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48화 (48/111)
  • #48

    “안녕하세요, 헨리 경.”

    괜한 불안이었다는 것이 멀쩡한 모습의 샐리로부터 증명이 되자 헨리는 그제야 안심이 되며 그녀의 곁에 있던 클로에가 눈에 들어왔다.

    “성녀께서 계셨군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또 봐요.”

    이전과는 온도 차가 확연히 느껴지는 인사였다. 클로에야 애초에 샐리에게 호감을 느껴 그렇다고 해도 샐리 역시도 이전과는 달리 겉으로만 친절한 척 연기를 하기보다는 진심으로 관계가 진전된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무슨 일 있었소?”

    “그냥 어쩌다 보니 같이 외출했었어요.”

    “흠, 그랬군. 그대가 보기에 괜찮았나 보지?”

    “뭔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말 그대로 클로에에게는 말로 형용할 수 있는 특이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잠시나마 함께 시간을 보낸 것만으로도 이상할 정도로 경계심이 낮아지면서 마음의 벽이 자연스럽게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경계심은 어느새 호의적인 마음으로 변해있었다. 클로에의 페이스에 이끌려 정신을 차려보니 샐리 본인도 평범한 동성의 친구 관계처럼 편하게 그 시간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특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던데요.”

    “특이하다?”

    이전과는 확연하게 바뀐 평가에 헨리의 동공이 이전보다 커졌다. 분명히 비슷한 말일지라도 말을 하는 샐리의 표정이나 어투에서 그 평가의 의미가 그대로 드러났다.

    다른 무엇보다도 샐리는 자신과 뜻이 같다는 클로에의 말에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보통이면 의심하고 보지만, 클로에에게는 딱히 거짓을 말해 자신을 속일 동기가 없다는 것이 샐리의 생각이었다.

    “어쨌든 이전보다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면 그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거라 봐도 되겠군.”

    “뭐, 그런 셈이죠.”

    성녀의 존재에 대해 먼저 의구심을 표한 것은 샐리였다. 그리고 헨리 역시도 그녀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였기에 썩 달갑지는 않더라도 미래를 위해서 성녀와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는 것에는 찬성했다.

    [2 황자님을 만나보는 건 어때요?]

    아까 식사할 때 넌지시 건넨 클로에의 제안이었다. 저택에서 밝힌 제국을 바꾸고 싶다는 포부와 분명히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 보였다. 제국이라는 것이 바꾸고 싶다는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클로에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수면 아래에서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조만간 2 황자님을 한 번 뵈러 가야겠어요.”

    제국의 온건파 세력과 신진 귀족 세력이 자신들의 구심점으로 2 황자를 잡았다는 소문이 서서히 돌고 있었다. 그동안 조용하던 2 황자가 전면에 나서는 것이라는 기대감과 우려에 황궁 안에서도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고, 그것은 황궁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헨리가 체감할 수 있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소.”

    헨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샐리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것보다 내셔스 백작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읽어보겠소?”

    내셔스 백작이라면 마탑과의 연결고리가 있는 인물로 지난번 헨리가 샐리가 먹던 묘한 약의 성분을 의뢰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편지가 왔다는 것은 마탑으로부터 그 약이 어떤 약인지 분석이 끝나 그 결과가 나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게 정말이에요?”

    빠르게 편지를 속독한 샐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헨리를 쳐다보았다.

    편지의 내용은 그리 긴 사족이 없는 담백한 문장들이 담겨 있었다. 그런 담백한 문체에 어울리지 않는 충격적인 내용들에 샐리와 헨리는 놀랐을 뿐이었다.

    ‘나한테 그런 힘이 있다고?’

    여신의 계시를 받기야 했지만, 자신이 어릴 때부터 섭취했던 약의 정체가 강대한 마력을 억제하기 위해 특수 제작된 것이라는 사실에 제법 큰 충격에 휩싸였다.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에 대한 거대한 비밀은 확실히 이것이 현실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 약을 예전에 제작했다는 마법사가 그대를 직접 보고 싶다고 하던데 괜찮겠소?”

    “음….”

