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어?”
그러나 빛이 사라지고 난 뒤에 눈을 뜬 샐리는 처음 만났던 노파는 어디로 가고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잿빛의 머리칼을 가진 소년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강대하면서도 신성한 마력인걸? 이런 건 나도 처음 보는데 흥미롭네.”
마법사는 자신의 모습이 변한 것을 아직 인지하지 못했는지 수염을 쓰다듬기 위해 손을 턱으로 가졌다. 그러나 원래라면 수염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허우적거리는 손과 너무나도 선명해진 시야에 마법사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원래의 모습을 숨기고 있었군.”
당황스러움에 자기 얼굴을 미친 듯이 만지작거리는 잿빛 머리의 아이에게 다가간 헨리는 곧바로 아이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아야!”
“원래라면 내 검이 네 목을 통과했을 테지만, 어리니까 이 정도로 봐준 줄 알아.”
“잠깐! 본모습을 바꿔서 나이를 속인 건 맞지만, 이렇게 보여도 30살이라고!”
“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어. 내가 백작과 당신들을 속였다고 생각하고 있지? 근데 아니야. 난 정말 마탑에서 최고의 마법사라고.”
헨리는 억울함에 열변을 토하는 아이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샐리는 여전히 아까 그 지저분했던 노파와 이 잘생긴 남자아이가 정말로 동일인물인지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
“실력은 그렇다 치고 그 외모로 30살이란 걸 지금 우리보고 믿으라는 건가?”
헨리의 따끔한 말에 샐리도 백 번 공감했다.
아무리 많이 쳐 줘도 이제 막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나이 정도 되는 소년의 모습을 하고 30살이라고 하다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가 힘들었다.
“진짜라니까! 안 그러면 그쪽 부인의 먹었던 약을 내가 어떻게 제조했겠어.”
그렇게 따진다면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눈에 보이는 외모대로라면 그가 태어나기 전에 샐리가 태어나고도 남을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헨리는 한 번 자신을 속인 상대에 대한 의구심이 어린 눈초리를 쉽게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원래의 모습은 왜 숨기고 있던 거지?”
“그야 당연히 그 모습이 더 유리하니까 그렇지.”
“뭐가 유리하다는 거죠?”
외관상 자기보다 어린 소년에게 존대를 하는 것이 영 입에 붙지 않았지만, 자신의 몸 전체를 일순간 쓸고 지나간 낯선 감각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가 말했던 작업은 제대로 이루어진 듯했다.
그렇기에 샐리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치는 소년의 외관을 한 마법사를 달래기 위해 최대한 친절한 어투로 그에게 존중을 보였다.
“이런 모습이면 의뢰를 받는데 불편해서 그런 거야. 잘 생각해봐. 이런 어린애의 모습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씩씩대며 하소연을 하는 것에서 제법 많은 사연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어린애의 모습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이것저것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알겠어요. 그래서 살펴본 결과는 어때요?”
“너 아까 내 마력이 느껴졌어?”
“네, 아직도 여운이 남아있는 게 느껴져요.”
“그렇군. 늦었지만 내 이름은 셀바토레스야. 그냥 셀바라고 불러.”
“네, 셀바 님. 저는 스테판 공작가의 가주인 샐리 스테판입니다. 그리고 저쪽은 제 남편이자 제국의 기사단장인 헨리 크리스토퍼라고 합니다.”
교과서 그대로의 예법. 그 예법을 완벽하게 선보인 샐리의 우아한 자태에 셀바는 놀란 눈치를 숨기지 못했다. 보통 이런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누가 됐든 무례를 저지르기 마련이었고, 심하면 실력과는 별개로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런 자신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후원해준 사람이 바로 내셔스 백작이었는데, 그 백작에게서 볼 수 있었던 품격이 오늘 샐리에게서 보였다.
“네 안에 흥미로운 마력만큼이나 마음에 드는 태도군.”
셀바는 예의를 차리는 샐리가 썩 마음에 든다는 눈초리로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지만, 그에게는 천재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타고난 어마어마한 마력이라는 재능이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그런 어린아이 모습이 되신 건가요.”
“그건 말이지….”
