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헨리는 결혼을 이유로 들며 기간을 넉넉히 잡고자 했지만, 그쪽에서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바로 내일의 날짜로 두 기사단의 경합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뭐, 만날 수만 있다면야 언제가 됐든 상관없지. 그럼 이제 너희 저택으로 가자고.”
처음 만난 이후로 셀바의 얼굴은 가장 밝은 표정이었다. 특히나 그의 어린 외모 때문인지 신이 나서 포탈을 열려는 그에게서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이 느껴졌다.
“잠깐만요, 아무 데나 포탈을 열면 안 돼요!”
“아, 그렇지. 그럼 너희 저택의 위치를 말해.”
처음에 봤을 때는 그냥 행동반경 자체가 좁은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설레고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냥 평소에 사람에 대한 의구심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샐리는 그런 그가 자신에게는 마음을 조금은 열면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안심할 수 있었다.
***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뭐라고 하긴 아직 시기상조시란다.”
1 황자 오언은 황제와의 만남의 결과에 대한 시종의 물음에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나오는 괴팍한 상정치고는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방이 멀쩡했기에 시종은 방을 한 번 둘러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들의 움직임에도 꿈쩍도 하지 않으시는군요.”
“눈 하나 깜짝 않던데.”
오언은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과 함께 황제를 알현하여 황태자 책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오는 길이었다. 꽤 많은 수의 명망이 있는 귀족들을 모았기에 이번에는 뜻대로 풀릴 줄 알았던 일에 황제는 오언의 말대로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번에도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젠장, 그렇다고 해서 토니 그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멍청이보다는 내가 훨씬 낫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 자리에서 황자의 뜻을 거스를 간이 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서 황자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시종은 더더욱 그랬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게 다 스테판 공작이라는 계집애 때문이야.”
이번 알현에서 성과를 못 얻은 것도 그렇지만, 또다시 황제의 입에서는 샐리의 이름이 나오며 황자의 심기를 거슬렀다.
[스테판 공작을 보거라. 여자의 몸으로 흥미로운 안건을 내놓으며 자신의 영민함도 증명했고, 게다가 신랑감도 아주 잘 구하지 않았나. 황자는 지난번 내 생일에 저지른 실수를 벌써 잊은 게냐.]
황제의 생일날 각국에서 찾아온 사절단 중 황제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한 섬 국가가 있었다. 작은 국가지만, 현 황제가 황자 시절부터 친했던 이가 국가의 지도자로 있었고, 그 지도자의 딸이 굉장히 현명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1 황자인 오언의 단점을 가려줄 반려로 그 섬 국가의 공주를 선택했다. 하지만 못생긴 공주와 결혼하기 싫었던 오언은 공주의 면전에서 그녀의 외모를 비하했고, 그 상황에 있어서 황제에게 제대로 찍혔다.
“그 여자는 어떻게 됐지?”
더 이상 황제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오언은 이야기를 다른 주제로 돌렸다.
“돈이라면 저희 쪽에서 챙겨 황자님의 사유지로 옮기는 중입니다.”
“다른 쪽에서 냄새를 맡았을 가능성은?”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항구 쪽에 머무르다가 사흘 내로 제국을 뜬다더군요.”
“좋아, 최근에 서대륙 쪽에서 마법공학무기들이 발명되었다는 게 사실인가?”
“사실이긴 합니다만….”
“토 달 생각 말고 바로 사들여.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오언은 그가 가진 난폭한 성품답게 그냥 앉아서 황제의 결정을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혹시라도 본인이 생각하던 대로 일이 풀리질 않을 경우를 대비해 그는 황제의 눈을 피해 몰래 지방에 영지 하나를 손에 넣었고, 그곳에서 자신의 사병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지나간 핏빛의 이채가 그가 훗날 벌일 수도 있는 학살극을 예고했다.
“그래, 세티엔 경. 자신 있나?”
어둠이 깔린 황궁.
