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알았어요, 알았어.”
이런 사소한 일로 뭐라 하지 않겠다고 말한 샐리는 헨리의 입에 가볍게 자신의 입술을 맞췄고, 그제야 단단하게 묶여있던 그의 팔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만 본 교환임에도 생글생글 웃는 헨리를 보니 샐리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 사람은요?”
“일단 돌아가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까다로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대와 상의하려고 왔소.”
“그럴 것 같았어요. 그 정도 배짱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직접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이번 일에 대해 책임을 물며 응징하는 것은 일단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공작가의 위신을 지키며 3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어떻게든 마련하는 방법을 강구 해야 했다.
더군다나 샐리가 짊어지고 있는 금전적인 문제는 오늘 찾아온 사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샐리 이전의 스테판 전 공작이 남겨둔 빚을 포함해 공작부인과 레너드의 사치로 공작가의 재정에는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더군다나 스테판 전 공작이 사업을 한다고 투자받은 돈은 그 행방이 묘연했고, 투자자들의 원성은 자연스럽게 샐리에게로 옮겨온 것이었다.
어쨌든 샐리의 사정을 이해해 최근에는 연락의 빈도수가 잦아지기는 했지만, 돈을 잃은 투자자들의 분노를 가벼이 볼 수도 없는 노릇에 샐리는 두통이 다시 발병할 것 같았다.
“이렇게 된 거 결혼식은 미루는 것이 어떻겠소.”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힘들어 보이기 때문에 제안했다. 물론 두 사람의 결혼식은 일반적인 결혼과는 결이 다른 느낌이 있었지만, 지금 두 사람의 감정선을 봤을 때는 충분히 고려할만한 사항이기도 했다.
“그건 안 돼요. 애초에 이 이상의 특혜는 바랄 수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되는 상황이니까요. 어차피 결혼식을 미룬다고 해서 당장 뾰족한 수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 말에 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과 관련된 문제는 지금 머리를 싸맨다고 해서 곧바로 해결할 방안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어요.”
“지금 이 시간에?”
“네, 이름은 페드로라고 하시고 급한 소식이 있다고 빨리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메리의 입에서 나온 페드로라는 이름에 다른 누구보다도 가장 크게 동요한 사람은 바로 헨리였다.
순항하던 배가 갑작스럽게 만난 암초에 침몰하는 그 심정을 지금 헨리가 느끼고 있었다. 샐리와의 관계가 순탄하게 발전해나가고 있는데, 거기에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되는 존재가 지금 찾아온 것이었다.
샐리의 허락이 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문밖에서 빠르게 가까워지던 발걸음이 문 바로 앞에서 멈췄다.
똑똑.
정중한 노크 후에 샐리가 들어오라고 하자 낡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예의를 갖추고자 입고 온 회색 정장과 함께 갈색 머리에 볼에는 주근깨가 나 있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페드. 그런데 급한 소식이란 게 뭐야?”
페드로가 이렇게 직접 찾아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보통 이렇게 찾아올 때면 그가 들고 온 소식은 썩 달갑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샐리는 오랜만에 보는 소꿉친구를 최대한 반갑게 맞이했다. 애칭을 서슴없이 부르는 샐리를 보는 헨리는 착잡한 심경이 드러나는 얼굴로 페드로를 훑어보며 두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전에 내가 알아본다고 했던 여자 말이야. 그 여자가 갑자기 사라졌어.”
“뭐?”
여기서 페드로가 말한 여자는 스테판 전 공작이 함부로 놀린 아랫도리에 놀아난 창부를 말하는 것이었다. 공작은 그 창부가 마음에 들었는지 값진 보석을 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영지 중 하나에 머물 곳을 제공해줄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당연히 공작부인은 그걸 그냥 두고 보려 하지 않았지만, 샐리와 그녀 엄마의 경우와는 다르게 저택 안에는 없었기에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방법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공작이 싸고돌았기에 다른 방도도 찾기 힘들었다.
샐리가 그런 창부에 관심을 가지고 페드로와 함께 그녀를 감시한 이유는 다름 아닌 돈과 관련된 문제였다.
