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35화 (35/111)

#35

예상치 못한 시기의 결혼. 귀족들이라면 아무리 늦어도 약혼을 했을 나이이지만, 두 사람에게는 각자만의 사정이 있었다. 특히 헨리의 경우 사랑이라는 감정을 사치라고 느낄 정도로 전장에서 피 냄새를 맡으며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도 길었다.

“아가씨, 여기 약 드세요.”

메리가 건넨 독한 약을 먹은 샐리는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잠들었다. 그리고 헨리는 시간이 얼마나 흐르던 상관없이 계속해서 그녀의 곁을 지켰다.

“이젠 쫓기지 않아도 되건만 뭐가 그리 급하시오.”

30분 단위로 샐리의 이마에 손을 가져가며 열심히 열을 체크하는 헨리는 자면서도 시름시름 앓고 있는 샐리를 보며 안타깝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일어났소?”

“지금 몇 시예요?”

“이제 막 자정을 넘어가고 있소.”

“계속 옆에서 그렇게 있었던 거예요?”

어둠에 슬슬 적응이 되면서 가볍게 고개를 흔드는 헨리의 머리가 보이자 아픈 것이 조금은 나아졌는지 샐리는 황당하다는 듯 헨리를 바라보았다.

“힘들 텐데 왜 그러고 있어요. 돌아가서 쉬지.”

“내가 걱정이 된다면 앞으로는 그대의 몸을 잘 돌보시오. 그대가 몇 날 며칠을 누워있던 나는 그대의 곁을 지킬 테니까.”

“왜요?”

“왜긴. 난 내 부인한테 그렇게 하기로 예전부터 마음을 먹고 있었소. 그대가 이렇게 무리하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내가 정말로 좋아지기라도 하셨어요?”

본인 입으로 내뱉은 말임에도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샐리는 픽하고 힘없이 공기가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뜻이 맞는 이들끼리 함께하다 보면 정이 들 수도 있었다. 샐리 본인도 헨리에게 느끼는 설렘 비슷한 감정들을 모두 그런 식으로 치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도 잘 모르겠소. 하지만 확실한 건 그대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는 거요. 그것이 우리의 계약 때문이든 아니든.”

좋아하는 것 같다며 대충 얼버무리는 식으로 말하면 착각이라며 곧바로 선을 그어버릴 생각이었는데, 헨리가 한 말은 샐리 본인이 느끼는 감정과 어쩐지 비슷했다.

“설마 밤새 그렇게 앉아있을 건 아니죠?”

“전장에 있으면 어디 눕던 그곳이 내 잠자리였지. 이 정도는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푹 잠이나 자시오.”

“그러지 말고 여기 누워요. 침대가 넓어서 당신이 누울 자리 정도는 만들 수 있으니까.”

그 말에 한참을 얼어붙어 있던 헨리는 쭈뼛쭈뼛 샐리의 옆으로 가 누웠다. 호기로운 제안을 한 샐리도, 그 제안을 받아들여 자연스러운 척 곁에 누운 헨리도 묘하게 감도는 긴장감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잘 잤어요?”

“괜찮았소. 그대야말로 잠을 잘 청했소?”

누가 봐도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한 얼굴의 샐리의 물음에 똑같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피곤한 얼굴의 헨리가 대답했다.

“몸은 좀 어떻소.”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헨리와 한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에 대한 묘한 긴장감. 그 긴장감도 밤새 잠을 설친 데 지분을 제법 차지하기는 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주기적으로 머리를 건드리는 통증에 제대로 잠을 청하지도 못했다.

“무리하긴 했나 봐요.”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메리가 떠먹여 줘야지만 겨우 식사를 했던 좋지 못했던 생활 습관이 생각했던 것보다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샐리의 생각이었다. 메리가 가져다준 약은 독한만큼 효능도 확실한 것이었는데, 이 정도로 낫지 않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단단히 병에 걸린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무리를 하는 것이오. 이제 어느 정도 우리의 목표를 이뤘다고 생각하는데.”

“음, 아무래도 꿈을 크게 가지고 있다 보니 어쩔 수가 없네요.”

“꿈?”

그 꿈이란 것은 아무래도 공작가를 손에 넣은 뒤의 이야기 같았다. 그녀가 단순히 목표로 잡은 것이 공작가만이 아니라는 의미로 헨리는 그 이야기가 흥미롭다는 듯 좀 더 캐묻기로 했다.

