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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38화 (38/111)
  • #38

    샐리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패배를 선언하는 헨리를 보며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는 완전히 상반된 풀어진 모습을 보는 것이 재밌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봐요?”

    “그냥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렇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방 쓰러질 것처럼 위태위태하면서도 골골대는 것이 영 보기 좋지 않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계기가 되어 그녀의 안색이 조금은 나아졌다는 것이 헨리에게는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몸이 아프고 나니까 사람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두통의 영향인지 평소 냉정한 판단만을 내리던 샐리는 오늘따라 유독 감정에 치우치고 있었다. 헨리 앞에서 흘린 눈물이 그랬고, 그의 키스가 달콤하게 느껴지다 못해 짧아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대는 평소 너무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오. 가끔은 이렇게 풀어질 때도 있어야지.”

    “당신도 그럴 때가 있나요?”

    “큰 싸움을 치르고 수도로 올라오는 날이면 내일이 없다는 듯이 부하들과 술을 마시곤 하지.”

    “술이요? 흠, 주량이 세신가 봐요.”

    “뭐, 부하들보다 먼저 취한 적은 없소.”

    이미 두 사람은 원래의 목적을 까맣게 잊은 듯 보였다.

    워낙에 하는 일에 있어서 실수라곤 없는 철두철미한 인물 둘이 이렇게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이색적인 광경은 참으로 흔치 않은 일이었다.

    “두 분 모두 어서 나오세요. 이러다 늦겠어요.”

    다행히 두 사람이 잠시 잊고 있던 경각심은 충실한 하녀인 메리 덕분에 다시 챙길 수 있었다. 금방 나온다고 하더니 한참을 기다려도 굳게 닫힌 방문이 열릴 기세가 안 보이니 답답했던 메리는 직접 문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실제로 지금 마차를 타고 가야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어서 그런지 메리는 안에서 여유로운 두 사람과 상반되게 급한 나머지 발까지 동동 구르는 모습이었다.

    “이제 나가봐야겠어요.”

    “그러게 말이오.”

    헨리는 지금처럼 편안한 시간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숨김없이 얼굴에 드러났다.

    하지만 세상을 사는 일이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헨리의 경우 눈앞에 놓여 있는 일들을 헤쳐 오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왔기에 조금은 억울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샐리가 강조한 대로 중요한 자리인데다가 그런 자리에 조금이라도 늦었다가는 어떤 트집이 잡힐지 몰라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

    “흥, 우리 같은 사람들이 먼저 와있는데도 아직 얼굴 하나 비추지도 않는다니.”

    “그러게나 말입니다. 애초에 여자가 이런 신성한 자리에 끼어든다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드는데, 와서 무슨 일을 벌일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군요.”

    정무회의에 참여한다는 샐리의 소식이 전혀 달갑지 않다는 듯 클럭슨 백작은 벌써부터 트집을 잡을 생각에 심통이 나 있었다. 그 옆에 클럭슨 백작보다 젊어 보이는 귀족이 그의 장단에 맞춰 맞장구를 쳤다.

    애초에 이런 분위기는 이 두 사람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는 귀족들과 관료들은 샐리의 존재가 썩 달갑지 않은 모양새였다. 그러나 최근 제국을 주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어린 신진 귀족 세력들은 어서 샐리가 얼굴을 비추기를 기다리면서 기대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스테판 공작께서 드십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헨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샐리가 등장하였다. 며칠을 앓아누웠던 환자가 맞는 것인지 꼿꼿하게 펴져 있는 허리부터 근엄함이 느껴지는 얼굴까지 장내의 분위기는 술렁거리며 긴장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뵙겠소. 스테판 공작.”

    상당히 거만한 태도로 먼저 샐리에게 아는 체를 한 사람은 바로 클럭슨 백작이었다. 평소 소문이 좋지 않은 사람이어서 샐리가 개인적으로 엮이고 싶어 하지 않던 이였는데 이렇게 먼저 말을 거니 받아주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백작 주제에 거드름을 피우는 노친네에게 예의를 알려주고 싶다는 일종의 의욕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머, 반가워요. 클럭슨 백작.”

    애초에 젊은 놈들이 설쳐댄다면서 신진 귀족 세력에 대한 인식부터 좋지 않은 클럭슨 백작에게 샐리가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토록 혐오하는 세력에 의해 제정된 법에 최대의 수혜자로 백작 입장에서는 제정되어서는 안 되는 법에 따라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가 있는 것이 상당히 거슬렸다.

