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41화 (41/111)

#41

‘기가 혼탁해졌어.’

처음 봤을 때의 영롱한 빛의 파동이 수그러들다 못해 색이 많이 탁해졌다. 보통 일반적으로 아픈 환자들의 경우 빛이 수그러드는 것으로 증상이 확인되었지만, 이토록 빛이 혼탁해지는 것은 당장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급박한 상황이 찾아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콜록, 콜록!”

그때 들려온 기침 소리와 함께 샐리의 입에서는 각혈이 뿜어져 나왔다.

“어.”

처음에는 단순한 기침으로 침이 튀었다는 생각을 한 샐리는 자신의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가 피라는 것을 깨닫고 눈의 동공이 크게 뜨였다.

“이게 무슨….”

패닉에 빠진 것은 샐리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당사자가 가장 당황스러울 수는 있어도 그녀를 품에 안고 있던 헨리는 샐리가 피를 토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곧바로 얼어붙었다.

“일단 이걸로 닦으세요.”

클로에는 헨리에게 재빨리 손수건을 건넸다. 헨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클로에가 건넨 손수건을 받아들고 샐리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그런 와중에 샐리는 자신의 상태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안겨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 방으로 오세요.”

클로에는 뒤로 돌아 자신을 따르던 하녀들에게 이 일을 함구하라고 명한 뒤 헨리에게 일단 자신의 방으로 가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제안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심정으로 헨리는 클로에의 제안을 받아들여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계속해서 샐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

“공작님을 여기 눕히세요.”

헨리는 클로에가 가리킨 침대에 조심스럽게 샐리를 눕혔다.

“이 일은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왜 그런지는 말하지 않아도 아시죠?”

클로에의 힘은 황제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사용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에 반발하는 귀족들도 있었으나 결국 황제의 권위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고, 황제는 아예 공식적인 법으로까지 그 사항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특히나 다른 이가 성녀의 힘을 사용할 경우 그 죄는 중죄에 해당되어 거의 반역죄와 마찬가지인 형벌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 성녀에게 청탁하던 몇몇 귀족들이 숙청되고 나서야 성녀는 오로지 황제를 위한 존재로 오늘날까지 자리매김 한 것이었다.

“오늘은 대부분의 인원이 회의장에 몰려있어서 운이 좋았어요.”

황제와 많은 귀족들이 한 장소에 모이게 되면 황궁의 대부분의 인력은 당연히 그 장소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성녀인 클로에가 머무는 궁까지 오는데 마주치는 사람도 없어서 괜히 문제가 될 만한 상황을 모면할 수가 있었다.

“그럼 시작할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클로에는 곧바로 자신의 양손을 샐리의 심장 부근 쪽을 향해 뻗었다. 그런 뒤 한참 눈을 감으면서 집중하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의 양손에 새하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내 점점 커지는 불빛이 샐리의 몸 전체를 휘감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 보는 희귀하면서도 웅장한 광경에 헨리는 넋을 놓고 방 전체를 빛내는 백색의 빛에 함께 젖어 들었다.

밝기는 하지만 신기하게도 눈이 부시거나 하지도 않았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빛은 잠시 동안 샐리의 몸 전체에 일렁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다 끝난 겁니까?”

“급한 불은 껐어요. 아무래도 내장이 꽤 망가진 상태라 단 한 번으로는 안 될 것 같아요.”

“그런 상태 하나하나를 다 알 수 있는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치료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돼요. 가벼운 외상 정도는 이렇게까지 많은 힘이 들지는 않거든요. 이 정도 힘이 들어간 걸 보면 공작님의 상태가 꽤나 위중했다는 것이고요.”

성녀인 클로에가 내린 진단에서 샐리가 오늘 정무회의에 어떻게든 참석하기 위해 어떤 정신력으로 버텼는지 알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그런 정신력이 정말 대단하다 싶다가도, 이렇게까지 무리를 한 걸 보면 언제 또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몰라 걱정되는 부분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

클로에의 말을 곱씹던 도중 헨리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폐하의 상태가 많이 위중하신 겁니까.”

클로에의 말을 들어보면 그녀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전에 비슷한 경험들이 꽤나 있었다는 것인데, 그녀의 힘은 황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쓸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결론은 황제의 지병에 관한 쪽으로 귀결되었다.

“폐하께서 지병을 앓고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니 그렇다 쳐도 말씀대로라면 현재 폐하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것이 아닌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클로에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예전에 있었던 일을 말한 거예요.”

“예전?”

“자세한 건 묻지 말아주세요.”

왠지 더 깊이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특히나 헨리는 이번 일로 클로에에게 큰 빚을 졌다는 생각에 더 이상 파고들지 않고 편안하게 잠들어있는 샐리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 자신의 품에 안겨있을 때까지만 해도 피를 토하며 혼절하던 이가 귀여운 코골이 소리와 함께 편안하게 잠들어있었다. 그 모습에 헨리는 드디어 온몸에 곤두서있던 신경들로부터 힘을 뺄 수 있었다.

제이스가 방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클로에?”

장난기가 솟아 클로에를 놀려주기 위해 여느 때처럼 기척을 숨긴 뒤 몰래 문을 열고 들어온 제이스는 방안에 있는 헨리와 클로에의 침대에 누워있는 샐리를 보고 당황했다.

헨리 역시 아무리 풀려있었다고는 해도 들어올 때까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었기에 처음 보는 젊은 남자를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누구지?”

노크도 없이 들어온 것도 모자라 인기척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운의 남자에게 헨리는 극도의 경계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랜 기간의 단련과 실전경험을 통해 헨리의 감각은 극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순간적으로 기를 놓쳤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제이스 역시 클로에의 방 안에 있는 뜻밖에 인물들에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그렇듯 제이스와 클로에 두 사람 사이에 있어서 가벼운 장난 거리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기척을 지우고 몰래 문을 열어 놀라게 할 생각이었는데, 하필이면 그 자리에 제국 최고의 기사인 헨리 크리스토퍼가 있었다.

게다가 자신을 훑어보는 황금색의 눈동자로부터 느껴지는 경계심에 제이스는 자신이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알았다.

“제 수행원이에요.”

“수행원?”

“그냥 제 황궁에서의 생활을 도와주는 분이에요.”

“그렇군요.”

클로에 역시도 두 사람 사이에 흐르기 시작한 미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현재는 성녀를 곁에 모시는 별 볼 일 없는 수행원 정도의 신분이지만, 그의 진짜 모습을 아는 것은 클로에 본인과 2 황자인 토니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괜한 의심을 사기 전 클로에가 먼저 진화에 나선 것이었다.

“이 이후에는 제가 어떻게 돌봐야 할지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헨리는 여전히 제이스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주안과 야닉과 같이 뛰어난 기사들도 아무리 방심한다고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기척을 놓치는 일을 허용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눈앞에 놓여있기에 헨리도 더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과 샐리에게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클로에에게 곤란함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공작님을 모시고 저택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마음 같아서는 여기에 머무르시면서 계속 제가 가진 힘으로 치료를 해드리면 좋겠지만, 그랬다가는 폐하의 의심을 사기 쉬우니까요.”

“번거롭지 않으시겠습니까.”

“네, 오히려 공작님과 친해지고 싶었는데 저한테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죠.”

이상할 정도로 샐리에 대한 호감을 어필하는 클로에였지만, 성녀인 그녀가 직접 저택에 방문해주겠다고 한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외에 따로 주의할 점은 없습니까.”

“글쎄요. 제가 의사는 아니라서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제가 치료해드릴 테니까 너무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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