“꿈 이야기라면 나한테도 해주면 좋겠는데. 이제 부부가 될 사이기도 하고, 내가 그대를 도울 수도 있지 않소.”

“그냥 지금의 제국을 좀 더 괜찮은 방향을 바꾸고 싶다는 것뿐이에요.”

“제국을 바꾼다?”

누군가 나쁜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에 반역죄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샐리는 이미 안심할 수 있는 상대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덧붙이기 시작했다.

“지금의 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샐리가 던진 질문에 대한 헨리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전쟁터에서 살아온 만큼 자신의 부하들이 의미 없는 싸움에서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거나 그게 아니면 정말로 못다 이룬 꿈을 간직한 채 죽는 경우도 허다했으니 말이다. 정말 의미 있는 전장이라면 기사가 된 이상 어떻게 보면 가장 이상적인 죽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기사들은 언제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고, 기사의 맹세에 들어가는 내용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제국은 그냥 의미 없는 싸움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무언가 크게 걸린 것이 없는데도 소국과 전쟁을 열고, 주변국을 침략하고자 하는 의도를 다분히 드러내며 본인들의 힘을 과시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당신과 당신 부하들이 고생하는 건 단순히 정치적인 싸움 때문이에요.”

“현 황제께서는 제국이 대륙을 통일하기를 원하시지.”

“그걸 지지하는 게 바로 스테판 전 공작이었죠. 단순히 본인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선택으로 딱히 손해 볼 것도 없으니까요.”

“그렇지. 손해는 나와 내 부하들이 다 봤으니 말이오.”

헨리가 스테판 공작을 거의 혐오하다시피 했던 이유였다. 황궁에서 몇 번 마주칠 때마다 마치 고기 방패인 것처럼 본인과 본인 부하들을 비하하는 발언까지 일삼았던 아주 무례한 작자였다.

“지난번에 제안했던 방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금 제국의 기류를 바꿀 필요가 있어요.”

샐리가 말한 방안은 바로 수도 방위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황궁을 호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도 전역의 치안을 높이면서도 헨리를 수도에 자리 잡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정에 신경 쓰지 않고, 전쟁만을 바라보는 현 제국의 대외정책에 변화를 주는 것이 필수였다.

“그러기 위해 서재에 틀어박혀 공부를 했던 거군.”

“공부란 건 언제 해도 끝이 없는 거니까요.”

“지식을 머리에 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알았으면 좋겠군.”

샐리는 자연스럽게 헨리에게 서재에서 읽을 책을 가져달라는 식의 부탁으로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헨리는 그녀의 의도를 알고 사전에 차단해버렸다.

“그대가 늘 할 일은 침대에 누워서 푹 쉬는 것이오.”

“오늘은 일이 없어요?”

“옆에서 그대가 딴 짓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 오늘 내 일과요.”

침대에서 일어난 헨리는 어제처럼 바로 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말했다.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스프로 준비했어요. 드실 수 있으시겠어요?”

“입맛이 없기는 한데….”

“먹기 힘들면 말하시오. 내가 먹여줄 테니.”

헨리의 말 한 마디에 샐리는 곧바로 메리가 자신을 위해 가져온 테이블 위에 올려진 스프를 한 술 뜨기 위해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웃는 헨리에게 샐리는 왠지 모르게 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

“이봐!”

문밖에 아직 영업 전이라는 팻말이 있음에도 무시하고 들어온 레너드는 당장 길드장을 불러오라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죽일까요?”

“안 돼.”

이런 깊은 골목에 지나다닌 인파도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즉, 사람 하나 죽는다고 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예리하게 빛나는 검을 뽑으려는 부하를 케인이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 내가 일을 의뢰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거야.”

“의뢰하신 일이라면 차질 없이 진행 중입니다. 조금 기다리시지요.”

“하, 이래서 근본도 없는 것들이란.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아직도 진행 중이야.”

“저희 길드만의 방식이 있으니 믿고 맡겨 주시지요.”

핏대를 올리며 침을 튀기는 레너드를 앞에 두고도 케인은 부드러운 미소로서 깍듯이 손님을 대했다. 거친 일을 도맡아 하는 길드에 몸을 맡기고 있는 사람답지 않은 선한 인상에 레너드도 숨만 거칠게 몰아쉴 뿐 조금씩 흥분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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