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44화 (44/111)
  • #44

    “후우, 하아.”

    확실히 새벽의 공기는 다른 시간대와는 결이 다른 상쾌한 느낌이 있었다. 코를 통해서 폐를 훑고 지나가는 깨끗한 공기는 맛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 전환에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없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새벽 산책을 좋아하나?”

    “좋아해요. 특히 오늘처럼 달이 예쁜 날에는 특히.”

    샐리는 새벽의 어둠을 걷어내며 밝게 빛나는 둥근 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헨리와 나란히 걸으면서 몸 상태가 이렇게까지 좋아질 수 있었던 자초지종에 대해서 들었다. 성녀 클로에의 도움이 없었다면 목숨까지도 위험했을 수 있는 아찔한 상황까지 갔었던 터라 그녀가 준 도움에 있어서 몇 번의 고마움을 표해도 모자랄 정도였다.

    덕분에 이렇게 맑은 공기를 마시며 새벽이 주는 감성에 취하는 여유를 부릴 수가 있었다.

    “앞으로 매일 방문한다고 했었나요?”

    “그렇소. 그대에게 어지간히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이던데.”

    “그러니까요. 만나면 자세한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어요.”

    꿈속에서 여신과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리자 샐리 역시도 이제는 슬슬 클로에와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여신이 직접 가까이 지내라고 언급할 정도면 무언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또한 그녀가 언급했던 위협이란 것이 도대체 뭘까 궁금하기도 했다.

    샐리는 나름대로 추측을 해봤지만, 과연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몰아낼 정도로 큰 위협이 무엇일지 당장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은 먼 미래를 생각하기보다 당장 하루하루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에 집중해야 할 시기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대의 몸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면 분명히 자연스러운 느낌은 아니오.”

    “맞아요. 이렇게 급격하게 안 좋아지는 것도 이상하고, 그 이외에 미심쩍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 합리적인 추론이 가능했다.

    단기간에 이런 몸 상태가 만들어지는 경우의 수는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바로 독이었다.

    저택 내부의 사용인들이야 헨리와 함께 엄격하게 구분하여 데리고 온 자원들이니 안심이 되었다. 그렇다면 원인은 외부에 있다는 것인데, 이런 짓을 저지를만한 인물은 샐리의 머릿속에 단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레너드 스테판.

    악의를 가지고 이런 일까지 저지를 사람은 레너드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레너드 혼자 힘으로 이 정도로 치명적인 상황을 발생시켰을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한때 그대의 오라비였던 것이 벌인 일 같은데.”

    헨리의 표현에 샐리는 웃음이 나왔다. 거의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것이 샐리가 원하는 방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의해요. 하지만 분명 혼자 힘으로 벌인 짓은 아닐 거예요.”

    샐리의 말처럼 레너드는 분명히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생각대로 앙심을 품은 채 샐리를 죽이고, 원래 본인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공작가를 다시 차지하고자 하는 상상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아있는 힘이 없었다.

    평판, 권력, 인맥.

    이중 하나라도 갖춘 것이 없는 인간이 혼자 힘으로 자신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샐리는 과연 그의 계획을 도와주면서 자신에게 치명타를 날린 세력이 누구일지가 더 경계 되는 부분이었다.

    “레너드가 수도에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그대의 정보원에게 수시로 연락이 왔었소.”

    “제가 독에 당했다는 것도 알고 있나요?”

    “아직은 모르는 것 같소.”

    “그렇군요.”

    수도의 어두운 골목들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인간의 어두운 본성들에 샐리는 레너드의 뒤를 봐준 이들이 수도에 있는 어둠의 길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헨리 역시도 샐리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가 몰랐던 수도의 어두운 이면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의 머릿속에서도 수도에 있는 어두운 세력들이 이번 일에 가담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조금 더 조심하는 것이 좋겠소.”

    “그러게요. 일단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건들에 대해서는 더 주의를 기울여야 될 것 같아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부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외부에서 들어올 수 있는 위협에 대해 너무 간과했다는 것에 샐리는 스스로 조금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제는 샐리에게 있어서 내부의 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헨리를 필두로 한 기사단은 그들이 오랜 시간 서로의 목숨을 걸고 살아온 만큼 이미 함부로 논할 수 없을 정도의 깊고 두터운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부단장인 야닉과 주안 두 사람과 헨리의 사이는 특히나 애틋해 보였다.

    그리고 공작가의 경우에도 충직한 하녀장인 메리를 필두로 완벽하게 장악한 지 오래였다.

    이제는 눈을 외부로 돌려 더 넓게 볼 필요가 있었다.

    이제 샐리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아직 자신에 대한 분노가 풀리지 않은 레너드와 앞으로 그녀가 나아가야 하는 데 방해가 될 황궁 내에서의 세력이었다.

    “심각한 와중에 좀 다른 이야기를 해도 되겠소?”

    “뭔데요?”

    샐리는 다른 것보다 이대로 그냥 내버려두면 더 귀찮아질 것 같은 레너드를 우선적으로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러다 그 의식의 흐름을 깨는 헨리의 물음에 번뜩 정신을 차린 뒤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결혼식에 대해 생각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하오.”

    “그러게요. 작위를 받기는 했지만, 그 전제는 우리 둘이 부부의 관계를 맺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니까요.”

    “그래서 조만간 식을 올리면 어떨까 생각 중이오. 그냥 더 늦기 전에 빨리 올리는 것이 어떨까 싶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더 끌어봤자 좋을 것도 없으니까요. 이제 공작가도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서 딱 적절한 시기 같아요.”

    샐리는 동의하면서도 단순히 이런 이야기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괜히 눈치를 봤다. 쉽사리 말을 더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헨리를 보고 과연 그가 무슨 이야기를 더 꺼낼지 궁금했다.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이토록 비장한 표정까지는 필요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는 그대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허락해 줄 수 있겠소?”

    그 말에 샐리는 눈이 휘둥그레져 헨리를 쳐다봤다.

    이름이라니.

    그의 잔잔한 중저음의 목소리에 자신의 이름이 담긴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떨렸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 소리에 새벽의 달을 받던 그녀의 새하얀 피부에 불그스름한 톤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리 서로의 호칭을 제대로 정리해야 하지 않겠소.”

    “맞는 말이죠.”

    “남편인데 그대에게 깍듯하게 공작이라는 딱딱한 호칭을 쓰는 것은 이상하지 않소.”

    “그것도 맞는 말이에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허락을 하면 될 일이었다. 굳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귓가에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음에도 말이다.

    “부끄러우면 내가 먼저 시작하겠소.”

    “그래요.”

    샐리는 방금 자신이 팔짱을 왜 낀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도하게 보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름을 부르는 것이 부끄럽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은 것일까.

    “샐리 스테판 그대여. 내 평생의 반려가 되어주겠소?”

    그러나 헨리의 그다음 행동을 본 샐리는 팔에 힘이 풀려 끼고 있던 팔짱이 풀려버렸다.

    헨리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쉰 다음에 주머니를 뒤져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상자가 열리자 그곳에는 딱 봐도 값이 꽤나 나갈 것 같은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헨리는 그 목걸이를 샐리에게 바친다는 듯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뒤 그윽한 눈으로 샐리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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