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친한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름을 부르며 서로의 친분을 과시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샐리는 이런 제안을 하면서도 아직까지 쑥스러워하는 모습에서 느껴진 가시감의 정체를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누군가로부터 느꼈던 경험이 있었다.
‘그 사람이었구나.’
옷차림새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샐리의 목에는 그날 헨리가 걸어준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니 샐리 역시도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단순히 그가 목걸이를 걸어줄 때의 설렘만으로도 심장을 떨리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문제는 그다음에 이어진 두 사람의 진한 키스였다.
“흠, 흠.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아요.”
솔직히 대놓고 이름을 부르기에는 아직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서로가 만나는 데 있어서 합당한 명분을 만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만날 수 있을 만한 위치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설령 두 사람에게 다른 의도가 없더라도 그것을 보는 사람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가 있었다. 지금이야 몰래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계속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음에 올 때는 공식적으로 방문할게요.”
“굳이 이런 핑계를 만들 생각이었다면 오늘도 몰래 나오실 필요는 없었을 것 같은데.”
“그냥 오늘은 제 변덕 때문에 이렇게 한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 안 그랬다면 이런 식당에 오는 건 꿈도 못 꿨을 테니까요.”
“하긴 그렇기도 하네요.”
샐리는 다시 한 번 클로에가 참 특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택에서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성력을 사용할 때와는 분위기가 확연하게 달랐다. 그때 느꼈던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느껴질 정도의 압도적인 분위기는 지금 눈앞에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며 애처롭게 웃는 그녀와 맞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 우리 음식이 나오나 봐요.”
클로에의 말에 샐리 역시도 눈을 돌렸고,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헤헤, 맛있겠다. 그렇죠?”
“제가 사는 거니까 마음껏 드세요.”
“샐리가요?”
휘둥그레진 눈으로 샐리를 바라보는 클로에의 입이 친근하다는 듯 부르는 이름으로부터 느껴지는 낯간지러움. 정작 이름을 부른 클로에도 마치 좋아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 부끄러워하는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갚아야 할 은혜가 있으니까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녀의 눈망울로부터 샐리는 겨우 중심을 잡고 말을 이어 나갔다. 애초에 샐리의 목적은 성녀의 존재에서 느껴지는 위화감과 더불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클로에의 존재가 필요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아까부터 이상하게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마음속에 품은 흑심을 잊고,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장단에 맞춰 의도하지 않은 편안한 얼굴이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
“안녕?”
샐리와 클로에 두 사람이 들어간 뒤로부터 식당의 입구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한 남자는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날카로운 검과 그에 상반되는 즐거운 목소리에 그 자리에서 몸이 굳었다.
“누구야.”
“쉬잇! 질문은 나만 할 테니까 그쪽은 대답만 잘하면 돼.”
1 황자의 명령에 따라 성녀인 클로에의 동향을 살피고 있던 감시자는 어느 틈에 뒤를 잡은 건지도 모를 실력자의 존재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것은 상대방을 방심시키기 위한 연기였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다 이내 품에 숨겨둔 단검을 찾아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순간.
“아니다. 어차피 이런 걸 붙일 사람도 한 사람 밖에 없으니까 뭐 물어볼 것도 없을 것 같네.”
단검을 찾고 있는 남자의 의도를 알기라도 한 것인지 목을 겨누고 있던 날카로운 칼날이 순식간에 남자의 목을 그었다. 그리고 능숙한 손길로 상처 부위를 짓누르며 근처에 있는 하수도 구멍으로 그 시체를 떨어뜨렸다.
“클로에는?”
또 황궁 내 어딘가를 서성이다 낮잠이나 자다 나타난 제이스는 클로에의 전담 하녀인 소리아와 마주치자 클로에의 행방을 물었다. 언제나 혼자 움직이는 일이 없었고, 특히나 밖을 나갈 때면 항상 함께했었기 때문에 황궁 내에서 별다른 일정이 없었던 클로에가 방에 없으니 행방이 궁금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성녀님께서는 스테판 공작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스테판 공작을? 언제?”
