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36화 (36/111)

#36

“애초에 의뢰하신 독은 언제 그 효과가 나올 지도 모릅니다. 아예 증상이 안 나올 수도 있죠. 그러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십시오. 시간이 다 해결해줄 겁니다.”

마치 신전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어딘지 모르게 우아하면서도 정제된 목소리에 레너드는 뭐라 더 따지고 들 수가 없었다.

“제길, 두고 보겠어. 하지만 명심해. 난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레너드는 아무래도 본인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스테판 공작가의 공식적인 일원이라는 과거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당당하다 못해 건방지기까지 한 황당한 모습에 술집에서 대기하고 있던 몇몇 길드원들은 최대한 숨을 죽여 레너드를 비웃기 시작했다.

수도에 이미 어머니인 공작부인과 함께 사생아인 샐리를 어릴 때부터 학대를 해왔다는 점과 그런 여동생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밀려난 못난 후계자라는 뉴스는 퍼진지 오래였다.

여전히 샐리의 앞으로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아주 많았다. 그녀가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증명할 때마다 레너드는 말 그대로 비교 대상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예정이었다.

그런 것을 알기에 더 급해 보이는 레너드였지만, 자신의 처지를 아직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모습에 그런 투정 비슷한 무례한 언행을 받아주던 케인 역시 웃음이 나오려던 것을 겨우 참아야 했다.

“저희 길드는 역사상 단 한 번의 의뢰도 실패한 전적이 없습니다. 뭐 나름대로 자랑거리라면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믿고 기다려주시면 조만간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입니다. 늦어도 지금쯤이면 증상이 슬슬 나타날 때이니까요.”

친절한 설명에 레너드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 약간 신경질적인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레너드가 향하는 곳은 그의 안식처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는 도박장이었다.

“사람을 하나 보내야겠군.”

고객이 저리 재촉하기도 하고, 본인이 말했던 것처럼 이제는 슬슬 증상이 올라올 때이기도 했다. 확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케인은 정보를 수집하는 담당을 맡고 있는 날랜 길드원을 찾으며 말했다.

“요즘도 도박장에 가나?”

“돈이 어디서 나는 건지 수도에 올라올 때마다 갑니다.”

“영지에 있는 보석 같은 거에 손이라도 댔나 보지. 어쨌든 의뢰는 계속 진행하자고.”

제이스의 말대로 따르고는 있었지만, 정확한 의중을 알 수 없었기에 케인 역시 마음속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불똥이 튈 수도 있는 위험한 일에 이득이 많이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이런 일을 받은 것이 머릿속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제이스가 이곳 제국의 수도에 등장하여 그를 섬기게 된 이후부터 언제나 그렇듯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명령을 내리면 따르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

“그대 정말 괜찮겠소?”

한동안 지켜보겠다고 했으나 매분 매초 샐리의 옆에 붙어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그녀의 충실한 하녀장인 메리가 잘 돌봐주며 사전에 알려준 주의사항대로 다른 일을 하지 못하게 했겠으나 처음 봤을 때보다도 더 안 좋아진 안색에 헨리는 걱정되었다.

“괜찮지는 않아요.”

웬만하면 고집을 꺾지 않는 그녀였다. 그러나 샐리도 본인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것쯤은 잘 알았다. 헨리가 보낸 의사도 그저 몸살이 심하게 걸린 것이라며 약을 처방해주고 갔는데, 그 약을 먹고 나름대로 푹 쉬었음에도 몸은 낫기는커녕 오히려 더 안 좋아졌다.

“하필이면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 몸 상태가 이렇다니. 제 불찰이에요.”

오늘은 드디어 그녀가 고대하던 인생에서의 큰 도약과도 같은 한 걸음을 내딛는 날이었다. 또한 그것은 제국에 있어서는 전례 없는 역사의 시작점이었다.

여자가 작위를 잇는 것에 더해서 남자인 귀족과 관료들이 가득한 정무회의에 참석하여 그들과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견해를 나눈다는 것은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바뀐 제국의 법에 수혜자이자 그 첫 번째 사례가 바로 샐리였다.

“의사는 뭐라던가.”

“딱히 특별한 점은 없다고 했어요. 혹시 몰라 간단하게 검사도 해봤는데, 그냥 단순한 감기몸살 같다고 약을 처방해주던데요.”

