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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49화 (49/111)
  • #49

    다른 건 필요 없었다.

    실제로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고 해도 이런 고리대금업자가 좋은 목적으로 접근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그저 샐리가 이 남자에게서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헨리가 분노하기에는 그 명분이 충분했다.

    “이 서류를 한 번 보시겠습니까?”

    남자는 침을 한 번 꼴깍 삼킨 뒤 다시 한 번 코트 안주머니를 뒤져 꺼낸 서류를 헨리에게 굉장히 공손하게 건넸다.

    이미 심기를 거슬린 것 같은데, 거기에 대고 무례하게 굴어 신경을 거슬러 안 그래도 사나운 기세를 내뿜는 맹수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것이 대적할 수 없는 맹수를 마주한 이의 일종의 생존본능이었다.

    “이건….”

    서류를 살펴본 헨리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 서류를 그대로 샐리에게 건넸다. 샐리는 건네받은 서류에 스테판 공작가의 이름으로 빌려 간 3억의 빚이 적혀있음에 경악했다.

    “이게 뭐죠?”

    “보시는 대로 스테판 공작가에 청구될 금액이랍니다.”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큰돈을 도대체 누가 스테판 공작가의 이름으로 빌렸냐는 거예요.”

    상당한 금액의 빚에 샐리는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애초에 출처도 모르는 이 돈이 어째서 자신이 이끌고 있는 공작가에게로 청구가 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설마….’

    하지만 그런 샐리의 머릿속에 이런 저급한 짓거리를 할 것으로 유력해 보이는 인물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바로 레너드 스테판이었다.

    애초에 공작가쯤 되는 고위 귀족의 이름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애초에 법이 그랬고, 함부로 그 이름을 사용하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당당하게 불법적인 돈을 만질만한 인물은 레너드 한 사람뿐이었다.

    “레너드 스테판인가요?”

    “맞습니다. 공작님의 오라버니께서 최근 저희 쪽에서 빌린 돈인데, 연체일이 늦어지면서 이자가 붙다 보니 제가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 이렇게 직접 발걸음을 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샐리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다른 무엇도 아닌 레너드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때려봐야 얼마 아프지도 않겠지만, 지금 이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는 이미 앞뒤 생각하지 않고 주먹을 날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공작가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도 유분수지.”

    빌린 돈의 사용처라고 해봐야 그 머리 빈 망나니가 쓸 곳은 도박판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일은 아무리 봐도 악의를 갖고 제법 머리를 굴려 벌인 일 같은데, 샐리는 본인을 화가 나게 만들 것이라면 충분히 성공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진정하시오.”

    “그러고 싶은데 생각만큼 그게 잘 안 되네요.”

    헨리는 이렇게 감정적인 샐리를 처음 봤다. 하지만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는 공작가의 관리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은 그녀의 입장에서 봤을 때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일단 그대는 좀 가라앉히면서 진정시키시오. 저자는 내가 상대하고 있을 테니.”

    그 말에 샐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도 이렇게 감정적인 상황에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고, 믿음직한 동반자에게 잠시 의지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헨리는 그녀의 그런 결정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머금으며 노을을 받아 빛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

    “원래 빌린 돈은 1억인데 어째서 한 달도 안 된 시점에서 3억으로 오른 거지?”

    “저희 업체가 이자율이 조금 높습니다.”

    남자는 다른 건 필요 없고 당장 눈앞에 3억이라는 큰돈이 되는 값어치가 놓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공작가에 오기에 조금 떨리는 감이 있었지만, 이렇게 큰돈을 벌 기회를 그런 약간의 두려움 따위에 날릴 수야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3억이지만, 나중으로 가면 값이 더 오를 겁니다. 그러니 빨리 지불하시는 게….”

    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과 함께 앞에 놓여있던 탁자가 완전히 산산이 조각났다. 그리고 이윽고 자신을 노려보는 맹렬하고 사나운 황금빛 눈동자에 남자는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제국에서 정한 이자율이 있다는 것을 모르나? 그대가 저지르고 있는 것은 범죄야. 지금 당장 제국의 기사로서 네놈 목을 쳐도 모자랄 판이니 지금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어때?”

