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열릴 것 같지 않았던 묵직한 철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딱히 누군가 문을 건드린 것이 아닌데도 문은 자동으로 열렸다. 물론 문의 부피가 커서인지 그 시간이 꽤 길었다.
“먼저 들어가 보겠소?”
문이 열렸지만, 어둠이 깔린 실내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 숨겨진 비밀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고, 헨리는 자신이 들고 있던 램프를 샐리에게 건네며 그녀에게 의사를 물었다.
헨리 역시도 이 안에 있는 이야기는 분명히 불쾌할 것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놔주고 싶지 않았다.
같이 들어가면 좋겠지만, 이 이야기의 끝은 샐리가 먼저 보는 것이 도리에 맞는다는 것이 헨리의 생각이었다.
“그럴게요.”
샐리는 헨리가 건넨 램프를 넘겨받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셀바는 마법으로 빛을 만들어 방 전체를 환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했지만, 괜한 고집이 생겨 샐리는 그의 제안을 사양하고 자그마한 불빛에 의존해 방으로 들어갔다.
“아….”
램프의 불빛이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점에서 샐리의 외마디 탄식이 들려왔다.
“그대 괜찮은 것이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샐리! 그대 정말 괜찮은 것이오?”
헨리의 목소리가 서서히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큰 충격에 빠져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린 것은 아닐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램프의 빛은 떨어지거나 하는 것 없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대….”
램프로 실내를 비춰가며 방안을 살피고 나온 샐리는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넋이 나가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 때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여 침을 꼴깍 삼키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위태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헨리는 금방이라도 중심을 잃을 것 같은 샐리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샐리는 헨리의 손을 사양하고 그대로 셀바에게로 다가갔다.
“불 켜주세요.”
평소 무서운 것도 없고, 거리낄 것도 없는 셀바도 충격을 받아 동공이 확장된 샐리의 얼굴을 보고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응.”
처음으로 셀바는 다소 소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곧바로 주문을 외워 마치 반딧불이와도 같은 날아다니는 불빛들을 다수 소환해 방안으로 날려 보냈다.
평소였다면 그 화려하고 특이한 광경을 감탄하며 감상했겠지만, 지금 샐리에게는 그런 마법으로 만든 불빛 따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불빛들로 인해 환해진 방안을 본 헨리와 셀바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이건….”
방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한 도구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피가 굳어있는 채찍이라던가 가학적인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각종 도구가 침대와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도구들과는 달리 깨끗하게 정돈되어있는 침대는 참 상반되면서 이 끔찍한 방에 어울리지 않는 가구였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헨리와 셀바 두 사람은 샐리가 느끼고 있을 심리적인 고통을 입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의 할 말을 잃었다. 그저 충격에 힘이 풀린 동공으로 환해진 방안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샐리를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 방의 용도 내가 생각하는 게 맞겠죠?”
가학적인 행위에 취미가 있는 공작은 샐리의 엄마를 말 그대로 노리개로 사용하며 자신의 이상 성욕을 채웠다. 이 방은 그런 공작의 은밀한 취미를 위해 개조된 방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런 행위들이 있었다기에는 말도 안 되게 깔끔한 침대는 분명 이전에 이 저택에 있던 공작가의 사용인 중 누군가가 이 일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철문에 마법을 건 마법사의 힘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더러운 놈이었군.”
샐리 눈치를 보던 셀바가 겨우 내뱉은 첫 마디였다. 인간관계라는 개념을 모르는 그에게는 해줄 말이라고는 이런 더러운 짓거리를 즐긴 스테판 전 공작에게 욕을 뱉어주는 것뿐이었다.
“일찍 죽은 게 안타깝긴 하군. 내 손으로 직접 손 봐줬어야 하는데.”
“그러게 말이야. 이런 놈은 그냥 죽이면 안 돼. 가지고 놀면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줘야지.”
“동감이야.”
헨리와 셀바 두 사람 사이에서 생성된 첫 번째 공감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