“언제나처럼 루트는 똑같았어. 그런데 가게에 들어가서 한참 동안 나오지 않기에 들어가 봤는데 아무도 없더라.”
“감시를 눈치채고 도망친 걸까?”
“잘 모르겠어.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비밀통로는 영지 근처 숲으로 이어져 있었고, 흔적도 중간에 끊겨서 더 이상 추적하기 힘들었다는 거야.”
“그렇다면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를 해놓은 거라 봐야겠네.”
“응, 중간에 끊기기는 했지만, 분명히 혼자 도망친 흔적은 아니었어.”
유령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투자금의 묘연한 행방.
그 행방과 강력하게 연관되어있다고 생각했던 존재가 사라지니 두 사람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가 지냈다는 영지는 어디에 있는 거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헨리는 난관에 봉착한 두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정확히는 샐리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에 끼어든 것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문제는 샐리에게 있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부분임이 틀림없었다.
“동쪽에 있는 루퍼 지방에 있는 곳입니다.”
“흐음….”
페드로의 말을 들은 후 헨리는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루퍼 지방이라면 바다와 인접하여 라본 항구가 있는 곳이니 항구가 있는 마을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군. 페드로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헨리 경.”
“라본 항구 쪽을 찾아보는 것을 추천하지. 돈이 있다면 분명히 해외로 뜰 가능성이 커. 하지만 혹시 모르니 항구 도시의 부동산부터 찾아보는 것이 좋겠어. 근처에 항구가 있으니 얼마든지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곳에 정착하려 할지도 모르니 말이야.”
페드로는 헨리와 처음 보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의 부하라도 된 것처럼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페드로는 이것이 제국 최고의 기사의 기운이구나, 하고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거대한 아우라에 속으로 감탄을 연발했다. 헨리의 경우에는 샐리와 친해 보이는 남자인 페드로를 견제하고 있었지만, 반대로 페드로는 그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동경의 대상인 헨리를 만나 오히려 기뻐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질투심에 눈이 먼 헨리의 눈에는 그런 표정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어쨌든 급한 소식이라 내가 직접 온 거고, 이거 외에는 특별한 소식은 없어. 헨리 경의 말씀대로 항구 쪽으로 인원을 보내고 특이사항 있으면 바로 연락할게.”
“조심해서 가.”
소식을 전해준 페드로는 헨리의 얼굴을 슬쩍 한 번 쳐다본 뒤에 곧바로 저택을 떠났고, 이제는 수많은 문제들 앞에서 샐리의 선택만이 남아있었다.
***
“그래서 마탑에는 어떻게 가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 중에서 샐리는 가장 먼저 마탑에 방문하는 것을 선택했다.
저택 집무실에서 비밀을 감춘 채 고요히 잠들어 있는 비밀스러운 방과 어릴 때부터 복용해오던 약. 과거 칼에 찔린 상처가 순식간에 나은 것을 포함한 많은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최선의 선택지였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마탑으로 가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걱정 마시오. 내셔스 백작이 우릴 도와준다고 했으니.”
이럴 때 좋은 인맥은 썩혀둘 필요가 없었다.
마법을 배척하고 여신을 숭배하는 제국에 있어서 마탑은 거의 적국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으며 배척되었다. 때문에 제국인인 샐리와 헨리는 마탑의 위치는 물론이거니와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는 장소에 가는 방법 따위를 알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이 아는 범위에서 유일하게 마탑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내셔스 백작이 필요한 것이었다.
“마법사들을 배척하기 시작한 이후로 마탑과 우호적인 제국인이 있다니 조금 신기하네요.”
그래서 두 사람은 현재 마차를 타고 내셔스 백작의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샐리는 어떻게 제국인이 마법사들과의 교류를 원활하게 이어왔는지에 대한 의문을 헨리에게 표현했다.
“나도 자세한 건 모르오.”
제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보안이 필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건드리는 것이 아니었다. 헨리 역시도 내셔스 백작이 마법사들과의 교류로 제국에 해악을 끼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알고도 용인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