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카넬로 아스트리아.”
“카넬로 아스트리아?”
정체불명의 여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 이름을 읊었다. 그녀의 입에 올라온 이름을 듣자마자 샐리의 눈의 동공이 놀라움에 크게 확대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이름은 여신의 축복을 받은 이곳 대륙에 사는 이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당신이 여신이라도 된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널 이런 공간에 불러낼 수 있었겠니.”
엄마가 생각나는 포근하면서도 사근사근한 목소리는 여신이라고 생각했을 때 잘 어울리기는 했다. 그러나 샐리는 어째서 이런 고귀한 신적인 존재가 자신을 따로 불러낸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절 이곳으로 부른 거죠?”
“원래는 더 예전에 만날 수도 있었단다. 넌 나의 선택을 받은 존재로 인간계를 안정화시킨 선대 영웅들의 피가 흐르는 우리의 자손이지.”
난데없이 들이닥친 너무나도 큰 배경에 샐리는 멍해지고 말았다. 심지어 그 탓에 이야기에 제대로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자신을 여신이라고 밝힌 이의 힘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에 샐리는 이전보다 훨씬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당황스럽겠지만, 내가 하는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단다.”
“여신님께서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저한테 그런 출생의 배경이 있다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요.”
“글쎄, 너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요.”
여전히 불신에 찬 샐리의 앞에 갑작스럽게 닥친 밝은 빛. 안 그래도 새하얀 공간 안에서 비추는 빛이라 더욱 눈이 부셔서인지 샐리는 조그맣게 실눈조차 뜨지 못한 채 빛을 피하고자 손으로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빛이 수그러들었음이 느껴지고 나서 눈을 뜨자 불신을 완전히 없애주겠다는 듯 여신은 모습을 드러낸 채 공중에 떠 자상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현재 세계에는 여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다양한 그림과 벽화들이 있었다. 그것들에는 언제나 여신의 모습이 인간과 비슷한 형상으로 그려졌다. 아무래도 인간에게 축복을 내려줬다는 전제하에 우리 인간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린 그림들 같았다.
그러나 샐리의 눈앞에 나타난 여신은 지금까지 사람들이 상상해왔던 것과는 거리가 먼 형상이었다.
아예 인간과 동떨어진 형체는 아니었지만, 사람의 겉면이 살로 덮여있다면 지금 보이는 여신은 청록색의 보석으로 몸이 완전히 덮여있었다. 그것도 인간의 피부처럼 매끈하게 가꾸어져 있어서 그런지 더 특이하게 보였다.
뭔가 사람과 동물 사이 어딘가 위치해 있는 듯한 형상의 여신은 눈에서는 아까 밝게 빛났던 새하얀 빛이 계속해서 빛나고 있었다.
다소 기괴한 모습은 그 존재가 평범한 인간과는 아득히 동떨어진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신의 모습은 처음 보지?”
“볼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보니 뭐랄까 신기하기도 하면서도 저희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란 게 체감이 되니까 좀 무섭기도 하네요.”
가식 따위 없는 솔직한 감상에 카넬로는 재밌다는 듯이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너는 분명히 네가 특별한 존재란 걸 깨달았던 때가 있었을 거야.”
확신에 찬 말에 샐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여신이 한 말이 무엇을 뜻했던 것인지 어린 시절 괴한에게 칼을 맞았던 때가 떠오르자 이해할 수 있었다.
“기억이 난 모양이네.”
잊을 수 없는 기억.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머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굴러가는 속도가 느리다 보니 그 충격적인 사건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페드로와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된 날 만들어진 비밀이 사실은 여신의 힘이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런 기적을 만들 수 있는 힘은 이 세상에 여신의 존재밖에 생각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샐리와 페드로 두 사람은 이 경이롭고 두려운 힘을 그저 믿기 어려운 확률로 발생한 기적이라고 치부하고 비밀에 부쳤다.
“그런데 선택받은 존재 이야기는 뭐예요? 제 어머니는 그런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요.”
“영웅의 피는 세대를 거칠수록 옅어질 때도 있는 법이지. 그러니 혼란스러워하지 마렴. 네가 경험했던 기적과도 같은 힘과 네 눈앞에 내 존재가 그 증거란다.”
