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37화 (37/111)

#37

“많이 안 좋은 것이오? 역시 오늘은 쉬는 것이 좋겠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당신한테는 미안하고 고마워서 그래요.”

고집으로 보일 수 있었다.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샐리는 예전부터 쌓아온 앙금에서 나오는 어딘지 모르는 급한 마음에 마치 폭주 기관차처럼 멈추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달리고 있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와중에 자신이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때 헨리 크리스토퍼라는 든든한 동반자가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그는 아마도 모를 것이다.

“당신은 나한테 큰 행운이야.”

그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스테판 공작가를 먹을 생각 따위 하지도 못했다. 시기를 잘 타고났다고는 하나 힘이 없었다면 그 무엇도 불가능했다. 애초에 샐리의 계획은 헨리의 존재가 있기에 성립이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미안해요. 갑자기 영문 모를 소리를 해서. 사람이 아프고 나니까 감정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핼쑥해진 얼굴에서 애써 지은 미소는 그걸 보는 헨리의 가슴에 크나큰 돌덩이가 내려앉은 느낌을 주기 시작했다. 절대 약한 모습 따위가 존재할 것 같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샐리 스테판은 그런 여자였다.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하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것도 좋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헨리는 참 대단하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오.”

이런 여자가 자신의 곁을 지켜줄 든든한 우군이자 반려가 된다는 생각에 헨리는 가슴이 뛰었다. 언제부터 그런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녀에 대한 의구심이 서서히 확신으로 바뀌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상하게 샐리의 앞에 서면 뭔가 딱딱해지면서 자연스러운 행동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전과는 달랐다.

헨리의 손이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샐리의 볼에 닿았다. 살포시 잡은 볼에서 느껴지는 살결의 감촉에 헨리는 스스로가 양심이 없다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몸은 더는 감정을 애써 숨기는 데 지친 듯 말을 듣지 않았다.

“흐읍.”

갑작스럽게 덮쳐온 입술.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샐리는 이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게 포갠 헨리의 입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아픈 몸에서 충동적인 키스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충동적인 것 치고는 샐리도 마치 준비된 사람처럼 헨리의 거칠고 빠른 호흡에 발맞추며 제대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

“아픈 사람 붙잡고 너무 한 거 아니에요?”

“그런 것 치고는 그대도 즐기지 않았나.”

뭔가 능글맞은 미소에서부터 나오는 짓궂은 농담이었으나 샐리는 거기에 반박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생각보다 진하고 찐득했던 키스.

떨어질 듯하면서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이 파고들었다. 호흡이 거칠어짐과 동시에 약간 쉴 수 있는 시간을 주면서도 이내 다시 덮쳐오는 헨리의 혀와 입술에 통증 때문인지 아니면 키스 때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아득해졌었다.

서로 처음 맛보는 달콤한 감촉에 완벽하지 않고 어색한 감은 있었다. 한 몸이 된 것처럼 입술과 혀가 하나가 되지 않고, 약간 따로 놀 때도 있었지만, 결국 서로의 템포에 합의점을 찾아 모두가 만족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뒤 샐리는 오랜만에 본능에만 충실한 충동적인 행동을 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몰려왔는지 새침한 대응을 보였으나 먹히지 않았다.

“의사가 감기라고 하지 않았나?”

“맞아요.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라고 했었죠. 그런데 덕분에 무리를 했구요.”

“책에서 봤는데 감기는 나누면 빨리 낫는다고 하던데.”

“무슨 책에서요?”

“그게….”

앞으로의 신혼생활을 위해 헨리는 부하들이 추천해주는 다양한 연애 소설들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으나 프러포즈도 제대로 안 했다는 말에 경악한 부하들은 헨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부하들이 추천한 내용은 온갖 자극적인 내용들이 가득한 것이 대부분이라 그중에서도 제일 순한 맛을 골라 읽었다. 방금 그가 한 말은 읽었던 소설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이 아픈 여자주인공의 입술을 훔친 다음에 한 대사였다.