헨리가 아무 의사나 샐리에게 보냈을 리 없었다.

내셔스 백작에게 자문을 구해 귀족들 사이에서 꽤 평판이 좋은 의사였다. 그런데 그런 의사가 지금처럼 심상치 않아 보이는 몸 상태의 샐리로부터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도 심각한 사태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면서 헨리는 샐리에게 오늘 정무회의에 불참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대의 몸을 생각해서라도 오늘은 쉬는 것이 어떻소. 정무회의라는 것이 꼭 오늘만 열리는 것도 아니고, 다음에도 기회가 있지 않소.”

“안 돼요. 오늘 꼭 가야만 해요.”

그러나 샐리는 걱정이 앞선 헨리의 제안을 고민도 하지 않고 단칼에 거절했다.

화제성은 한 번 식으면 거기서 끝이었다. 물이 들어왔을 때 노를 저으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 정무회의에 모습을 드러낼 자신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음을 아주 잘 알았다.

[조심해. 레너드가 널 노리고 있는 것 같아.]

아직 자세하게 파내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페드로로부터 온 편지에 적힌 짤막한 문장에 생긴 경각심과 함께 본인의 몸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샐리 역시도 오늘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거운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 편지 나도 봤소. 그대가 몸이 안 좋은 걸 그쪽에서 눈치챈다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오.”

“그래봤자 제까짓 게 뭘 어떻게 하겠어요?”

“그건 모르는 일이오. 안 그래도 괴팍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그대의 친우가 조심하라는 편지까지 보낸 것을 보면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틀림없소.”

애써 태연한 척을 하고는 있었지만, 샐리 역시도 레너드의 존재가 경계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헨리의 말은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어 동의하기는 했지만, 불확실한 위험성을 무서워하여 중요한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낭패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감을 한 번쯤 믿어보는 게 어떻겠소.”

정기적으로 열리는 정무회의는 그 시간도 꽤나 길었다. 지금 상태를 보면 샐리는 그 시간을 온전히 버틸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런데 혹시라도 그런 것이 레너드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가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움직임을 취할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샐리가 자랑하는 최고의 정보원들도 레너드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럼 회의장에 함께 들어가는 건 어때요?”

애초에 샐리는 본인 혼자 정무회의에 참석하려 했다. 물론 샐리와 헨리는 정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린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회의에서 낼 안건에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사람 중 하나이니 참석한다고 해서 문제 될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샐리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이런 상태로 혼자 그 긴 시간을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욕심을 내려놓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 절충안을 내놓은 것이었다.

“알겠소. 그대가 그리 중요하다고 말하니 막지는 않겠소. 하지만 정무회의에도 쉬는 시간이 있으니 혹여나 여기서 몸이 더 안 좋아진다면 그대가 뭐라 말을 하던 난 그대를 데리고 나올 것이오.”

샐리의 절충안에 대한 헨리의 제안이었다. 애초에 그녀를 이 저택 밖으로 내보내는 것부터가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고집을 본인은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앞에만 서면 왠지 모르게 스스로가 조금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두려움과는 완전히 결이 다른 감정 때문에 헨리는 샐리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은 있었다. 그 마지노선은 서 있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심각한 조짐이 보인다면 뭐라 거부하던 회의장에서 끌고 나올 생각이었다.

“알았어요. 양보해줘서 고마워요.”

샐리 본인도 조금은 무모한 고집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헨리는 언제나 자신의 의견을 들어줬다.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절충안은 내놓더라도 양보도 많이 해줬고,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지지해줬다.

샐리에게는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감사함은 머리를 괴롭히는 통증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컥함이 되며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사람이 아프면 감정이 조금은 헤퍼진다고 하듯이 지금의 샐리가 그랬다.

“왜, 왜 그러시오.”

헨리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여자의 눈물에 굉장히 약했다. 울고 있는 여자를 앞에 두고 뭘 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두는 것이 여자에게 냉정 그 자체라는 소문의 근원이었다. 처음에는 다소 억울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 덕분에 자신을 괴롭히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본인이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되는 여자가 영문도 모를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니 평소의 그답지 않게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헨리는 당황스러움에 다급하게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물을 황급히 닦아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