    샐리는 머리가 멍해져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 약을 꾸준히 먹게 된 배경에는 자신의 어머니가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비밀스러운 힘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거기서 시작된 혼란스러움에 샐리는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마법사를 만나면 그대가 궁금해 하는 것들을 모두 풀어낼 수 있을 것이오. 나도 함께 갈 터이니 마음을 다잡으시오.”

    “아, 고마워요.”

    헨리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자 샐리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어차피 여기서 고민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헨리의 말대로 의문스러운 구석이 있다면 그 의문을 풀어줄 이를 찾아가면 될 문제였다.

    “스테판 공작님 되십니까?”

    복잡해진 감정을 헨리 덕분에 추스르고 함께 저택으로 들어가려던 샐리의 발걸음은 금세 식은 그녀의 속을 뒤집어놓을 인물의 등장과 함께 멈춰버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는 목소리.

    그러나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기운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뒤를 돌아본 그녀의 앞에는 한 나이 많은 남자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서 있었다.

    ***

    “이거 귀하신 분의 시간을 뺏게 돼서 참으로 죄송합니다.”

    남자는 실실 웃으며 샐리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목소리에서부터 기분 나쁜 기운을 느낀 샐리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으며 코트의 안주머니를 뒤지고 있는 의문의 남자한테서 떨어지기 위해 한 걸음 물러나며 헨리의 뒤에 숨었다.

    딱 봐도 정체를 모를 한량임이 틀림없었는데, 코트 안주머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레너드의 의뢰를 받아 자신을 덮치기 위해 대놓고 접근하는 것일 수도 있었으니 샐리의 이런 민감한 반응도 당연한 부분이었다.

    “그대는 누구지?”

    다소 불편하면서도 이 낯선 남자를 무서워하는 기색을 샐리에게서 느낀 헨리가 남자의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것이 허튼짓하면 곧바로 어디가 됐든 반항조차 못 하는 몸으로 만들어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다소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하하하, 이거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나타난 모양이군요.”

    “내 질문 못 들었나?”

    남자는 험악해진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너스레를 떨며 농담을 던졌으나 헨리에게는 그런 것이 통할 리가 없었다.

    다른 것보다 샐리를 직접 지정하여 접근한 것이니 헨리의 입장에서 이 남자를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그제야 자신보다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남자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껴서인지 의문의 남성은 안주머니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건넸다.

    혹시라도 날카로운 빛이 보일 경우를 대비하여 언제든 주먹을 날릴 준비가 되어있던 헨리의 입장에서는 다소 김이 샐 수도 있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명함에 적혀있는 남자의 정체에 잠시 풀렸던 긴장감이 다시 고조되기 시작했다.

    “고리대금업자? 고리대금업자가 내 부인을 왜 찾아온 거지?”

    눈앞의 남자를 그저 공작가를 지키는 기사 정도로 생각했던 남자의 눈에 그제야 헨리의 황금빛 눈동자가 들어왔다.

    ‘이거 잘못 걸린 것 같은데.’

    남자는 고리대금업자로서 수도의 소식에는 언제나 귀를 기울였다. 언제나 몰락하는 귀족의 이야기가 들려오면 그 자리에 파고들며 이득을 취하는 것이 그의 직업이었으니 말이다.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돈 냄새를 맡기 위해서는 언제나 정보의 흐름에 충실해야 했다.

    그 때문에 이 남자도 샐리와 헨리의 연애 소식에 대해서는 신문을 통해 접했었다. 물론 이런 낭만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그는 이런 이야기에 사람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귀족들의 사랑 이야기에는 언제나 숨겨진 진실이 있는 법이었다. 그의 경험상 언제나 그래왔고, 특히나 헨리 크리스토퍼라는 남자는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는 인간이었다.

    “이거 그 유명한 헨리 경을 몰라 뵐 뻔했군요.”

    그렇기에 이렇게 여인을 위해 눈동자가 뜨겁게 타오르는 남자가 헨리 크리스토퍼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또 나를 무시하는군. 난 분명 그대에게 질문을 던졌어. 그리고 그 대답 여하에 따라 내 행동이 결정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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