“네? 함께 점심 식사를 하신다고 나가셨는데, 따로 말씀이 없으셨나요?”
소리아 역시도 클로에의 외출 소식을 제이스가 모른다고 하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클로에 스스로도 제이스에게 따로 이야기한 뒤 나간다고 언질을 줬고, 언제나 그래왔으니 말이다.
“아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네.”
성녀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것은 결국에는 전담 하녀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금세 사색이 될 것처럼 당황한 하녀를 바라보는 제이스는 그녀를 배려하여 거짓말을 하며 이제야 기억이 난 척 연기를 선보였다.
멋쩍은 미소와 함께 머리를 긁적이는 것에서 소리아는 그제야 안심을 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자리를 떴다.
“말괄량이 공주님께서 어딜 가셨을까.”
언제나 그랬듯 제이스는 감각을 끌어올리며 곧바로 직감이 가리키는 장소를 떠올렸다.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것처럼 언제나 이러한 방식으로 향한 장소에는 클로에가 언제나 있었다.
“왠지 신나서 내가 지난번에 소개해준 식당으로 갔을 거 같은데.”
황궁 안에 갇혀있는 것을 답답해하는 클로에를 위하여 제이스는 그녀를 데리고 종종 황궁 밖으로 마실을 나가곤 했다. 그리고 그의 직감은 마지막에 나갔을 때 그녀에게 소개해줬던 식당에 두 사람이 있을 것 같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
“흐음, 이렇게 되면 더 경계를 살 것 같은데.”
누가 봐도 1 황자의 감시역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런 감시역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다고 한다면 분명히 상대방의 경계심이 올라갈 터였다. 하지만 제이스는 혹시라도 클로에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는 존재를 언제나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특히나 그 뒤에 거대한 세력이 있다고 한다면 오히려 일종의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돌아가면 일러둬야겠군.”
제이스의 일과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위험 요소를 발견하고 난 뒤에 클로에를 내버려 두고 돌아가는 것은 그의 사전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제이스는 시체를 처리한 뒤에 이제 막 식사를 끝내고 나오는 클로에와 샐리의 뒤를 조심스럽게 밟으며 두 사람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
“오늘 참 즐거웠어요.”
단순히 식사만 하고 끝날 줄 알았던 일정은 때마침 식당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분수대에서의 공연에 사로잡힌 클로에 덕분에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나서야 저택에 돌아올 수 있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샐리는 지친 기색을 애써 숨기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몇 날 며칠을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며 업무를 보던 강철과도 같던 체력은 클로에와 함께하는 시간만으로 이미 바닥이 난 뒤였다.
그녀의 높은 활력의 분위기는 사람을 이끄는 동시에 지치게 만들었다.
“그렇게 말해주셔서 고마워요. 조금 제멋대로 군 거 같아서 신경 쓰였거든요.”
확실히 분수대에서의 공원에서 그치지 않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한 것이 힘들었던 것은 맞지만, 샐리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었다. 신기할 정도로 취향이 맞는 것에서 공감대가 쌓이면서 동 나이대의 같은 성별을 가진 친구와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샐리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희귀한 감정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 좋았고, 그 분위기에 샐리 역시도 어쩔 수 없이 휩쓸리며 원래 가지고 있던 검은 목적도 어느 샌가 깨끗하게 씻겨 나간 지 오래였다.
“싫은 건 싫다고 말하는 성격이에요. 저도 정말로 재밌었어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서 어쩐지 애틋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애틋함은 서로의 과거에서 시작된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합쳐진 공감대에서 싹튼 묘한 감정이었다.
“샐리? 어째서 여기 나와 있는 것이오.”
“어? 일찍 오셨네요?”
헨리 역시도 제이스와 마찬가지로 왠지 모르게 좋지 않은 예감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보다 못한 주안이 헨리에게 그렇게 걱정이 되면 일찍 퇴근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헨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한달음에 저택으로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