“그럼 성녀는요?”
샐리가 알고 있는 한 여신에게 선택받아 여신의 힘을 쓰고 있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녀 클로에. 어느 날 갑자기 제국에 등장한 말 그대로 여신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 아이 역시 나에게 선택을 받은 것이지.”
“선택의 기준이 뭔데요.”
“아무래도 많이 혼란스러운가 보구나.”
“맞아요. 갑자기 나타나셔서 한 번에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를 하시니까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얼떨떨해요.”
언제나 냉정하면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샐리도 이런 보고 들어도 믿기지 않는 상황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웠다. 더군다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무언가 해결되어 후련하다는 느낌보다는 계속해서 과제가 쌓이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그리 복잡한 과정은 없단다. 그저 내 주관적인 판단으로 만드는 것인지. 너의 경우에는 네가 품고 있는 그 원대한 꿈이 인간계를 더욱 발전시키리라 생각해서란다. 이래 보여도 여신이라 미래를 보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거든.”
“그 말씀은 제 미래에 대해 아신다는 건가요?”
“그럼, 네 곁에서 평생 널 지켜줄 반려는 만나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여신은 여전히 감정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거대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면 그녀는 역시 초월체가 확실했다.
“그렇다면 저한테 내재된 힘이 뭔지 말씀해주세요.”
“후후, 그건 차근차근 알아가도록 하렴. 그것은 네 미래의 인연과 관련된 것이라 함부로 알려줄 수가 없단다.”
막상 불러내 놓고 정말로 중요한 알맹이는 없는 이야기에 샐리는 심기가 조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성녀의 힘 덕분에 네 안에 내재된 힘도 반응하게 되어서 너와 만날 수가 있었단다. 그리고 오늘 널 부른 이유는 그저 네 앞날을 응원하면서도 속에 품고 있는 잠재력을 깨닫게 해주고자 왔단다. 앞으로 마주할 일들 앞에서 다른 길로 새지 않고 앞으로 나가렴.”
“잠깐만요. 아직 할 말 다 안 끝났어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나자꾸나. 아, 그 아이와 친하게 지내렴. 너희 둘이 힘을 합쳐야 미래에 닥칠 큰 위협을 막을 수 있단다.”
그 말을 끝으로 여신의 모습과 함께 백색의 공간이 서서히 사라지며 주위는 완전한 어둠으로 뒤덮였다.
***
“으음.”
“이제 정신이 드는 것이오?”
처음 쓰러질 때만 해도 다시 뜨기도 힘들 정도로 무거웠던 눈꺼풀이 가볍게 올라갔다. 이내 흐리던 눈의 초점이 맞춰지자 샐리는 충혈된 눈으로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웃음기를 띄고 있는 헨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거 보니까 시간이 꽤 늦은 거 같네요.”
“늦은 새벽이니 피곤하다면 더 자는 것이 어떻겠소.”
“푹 잤더니 개운해진 것 같아요.”
단순히 잠을 잘 잔 것만으로 나아질 상태가 아니었지만, 자세한 이야기 보다 아까 여신이 해줬던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곁을 지켜줄 평생의 반려.
이 짧은 문장이 지칭하는 대상은 분명 헨리임에 틀림없었다.
운명적인 상대라는 이야기를 신에게 직접 듣고 눈을 떠보니 새벽까지도 잠을 자기는커녕 충혈된 눈으로 추측할 수 있는 그의 눈물은 샐리에게 분명한 감동을 선사했다.
“당신은 안 졸려요?”
“난 괜찮소.”
“그럼 같이 새벽 공기라도 마시면서 산책하러 나갈래요? 너무 오래 누워있어서 그런지 몸이 좀 찌뿌둥한데.”
웬만하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는 했지만, 새벽의 달빛이 비추면서 더 초롱초롱하게 보이는 샐리의 푸른 눈동자를 보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대신 아주 잠깐만이오.”
헨리는 샐리와 새끼손가락을 거는 약속을 받아낸 뒤에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축하여 일으켜줬다. 샐리는 기꺼이 그의 힘에 기대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그가 주는 힘보다도 더 헨리에게 기대는 어리광을 부리며 함께 저택의 정원으로 나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