처음 그 대사를 봤을 때 오글거리는 손에 한동안 검을 잡지 못했던 기억까지 있었지만, 그 대사가 자신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그저 본인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충동적인 키스에 대한 일종의 변명과도 같았다.

“그건 비밀이오.”

“비밀이라고요?”

샐리는 얼마나 대단한 책이기에 저렇게까지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인지 오히려 호기심이 생겼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예전에 저택 밖으로 나가 도서관을 갔을 때 읽었던 연애 소설이 떠오르는 대사였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샐리는 조금 더 파고들어 보기로 했다. 오늘 진짜 목적은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무회의에 참석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출발 전 발생한 크나큰 해프닝은 그녀의 정신이 다른 곳으로 쏠리게 하기 충분했다.

“무슨 책인데 그래요. 그렇게 숨기니까 오히려 더 궁금한 거 알아요?”

너무도 달콤했던 일탈은 샐리의 성격에서 짓궂음을 꺼내 들게 만들었다. 괜히 눈을 피하면서 머리를 굴리는 것이 티가 나니 그동안 잠자고 있던 나쁜 본능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그냥 그대가 몸이 안 좋으니 의학서적을 찾아보다 본 것이오.”

“의학서적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고요?”

“그렇소.”

처음의 당황스러웠던 모습도 아주 잠깐뿐이었다. 이내 숨겨진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나온 뻔뻔함에 샐리는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이내 웃음을 가로막는 기침과 동시에 다시 올라오는 두통에 잠시 편안하게 펴졌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찡그려졌다.

“덕분에 오랜만에 웃었어요.”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이런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온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여전히 두통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헨리와 함께 있는 덕분에 이전보다는 왠지 몸이 더 나아진 기분이었다.

“원래 아플수록 이런 기분전환이 중요하오.”

실제로 헨리는 샐리가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거의 공작가의 저택에서 살다시피 했다.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그녀가 좋아하는 빵집에서 빵을 사 오거나 아니면 맛있다고 소문이 난 디저트 집에서 다양한 간식거리들을 사서 방문했다.

그러면서 빵집에 들러 자신처럼 샐리의 몸 상태를 걱정하는 그녀의 정보원들인 일명 레귤러즈에게도 안부를 전했다. 오히려 샐리가 아프고 나서 헨리와 레귤러즈 사이에 접촉 횟수가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나 레너드의 소식이 들어온 이후로 헨리의 경계심이 올라가면서부터 시작된 관계였다.

“그럼 방금의 키스는 기분전환을 위한 거였다는 거네요.”

“그렇다고 볼 수는 있지만, 그대가 불쾌했다고 하면 사과하겠소.”

애써 변명을 해봤지만, 결국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의 거짓도 없는 인생을 살아왔던 헨리의 양심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최대한 평정심을 지키고 있는 얼굴과는 다르게 안에서는 기사로서 해야 할 도리를 지키지 못한 것과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래서 진짜로 샐리가 방금 자신의 행동에 불쾌함을 표한다면 곧바로 허리를 숙여 사과할 준비도 되어있었다.

“그렇게 불쾌하지는 않았어요.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샐리는 불쾌하기보다 오히려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인지 말을 하면서도 괜히 아직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입술의 감촉에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살포시 어루만지고 있었다.

샐리 역시도 헨리만큼이나 부끄러웠다.

괜히 새침하게 굴고는 있지만, 그녀 역시도 자신의 입술을 덮쳐온 일탈에 몸을 맡기고 즐기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럼 당신이 말한 그 의학서적 내용을 제외하면 다른 이유는 없다는 건가요?”

“어, 그게….”

오늘따라 왜 이리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일까.

헨리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래 그녀는 먹잇감을 보고 견적이 제대로 나왔다면 곧바로 물고 놔주지 않는 성향이기는 했는데, 그렇다면 자신의 제대로 되지 않은 변명에서 냄새를 맡았다는 뜻이었다.

“하아, 사실 그냥 충동적으로 한 것이오.”

“그럴 것 같았어요.”

“그대를 이기려면 아직 멀었나 보오.”

“그렇죠. 애초에 의학서적에 그런 내용이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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