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으음! 샐리는 더 안 먹어요?”
서로의 친분을 다지기 위해 이름을 허락했음에도 막상 클로에가 자신의 이름을 서슴없이 부르니 왠지 모르게 쑥스러웠다.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려고 해도 생각보다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 샐리에게는 클로에의 친화력이 그저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지금 이렇게 파르페 가게에 나란히 앉아 마음 편히 파르페를 먹고 있을 것이라고는 예전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샐리는 그저 속으로 클로에의 행동력 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드레스를 보러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메리랑 보러왔어도 되는 일이었다.
“아까 저택에 있던 꼬마는 누구예요?”
샐리가 연신 속으로 클로에라는 인간에 대해 감탄하고 있을 무렵.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날이 선 질문에 샐리는 그만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가던 아이스크림을 입 밖으로 분출할 뻔했다.
“콜록, 콜록.”
추한 모습을 보일 뻔한 위기를 겨우 넘기기는 했으나 누가 봐도 곤란한 질문을 받았다는 것이 티가 나는 기침 소리에 클로에가 오히려 당황했다.
“방금 질문은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그냥 잠시 저택에 머무르다가 가는 식객 정도로 생각해주세요.”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클로에는 저택에서 본 셀바가 이미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눈치를 채고 난 후였다. 그녀에게는 사람의 기운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눈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넌지시 건네 본 질문인데, 샐리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이자마자 클로에는 본인이 호기심에 던진 질문을 곧바로 취소했다.
“클로에는 조금 특이한 것 같아요.”
“제가요?”
클로에가 놀라서 말 뒤에 물음표를 붙인 이유는 샐리의 말에서 가장 먼저 반응한 부분이 바로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줬다는 것에서부터였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의미는 아니에요.”
마치 좋아하는 남자가 자상하게 자신을 대해줄 때처럼 행복해하는 클로에의 표정에 샐리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을 오해한 것 같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뒤에 말을 덧붙였다.
“그냥 뭔가 거리낌이 없다고 할까요. 친화력이 좋다고 할까요. 그냥 나랑은 많이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샐리는 목적이 없으면 사람에게 굳이 다가가지 않았다. 그녀가 마음을 열고 있는 것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곁을 지켜준 메리와 앞으로 자신의 반려로서 곁에 남아있을 헨리 정도뿐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해도 서슴없이 다가오는 클로에가 샐리의 입장에서는 참 특이하다고 느낄 만했다.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누구한테서요?”
단순한 궁금증에서 시작된 질문이었다. 성녀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없었기에 샐리는 별 생각 없이 누구한테서 이런 말들을 들었느냐고 물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의 화사한 미소가 사라져버린 클로에의 얼굴을 보고 샐리는 애당초 클로에와 친분을 다지려고 했던 목적이 떠올랐다.
“방금 했던 말 못 들은 걸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
곤란해 보이는 표정으로 순식간에 벽을 치는 클로에에게 샐리는 더 접근할 수 없었다. 그녀가 기회를 줬던 것처럼 본인 역시도 기회를 한 번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었으니 말이다.
“샐리가 궁금해 하는 이야기 해줄 수도 있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보면 뭔가 조건이 있는 거겠죠?”
샐리의 말에 클로에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샐리는 분명히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죠?”
클로에의 말에 샐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녀가 던진 질문의 의도는 대충 파악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샐리 자신의 행보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맞아요. 지난번에도 말했었죠. 전 제국을 바꾸고 싶어요.”
샐리에게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해온 일은 전부 어릴 때부터 가슴속에 고이 간직해둔 꿈을 위해서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맨 처음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공작가를 집어삼키고,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생존에 갈림길에 서서 살아가는 길거리 친구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일념이 그다음이었다.
그리고 샐리는 지금 정말 가능할까에 대해 의문이 드는 일을 해내기 위해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2 황자님을 만나보는 건 어때요. 분명히 샐리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샐리의 확신에 찬 답변을 한 번 더 들은 클로에는 드디어 자신이 가리고 있던 패를 하나 꺼내 보였다.
‘2 황자라….’
2 황자에 대해서라면 샐리도 분명 알고 있었다.
유약하여 황궁에서 쥐 죽은 듯이 살고 있다가 어느 날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신진세력이라 불리는 젊은 귀족들과의 만남을 가지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황제의 자리에 욕심이 있다는 분명한 의사표시에 지금도 귀족들은 서로 눈치싸움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녀의 입에서 2 황자의 존재가 나왔다는 것은 그가 변하게 된 기점에 클로에의 역할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꼭 2 황자님을 위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저 한 번 만나보면 좋을 것 같아서….”
“좋아요.”
샐리의 대답이 늦자 자신이 없어진 듯 낮아진 톤으로 소심하게 다시 한 번 제안을 건네는 클로에의 말이 끝나자마자 샐리는 흔쾌히 그녀의 요청을 수락했다.
“정말요?”
클로에는 샐리가 자신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한 것에 대해 뛸 듯이 기뻐했다.
애초에 황자와 만날 수 있는 제안을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샐리는 따지고 보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신진귀족세력의 힘이 필요했으니 2 황자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들과의 연결고리를 마련할 생각이었다.
“저야말로 그런 제안을 받아서 영광이죠.”
“그럼 제가 2 황자님께 말씀 드려보고 바로 알려드릴게요.”
“기왕이면 제 결혼식 때 함께 오셔요. 굳이 따로 날을 잡을 필요가 없으니깐요.”
샐리가 2 황자의 만남에 있어서 긍정적이다 못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기분이 좋았는지 클로에는 헤벌레 웃으며 앞에 있던 파르페를 크게 한 술 떠 입에 넣었다. 아무래도 벌써부터 샐리와 같은 목적으로 움직이는 친구 정도의 관계로 생각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당연히 그런 클로에를 바라보는 샐리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꿈꾸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불편함은 어느 정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
“벌써 끝냈어요?”
샐리는 클로에와 중간에서 헤어지고 난 다음에 곧장 저택으로 왔다. 그녀가 혼자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굳이 따로 배웅은 필요 없다고 했으니 작별 인사를 마치고 돌아온 것이었다.
클로에를 만나고 난 후부터 왠지 가슴 한켠에서 새로운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또래의 동성친구가 없었던 샐리가 몰랐던 감정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길거리에서 만났던 친구들과는 또 다른 느낌의 편안함과 시끌벅적함이 만들어주는 풍부한 분위기는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본연의 목적이 떠오르는 사이에 아슬아슬한 중심을 잡느라 피곤했던 샐리는 먼저 저택에 돌아와 있는 헨리를 보고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쉬워서.”
정말 싸움이라는 큰일을 치르고 온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헨리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차를 음미하는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딱 보기에도 땀 한 방울 안 흘린 것 같은 뽀송뽀송함에 샐리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초리였다.
“상대도 기사단장이었는데요.”
“같은 기사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도 아니지.”
“그래도 나름대로 실력자라고 알고 있었는데.”
“과장된 소문이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