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58화 (58/111)
  • #58

    “오늘은 드레스를 고르러 간다고 했지.”

    빠듯한 일정에 신랑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책임감과 그녀의 드레스를 고를 수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에 헨리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있었다.

    분명히 많은 것이 걸린 싸움임에도 헨리에게서는 긴장감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주변에 부하들도 없이 혼자 덩그러니 있는데도 말이다. 당장 적군의 습격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에서 여유롭게 궁상을 떠는 모습을 당연히 적군이 그냥 봐줄 리는 없었다.

    “여기 있었군.”

    헨리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샐리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머리로나마 그려보았다. 순백의 드레스가 그녀의 뽀얀 피부와 참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거기에 드레스의 새하얀 색상과 대비되는 갈색 머릿결 역시 특별히 더 돋보이면서 세상 그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다운 신부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행복한 상상은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이들에 의해 구겨져 버렸다.

    펠릭스 세티엔.

    애초에 아군이라는 생각은 서로 한 적이 없었다. 명목상 두 사람 모두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기사라는 것에서 공통점을 두고 제국의 검으로서 적들을 베거나 아군을 보호하는 임무를 따를 뿐이었다.

    “부하들은 어디에 가고 혼자 여기 있는 거지?”

    그러나 헨리를 노려보는 펠릭스의 눈에 감도는 살기는 두 사람이 명목상으로나마 아군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매서웠다.

    “그걸 알아야 하는 게 방어대 역할을 맡은 당신의 몫이잖아.”

    경합의 조건은 간단했다.

    상대의 우두머리를 먼저 제압하는 쪽이 승리하는 규칙으로 공격대와 방어대를 나누어 일종의 공성전을 펼치는 양상으로 서로의 능력을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동전 던지기에서 이긴 펠릭스는 당연히 본인들에게 유리한 방어대의 역할을 선택하였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방어대 역할이면서 여기 이렇게 나와 있어도 되는 건가?”

    주책맞게도 샐리가 드레스 입은 모습을 상상하며 자기도 모르게 설렘을 느낀 헨리는 황급히 스스로를 진정시킨 뒤 차분하게 펠릭스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아직도 귓불이 살짝 붉게 물들어있기는 했으나 그것을 다른 이들이 발견할 만큼 상황이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 게임의 목적은 상대의 우두머리를 제압하는 거잖나. 그래서 이 몸께서 친히 너를 맞이하러 나온 것이지.”

    “그 말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 같은데.”

    “글쎄.”

    애초에 이 경합에 참여한 인원들은 헨리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부하들뿐이었다. 야닉과 주안은 부단장이라는 직함 탓에 이번 경합에 참여가 제한되었다. 물론 이 규칙은 펠릭스와 1 황자인 오언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함께 전쟁터를 누비던 동료가 금전적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작전에 대한 정보를 흘렸을 것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답은 하나였다.

    “시작부터 감시자를 붙여놨었군.”

    서로 선택한 진영에서 준비를 마치면 대결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목표 지점이야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상대의 위치를 하나하나 알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1 기사단 쪽에서 시작부터 인원을 하나 빼 헨리 본인과 자신의 부하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다면 말이 되었다.

    “기가 막히게도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더군. 지금쯤 네 부하들이야 어차피 공성에 시간을 쏟고 있을 텐데. 이거 도와줄 사람도 없어서 어쩌나.”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서도 스스로를 기사라 칭할 수 있겠나.”

    “큭큭, 불리해지니까 어떻게든 혀라도 놀려볼 생각인가 본데 소용없어. 어느 정도 눈치챈 거 같은데 네가 여기서 살아나갈 일은 없으니까.”

    음흉하게 헨리를 비웃는 펠릭스의 뒤로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기사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부하들을 공성 보내고 우두머리인 넌 뒤에서 안전하게 지켜보려 했나 본데 그러면 안 되지. 제국 최고의 기사답게 일선에서 뛰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

    게다가 그들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진검이었다. 애초에 경합의 목적은 서로의 우열을 가리며 실력을 맞부딪히자는 것에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싸움에서 양쪽은 모두 목검을 사용하여 서로의 생명에 지장이 갈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진검을 들고 나타난 것을 보면 이 판 자체가 모두 펠릭스 세티엔이 설계한 무대라는 것이었다.