그곳에서 1 황자 오언은 자신의 충실한 심복 중 하나인 1 기사단의 단장 펠릭스 세티엔을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거만한 자세로 시종이 잔에 채워준 와인을 음미하면서 펠릭스와 내일 있을 헨리의 기사단과의 경합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자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딱히 이렇다 할 근거가 없는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세티엔은 나름대로 제국의 실력 있는 기사 중 하나로 전쟁터에서의 공적만 없을 뿐. 그래도 귀족의 뿌리를 가진 기사 중에서는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 귀족의 뿌리라는 것이 문제였는데, 과거의 제국이라면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데 의의를 두며 매일매일 혹독한 단련의 연속이었다면, 지금은 그와는 목적부터가 달라져 있었다.
출세를 통한 가문의 영광.
황궁의 기사단은 귀족 자제들이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은 지 제법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1 황자인 오언과 펠릭스가 있었는데, 1 황자의 지지기반이 되는 귀족의 자제들로 채워진 곳이 바로 1 기사단이었다.
“안 그래도 수도에서 머무르는 것부터가 거슬린다고.”
오언에게는 유약한 2 황자인 토니조차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의 야망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그의 레이더망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레이더망은 당연히 황실의 피가 흐르는 헨리를 지나치지 않았다.
“방계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혈통은 존재하니 그 싹을 확실히 잘라놔야 해.”
다른 것도 아닌 그의 뒤에는 황궁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샐리 스테판이 있었다. 세기의 로맨스에서 발생한 엄청난 화제와 관심을 그대로 정치판으로 끌어들이며 자연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나하나 취해나갔다.
“성녀를 미행하라고 시킨 놈은 아직도 연락이 없나?”
“네, 황자님. 이 정도면 미행하던 것을 들켜서 변을 당했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제길, 쓸모없는 노예 새끼.”
황자의 분노 섞인 목소리에 시종은 물론이거니와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펠릭스 역시도 심히 당황하며 황자를 진정시켰다.
“들을 사람도 없는데 뭘 그리 조심하나.”
“그래도 황궁 안에서는 언제나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펠릭스의 말대로 황궁 안에서는 그 무엇도 확신해서는 안 되었다. 누구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되었고, 더불어 말과 행동거지를 항상 조심히 해야 하는 장소가 바로 황궁이었다.
“어쨌든 성녀의 뒤를 쫓던 이가 죽었다는 것은 필시 황궁 안에서 벌어진 일은 아닐 겁니다.”
“그래, 황궁 안에서의 살인은 확실히 위험이 크지. 어쨌든 성녀의 주위에 실력 있는 자가 붙어있다는 건 확실하군.”
“하지만 누가 성녀의 곁을 호위한다는 말입니까.”
클로에에게 붙여뒀던 감시역의 죽음으로 오언은 성녀의 주변에 호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존재의 정체와 정확한 실력이 미지수라는 것이었다. 애초에 성녀의 존재를 최근에야 의식하기 시작했기에 이전까지의 클로에의 행적을 알 턱이 없었다.
“하아, 어쨌든 중요한 건 내일 있을 싸움이니까.”
뇌 용량을 초과해도 한참을 초과한 탓인지 오언의 입에서는 깊은 한숨이 삐져나왔다. 여러 가지로 생각할 게 많은 복잡한 위치이다 보니 한 번에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씀대로 당장 눈앞에 있는 일부터 하나씩 처리해나가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펠릭스의 조언에 오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가 내일 있을 싸움에서 승리한다면야 머리를 아프게 하는 고민의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 생겨나는 셈이었다.
황궁의 병력에 자신의 사람들을 채워 넣을 수 있으니 성녀의 주변을 감시하는 것도 수월했고, 계획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거병도 손쉽게 생각할 수 있었다.
“내일 반드시 이겨야 하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1 황자의 배에 오른 지 오래인 펠릭스에게도 내일 있을 대결에서 승리하여 수도 방위대라는 거대한 조직을 차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았다. 나름대로 1 기사단에서 자신을 상대해낼 실력자가 없다는 것은 그의 자신감에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이미 내일 헨리를 박살 낼 상상을 머릿속으로 수천 번도 더 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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