셀바는 자신에게 예의 바른 사람을 참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럴 때가 되면 그 어떤 질문이라도 성심성의껏 대답해주게 되는데, 샐리의 질문에 그는 금지된 고서에 손을 댔다가 저주를 받게 된 일화를 아주 상세히 풀었다.
어느 정도의 상세함이었느냐면 고서를 찾으러 가기 전과 그 후에 있었던 일까지의 무용담을 모두 말하면서 시간이 꽤 소비되었다.
“요약하자면 헛된 욕심을 부렸다가 그 모습으로 평생을 살게 되었다 이거군.”
“야, 네 남편 좀 어떻게 좀 해봐라.”
헨리는 자신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을 좋아하면서 정작 본인은 무례한 셀바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셀바는 계속해서 자신을 의심의 눈초리로 대하고 있는 헨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제 안에 있는 힘이란 게 뭐죠?”
서론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샐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마법사의 모험담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안에서 본 건 말 그대로 구역질 날 정도로 깨끗한 마력이었어. 그렇게 순도 깊은 마력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이전까지는 평범한 어린아이 같았다면 본격적인 설명에 들어가자 셀바는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이제야 조금 대마법사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분위기를 뿜어내기 시작했고, 샐리는 그의 말 하나하나를 경청했다.
“그리고 그 마력에서 느껴지는 성스러운 기운은 분명 여신의 것이지. 즉, 추론하자면 네 안에 있는 힘은 여신의 마력 일부라는 거야.”
“확실한 건가?”
“확실해. 나처럼 마력의 세세한 차이점 하나하나에 민감한 마법사라면 느낄 수 있어.”
샐리에게 내재된 힘의 비밀이 밝혀지자 헨리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셀바의 확신에 찬 표정은 자신이 한 말에 거짓 따위가 없음을 증명했다.
“그럼, 여기서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이런 강대한 힘을 손에 넣었냐는 것이고, 그리고 네 몸은 어떻게 이런 힘을 감당할 수가 있었느냐겠지.”
“약 때문인 것 같은데요.”
“내 생각도 그래. 그래서 네 엄마 되는 이가 나를 찾아왔었겠지. 그 마력이 폭주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을 테니까.”
“폭주라니요?”
“말했잖아. 그 힘은 인간은 소유할 수 없는 힘이야. 그런데 그런 힘이 네 안에 그냥 얌전히 틀어박혀 있었겠냐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강대한 마력을 잠재울만한 약을 부탁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 부탁을 순순히 들어줬다는 건가.”
“당시에는 백작에게 얻은 은혜를 갚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런저런 부탁을 많이 들어줬었지. 지금은 그런 인간들의 개 같은 면을 봐버려서 마탑에 온 거지만.”
격정적인 단어 선택에 있어 그가 겪은 고초가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는 네 차례야. 샐리라고 했었지? 이제는 네 이야기를 해 봐. 여신의 마력이 있다면 분명 계시 같은 걸 받았을 테지.”
셀바의 말에 샐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이윽고 입을 연 그녀는 자신이 꿈속에서 만난 여신에 관한 이야기와 그녀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들 모두를 빠짐없이 나열하며 밝혔다.
“강대한 위협이라고 했나?”
“네.”
“신들의 꿍꿍이속이야 내가 알 수는 없고, 분명히 너에게 원하는 바와 자질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 힘을 줬겠지.”
“그렇군요.”
“하지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야.”
이제까지 보여준 적 없는 심각한 얼굴에 샐리는 물론이고 헨리조차도 잔뜩 긴장감이 가득한 분위기에 휩쓸렸다. 애초에 여신의 마력이라는 스케일이 큰 이야기에 두 사람 모두 제법 충격이 있었기에 더 큰 문제가 있다는 말에 침을 꼴깍 삼켰다.
“마력이란 건 사람마다 타고나는 게 달라. 마력의 양도 재질도 모두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본인이 타고난 마력에 대해 자연스럽게 인지하게 되어 있어.”
셀바는 원활한 설명을 위해 마력의 근원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애초에 마력이라는 것은 오러에서 파생된 힘으로 약간의 변이과정을 통해 생긴 일종의 돌연변이 같은 힘이었다. 여신은 처음에 이 돌연변이의 힘을 거두려고 했으나 인간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생각을 고쳐먹었고, 그렇게 지금까지도 마법이 발전해올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