    ‘아니, 혼자 힘으로는 무리다.’

    헨리의 감이 이 모든 일을 펠릭스 혼자 꾸민 것은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정도 크기의 설계도라면 적어도 황궁에 대한 장악력이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이봐, 그렇게 불쌍한 표정 지어도 안 봐줄 거야.”

    멍하니 생각에 잠긴 헨리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는 듯 보였다.

    “감사 인사는 해두지.”

    그러나 펠릭스의 오만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생각이 정리된 것인지 씨익 웃어 보인 헨리는 순식간에 펠릭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펠릭스가 그의 초인적인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게 된 것은 데리고 온 최정예 부하들이 모조리 바닥을 나뒹굴고 있게 된 뒤였다.

    “조금 귀찮다고 생각했는데 우두머리께서 친히 내 앞으로 나와 주시다니. 생각보다 빨리 돌아갈 수 있겠군.”

    순식간에 상황은 완전히 반대가 되어버렸다. 펠릭스의 얼굴에서는 여유로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헨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살기 대신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 실제로 헨리의 실력을 가까이서 볼 수 없었고, 기사단장으로서 주변의 찬양을 들어왔던 나날들로부터 생긴 자신감은 순식간에 땅으로 떨어졌다.

    “너, 너….”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던 펠릭스는 이대로 도망쳤다가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모조리 잃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달려들 생각을 하기도 전에 헨리의 목검이 순식간에 그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결국 펠릭스는 그대로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

    “어머나! 정말 아름다우세요.”

    성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백금발의 머리칼을 가리기 위한 촌스러운 두건을 쓴 클로에는 샐리가 드레스를 갈아입을 때마다 입력이라도 된 것처럼 감탄사를 연발하며 디자이너에게 이것저것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드레스 고르기에 임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호들갑을 떨며 촌스러운 복장을 하고 있는 이가 성녀라는 것을 알면 아마 주변 사람들 모두가 까무러칠 터였다. 정말 그 누구도 클로에를 성녀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지극히 평범한 신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다 예쁘다고 하시면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네요.”

    클로에의 기운이 전염되어서 그런 것인지 막상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선 가게에서 샐리는 계속 자신을 위해 나오는 여러 벌의 드레스 사이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다 비슷해 보이는 드레스인데도 디자이너의 설명은 드레스 별로 다 달랐다. 심지어 함께 온 클로에는 그런 디자이너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머릿속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말 다 잘 어울리시는걸요. 피부도 고우시고, 머리칼도 윤기가 흐르셔서 어떤 드레스라도 다 어울려요.”

    모르긴 몰라도 클로에의 눈에는 드레스들 모두 다 마음에 든 것 같았다.

    “함께 오신 분이 보는 눈이 좋으시네요. 정말로 공작님한테는 모든 드레스가 다 잘 어울리셔요.”

    재밌게도 샐리의 드레스를 골라오는 디자이너와 클로에는 쿵짝이 잘 맞았다. 디자이너의 처지에서야 드레스를 팔기 위한 처세술이라고 한다면, 클로에는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디자이너에게 또 다른 드레스를 요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드레스 중에서 고를게요.”

    샐리의 말에 디자이너는 물론이거니와 클로에까지도 못내 아쉬움을 표했다.

    “고민 되시면 몇 개만 후보로 골라놓고 헨리 경이랑 한 번 더 오시는 건 어떠세요?”

    제법 솔깃한 제안이었다.

    어쨌든 샐리의 드레스뿐만 아니라 결혼식 날 입을 양복도 한 벌 맞춰야 하니 두 사람이 적어도 한 번은 함께 외출해야 했다.

    “그게 좋겠네요.”

    기왕 이렇게 결정한 거 빠르게 괜찮아 보이는 드레스를 고른 뒤 가게를 나가기로 했다. 아무리 정체를 숨긴다고 해도 너무 수상쩍어 보이는 인물로 낙인찍혀서는 큰 소동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특히나 클로에의 경우 스테판 공작가의 하녀라는 신분으로 포장하여 가게에 겨우 들어올 정도로 지금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쩍어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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