    헨리는 원래 지금처럼 적에게 있어서 자비 따위를 베풀지 않았다. 어찌 보면 조금은 단순 무식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전쟁터에서 평생을 지낸 그에게는 이런 위협은 당연한 행동 중 하나였다.

    그저 샐리가 곁에 있다면 이런 부분에 있어서 조절했을 뿐이고, 그녀가 없는 지금 눈앞에 짜증나는 남자에게 괜히 사람 좋아 보일 필요가 없었다.

    “어, 어쨌든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공작가의 위신에도 좋지 않을 겁니다.”

    사나운 맹수와도 같은 헨리의 앞에서 배짱을 부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뒷세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경험 정도는 살면서 많이 있었기에 남자 역시도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헨리는 그런 남자를 당장 이 저택 밖으로 날려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쨌든 공작가과 관련된 문제이니 본인 혼자서 이 일을 해결해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부인과 상의해볼 터이니 이만 돌아가시오.”

    “명함 뒤에 제 사무실 주소가 있으니 언제든지 연락해주십시오.”

    아까의 비릿하면서도 여유로운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남자는 허겁지겁 방을 나섰다. 헨리는 곧바로 위층에 있는 샐리의 방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

    ‘그 남자 분명히 어디선가 봤어.’

    헨리에게 일을 맡기고 방으로 올라온 샐리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함이 느껴지는 얼굴에서 위화감을 느껴 푹신한 침대와 소파를 두고도 편히 쉬지 못했다.

    ‘설마….’

    자신을 향했던 비릿한 미소.

    실마리는 그 남자에게서 봤던 기분 나쁜 미소에 있었다. 샐리는 분명 그 미소를 예전에 본 기억이 있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기억 속의 그 날.

    페드로와 함께 뒷골목의 한량들로부터 쫓겨 칼까지 맞았던 그 날 그 장소에 오늘 본 그 기분 나쁜 남자가 있었다. 그때보다 나이를 먹어 주름도 늘면서 이전에 봤던 날카로움이 조금 무뎌지기는 했지만, 뱀과도 같은 이목구비에서 나오는 비열한 생김새는 쉽게 기억에 남았다.

    “괜히 기분이 안 좋은 게 아니었어.”

    “뭐가 말이오?”

    어느새 온 것인지 뒤에서 들려온 헨리의 목소리에 샐리는 그만 너무 놀라 크게 소리를 지르며 순간 몸의 균형을 잃어버렸다.

    “엄마야!”

    샐리답지 않은 귀여운 비명에 헨리는 쿡쿡 웃으며 그녀가 뻗은 손을 손쉽게 낚아채 잃어버렸던 균형을 대신해서 찾아주며 샐리를 자신의 품으로 데려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길래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있었소.”

    “방에 들어오셨으면 인기척 좀 내주세요. 그리고 남의 방에 들어올 때는 노크를 하셔야죠.”

    “남의 방? 우리가 서로를 남이라고 부를 사이는 이제 지난 것 같은데.”

    헨리는 여기서 더 자신을 서운하게 하면 금방이라도 입술을 덮칠 것처럼 위협하며 말했다. 딱히 위협이라고 표현할 것도 없지만, 헨리의 품에서 빠져나갈 힘이 없는 샐리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그렇지만….”

    언제나 날이 서 있던 헨리의 황금빛 눈동자가 축 처지면서 이전에 볼 수 있었던 늠름함은 온데간데없어졌다. 그 모습에 샐리는 그만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원래라면 날카롭게 벽을 세우며 사리 분별을 해야 하는데, 이제는 그에게 더 이상 예전처럼 냉정하게 구는 것이 힘들어졌다.

    “다음부터는 더 조심하겠소.”

    아까 전 불쾌한 고리대금업자의 존재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던 든든하던 목소리가 이제는 가슴을 콕콕 찌르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변했다. 이런 기교는 또 언제 배운 것인지 제법 능수능란했기에, 샐리는 결국 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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