    다른 무엇보다 클럭슨 백작은 공작부인인 아담 스테판과의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황제와 스테판 전 공작을 지지하는 세력 중 하나로 전 공작이 죽은 후 공작부인을 위로하며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도움을 청해도 좋다고 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그렇게 유지한 친분을 통해 레너드가 자연스럽게 작위를 이으면 떨어지는 콩고물을 받아먹으며 새롭게 재편된 귀족 세력의 선두주자로서의 밝은 미래를 그렸다. 그런데 그 계획이 샐리의 등장으로 모두 망가졌다.

    최근 샐리에 의해 영지로 쫓겨난 아담에게 편지를 받으며 샐리가 날뛰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개인적인 부탁도 받은 터였다. 백작은 이 기회에 기선제압을 철저히 할 생각에 공격적인 눈빛으로 샐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물론 백작께서 연로하신 건 알겠으나 그래도 예의를 지켜주세요.”

    “예의? 지금 공작의 입에서 예의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오?”

    샐리의 단호한 태도에 백작은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맞대응했다.

    “난 공작이에요. 당신은 백작이고요. 제국의 규정에 따르면 윗사람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지금처럼 그렇게 백작이 말을 놓을 위치가 아니라고 말하는 거예요.”

    예의 없는 태도에는 그와 똑같이 맞받아치면 될 뿐이었다. 짜증이 난다는 듯 노려보는 눈빛도 길거리 생활을 경험했던 샐리에게는 그다지 큰 위협도 아니었다.

    “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는지. 계집 따위가 이런 신성한 회의장에 온 것도 거슬려 죽겠는데, 꼴에 남자까지 끼고 오다니.”

    “말을 삼가시오, 백작.”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소. 그대같이 싸움 같은 야만적인 행동밖에 할 줄 모르는 기사가 우리 같은 귀족들이 나라의 앞날을 논하는 자리에 끼어있는 것이 정말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생각보다 더 공격적이고 무례한 백작의 행동에 헨리는 당장 뭐라도 부술 것 같이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그러나 샐리는 오히려 편안하게 앉아 마치 백작을 관찰이라도 하듯이 지켜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선제압의 의도가 담겨있다고는 해도 이건 도가 넘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나도 그렇게 느끼고 있소.”

    기분이 나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늙은 귀족이 귀족사회의 암묵적인 규정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리 본인보다 어리다고 해도 샐리는 공작이었다. 그것도 제국이 탄생하는데 있어서 최고의 공을 세운 가문 중 하나인 스테판 가문의 공작이었다.

    뒤에서 험한 이야기를 하는 건 그렇다 쳐도 마치 자신의 도발에 흥분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수위를 높이는 게 빤히 보였다.

    “그냥 말을 더 섞지 않는 것이 좋아 보이는데.”

    “동의해요. 굳이 저런 도발을 받아줄 필요는 없죠.”

    마치 먹이를 노리는 능구렁이가 자신들을 노려보는 백작에게서 보이기 시작하니 두 사람은 더는 백작과 말을 섞지 않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타이밍이 좋게 본인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인사를 하러 온 젊은 귀족들 덕분에 기분 나쁜 대화에 금방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생각대로 백작은 무언가 시빗거리를 찾아 말을 걸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생각대로 클럭슨 백작에게는 1 황자의 지령이 들어간 상태였다. 단순히 공작부인의 부탁만으로 많은 귀족들이 모이는 공식 석상에 스테판 공작가와 맞설 싸울 바보는 제국 내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도 단순한 기선제압이 아닌 대놓고 공격성을 드러내는 행동을 하는 것은 되도록 지양을 하는 편인데, 황자의 명령이라면 아예 말이 달랐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광채가 나는 관을 쓰면서 근엄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황제에 웅성대던 목소리가 한순간에 멎으며 모든 귀족과 관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차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의라곤 찾아볼 수도 없을 것 같았던 클럭슨 백작은 장내의 그 어떤 귀족보다도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면서 자리에서도 가장 먼저 일어서며 예의를 차렸다.

    “허허, 이거 반가운 얼굴이 있군.”

    황제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고 있음을 느낀 샐리는 곧바로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황제를 향해 예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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