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편안한 얼굴로 잠에 빠져있는 샐리에게 다가간 헨리는 침대에 내려놓을 때보다 더 세심하게 신경 쓰며 그녀를 들어 올렸다. 행여나 잠에서 깨지는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며 안고 있는 모양새가 마치 새끼 고양이를 보고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헨리가 샐리를 데리고 나가자마자 제이스는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클로에를 다그쳤다.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왜. 너 저 여자랑 뭐 때문에 그렇게 친해지고 싶은 건데.”
“그냥 느낌이 좋아서 그런 거야.”
“느낌이 좋다고? 지금 그걸 제대로 된 이유라고 나한테 말하는 거야?”
클로에는 제이스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자신을 다그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본 샐리의 아름다운 빛은 사람을 순식간에 홀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아름답게 빛났다.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포근한 느낌까지 드는 빛에 이끌리는 것은 성녀의 힘이 각성하게 된 이후로 클로에에게는 당연시되는 행동과 마찬가지였다.
“왜 그렇게 화내는 거야?”
“화내는 거 아니야.”
“내고 있잖아.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알면서도 내가 든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닌 제이스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둘 사이에 절대 끊을 수 없을 것처럼 연결되어있던 신뢰의 끈이 끊기기 일보 직전의 상태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당연히 클로에는 몹시 서운하다는 듯 제이스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고, 제이스는 그런 클로에를 보며 본인이 한 실수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다.
“미안. 내가 괜히 흥분한 것 같아.”
현재와 과거는 달랐다. 환경부터 시작에서 모든 것이 말이다.
예전에는 별생각 없이 진전될 수 있는 관계도 이제는 돌다리를 두드려보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그 점을 인지하면서 궁에서의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는 클로에였지만, 답답하기만 생활 속에서 참는 데에도 한계는 존재하는 법이었다.
“아니야, 걱정하는 부분은 나도 잘 아는 거니까.”
제이스가 어떤 부분에서 자신을 다그치는지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은 그냥 참고 넘어가기가 싫었다.
“그래도 나 서운해.”
클로에는 여전히 제이스가 방안에 들어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많이 서운했어?”
제이스 본인도 감정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려 노력하고 있는 클로에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제이스는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고개를 돌려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한 뒤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직도 화 안 풀렸어?”
클로에가 아직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제이스는 당연히 화가 풀렸겠거니 하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클로에는 그런 여유로움이 괜히 마음에 안 들어 더 토라진 척을 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입술을 순식간에 덮친 그의 입술에 그럴 수가 없었다.
“다른 건 없어. 나한테는 클로에 네가 가장 소중해. 방금 짜증을 낸 건 미안하지만, 정말로 걱정되어서 그런 거야.”
“나도 알아.”
“착하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클로에는 마치 강아지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미 예전부터 이런 부분에 있어 조련이 완료된 뒤라 그의 기분 좋은 손길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1 황자가 우리 쪽을 주시하기 시작했어.”
1 황자 오언 크리스토퍼.
황제의 자리에 대한 욕심을 노골적으로 숨기지 않고 있는 인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황궁에서 지내기 시작한 두 사람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세력이 어느 정도 쇄신되었다고 생각하는 그가 이제는 서서히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목표는 현재 제국을 이끌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인물인 성녀였다.
1 황자는 아직 황제의 상태에 대해 완벽히 알지 못했다. 다만 성녀의 동태를 살피면서 의구심을 가진 채 추측을 할 뿐이었다.
“아직 정무회의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어. 네가 본 대로 샐리 스테판은 제국을 움직일 중요한 인물이야. 하지만 그녀가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니 신중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그녀는 우리의 큰 힘이 될 거야. 난 확신할 수 있어.”
성녀와 같은 능력이 없는 제이스는 클로에가 본 것이 무엇인지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곧 결과가 나올 거야. 그에 따라 움직임을 조심하게 할 필요가 있어.”
그래서 제이스는 레너드의 의뢰를 받은 것이었다. 대충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그가 쓴 독약이 발현되기 시작하는 시기를 오늘로 맞출 만큼 치밀하게 계획하며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고 있었다.
제이스는 클로에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언제나 정확했던 그녀의 눈을 경계하여 혹시나 샐리가 자신들과 반대편에 설 경우 골치 아파질 것을 대비하여 마련해놓은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해독제는 굳이 필요 없겠군.’
회의 결과가 본인들에게 긍정적으로 나올 경우를 대비해서 준비해놓은 해독제였지만, 클로에의 개입으로 쓸 일이 없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부하들까지도 준비해놓았는데, 아까의 일로 헨리의 경계를 얻었으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무슨 생각해?”
“아, 별거 아니야.”
길드의 부하들에게 괜한 짓 하지 말라고 연락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클로에는 제이스가 상념에 잠겨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고 보니 왜 한 번에 치료해주지 않은 거야?”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심각하셨거든. 그리고 여기서 한 번에 치료하면 공작가에 방문할 수 있는 명분이 없어지잖아.”
“이야, 이제 머리도 쓸 줄 아네.”
“나 원래 머리 잘 쓰거든.”
클로에는 자신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으며 농담을 던지는 제이스를 짜증난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제이스는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클로에가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계속해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장난을 쳤다.
“드디어 너와 닿을 수 있게 되었구나.”
눈을 뜨자 샐리는 영문도 모를 새하얀 방안에 갇혀있었다. 문이고 창문이고 아무것도 없는 말 그대로 하얀 벽과 바닥만이 존재하는 공간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머릿속에 울리는 여자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위를 바라보니 끝도 모를 어둠만이 보였다. 지금 자신은 방금 머릿속을 울린 목소리에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샐리는 혹시 본인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하고 볼을 꼬집어 봤는데, 세게 꼬집은 볼이 얼얼해져 오자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인지할 수 있었다.
“여긴 대체 어디야? 당신은 누구지?”
샐리는 당황스러움에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진정시킨 뒤 자신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은 자신이 헨리의 품으로 쓰러졌던 것과 그에게 안겨있는 상태에서 피를 토해냈던 것이었다. 도대체 그 상황으로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인지 알 영문이 없어 답답했다.
애초에 이런 특이한 공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기지가 않았다.
“혼란스러워할 필요 없단다. 이곳은 너와 나의 의식의 접점. 너를 온전히 이 공간으로 초대하기 위해 너의 성스러운 혼을 실체화한 것이란다.”
이윽고 다시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는 제법 친절한 말투로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샐리는 아직까지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방금 세게 꼬집었던 감각이 남아있는 볼과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는 그녀가 현재 직면한 상황을 거부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샐리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던 지금의 초대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아 경계심이 가득해진 제법 날카로운 목소리로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