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34화 (34/111)

#34

“오늘도 가십니까.”

“네 덕분에 전부 알아냈으니까. 시간 끌게 뭐 있겠어?”

그렇게 말한 제이스는 수도의 대장장이에게 부탁해 받은 날카로운 구르카 두 자루를 챙겨 건물 밖으로 나섰다. 안에서와는 달리 살기를 완전히 숨기며 누더기 망토를 뒤집어쓰고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좀 쉬세요, 아가씨.”

보다 못한 메리가 샐리의 손에 들려있는 깃펜을 빼앗으며 말했다. 작위를 잇기 전부터 공작부인의 수족들을 가리기 위한 작업들과 함께 저택의 재정을 파악하고, 거기에다 잠을 줄이고 공부까지 한 탓에 이전에 백옥 같던 피부가 사막의 모래처럼 거칠어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메리의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는 샐리 때문에 그녀도 결국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이것만 하고 쉬려고 했어.”

공작부인과 레너드가 떠난 저택에는 많은 골칫거리가 남아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전 공작이 남기고 간 사업들이었다. 스테판 공작가라는 이름만 믿고 사업에 투자했던 이들은 공작이 죽고 새롭게 가문을 잇게 된 샐리에게 찾아왔다.

“그 말도 몇 번째 반복하고 계세요. 그래 놓고 결국 쉬는 걸 본 적이 없잖아요. 이번에는 그냥 안 넘어갈 거예요.”

어디 일벌레 귀신이라도 붙어있는 것처럼 책상에 한 번 앉았다 하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처음에는 그런 장단에 메리가 어느 정도 맞춰주며 방 안으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음식들을 가져와 샐리의 입에 넣어주곤 했다.

마치 아기 새를 먹이는 어미 새처럼 책과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샐리의 입에 메리는 열심히 음식을 넣어주었다. 또한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입안의 음식을 씹어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린 아가씨의 정신을 차리는 데 기운을 쏟아 부어야 했다.

“알았어, 진짜로 쉴게.”

“그 의자에서 일어나시면 믿어드릴게요.”

몇 번이고 같은 꾀에 넘어갈 메리가 아니었다. 결국 샐리는 단호하게 자신의 곁을 지키며 절대 밀리지 않을 기세를 보이는 메리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야?”

“하녀 루루예요. 헨리 경께서 찾아오셔서요.”

“그 사람이 무슨 일로?”

“무슨 일로 찾아오긴요.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데 따로 이유가 있겠어요? 벌써 못 만난 지 3일이나 지났잖아요.”

“3일?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방안에 틀어박혀 서류만 보는 사람에게 시간 개념이란 것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메리는 시간 개념을 넘어서 총명하게 빛나던 눈에 초점이 맞지 않으며 멍하니 서 있는 샐리의 상태가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함께 방을 나서려는 샐리를 만류하고 혼자 헨리를 맞이하러 갔다.

“내 상태가 그렇게 별론가?”

너무 오래 앉아있다가 일어서서 그런지 몸에 균형이 맞지 않아 휘청휘청했다. 거울 앞에 선 샐리는 이것이 정말 사람의 몰골인지 의심이 가는 자신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짜 심각하긴 하구나.”

눈 밑에 그늘이 진 것 같은 다크서클은 기본 옵션에 거칠어진 피부와 떡진 머리에 이 상태 그대로 헨리를 만나도 괜찮은 것인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가 그런 걱정에 잠길 새도 없이 메리는 헨리를 데리고 곧바로 샐리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왔다.

“저희 아가씨 좀 말려주세요. 헨리 경.”

헨리는 메리에 이끌려 들어간 방에 곧 쓰러질 것 같은 초췌한 몰골의 샐리를 보자마자 곧바로 그녀에게 달려가다시피 갔다.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초인이라고 봐도 무방한 그의 운동신경이 겹쳐 마치 순간이동을 쓴 느낌을 줬다. 샐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자 자신의 눈앞을 가리는 거구에 깜짝 놀라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상태에서 발걸음 하나를 옮기자마자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아가씨!”

그대로 뒤로 넘어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상황에 메리의 목소리가 절로 올라갔으나 다행히 아찔한 상황은 샐리의 허리를 순식간에 잡아챈 헨리 덕분에 미연에 방지가 되었다.

“그대 괜찮소?”

“아, 너무 오래 앉아있었나 봐요.”

샐리는 별거 아니니 괜찮다며 자신의 허리를 감은 팔을 치우려 했지만, 헨리는 아슬아슬해 보이는 그녀를 그냥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 손을 그녀의 이마로 가져가 열이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저기….”

당장 다음 주가 되면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부부가 될 사이였다. 그러나 그런 사이라기에는 이런 작은 스킨십조차 어색해 샐리는 얼굴에 열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마가 뜨거운데.”

단순히 남자의 손길에 타오르기 시작한 얼굴이 아니었다. 헨리는 손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미간을 찌푸리며 샐리의 초췌한 얼굴을 바라보다 무언가 결심이 섰는지 곧바로 그녀를 일명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렸다.

“엄마야!”

눈 깜짝할 사이에 공중에 몸이 뜨자 당황한 샐리는 자기도 모르게 창피한 비명을 질렀다.

“침실이 어디지.”

자기 발로 걸어 나갈 수 있다며 헨리의 돌발행동에 거의 떼쓰다시피 하는 샐리를 외면한 채 헨리는 그녀를 침실로 데려가기 위해 서재의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왜 이러세요.”

“그야 그대가 바보같이 자기 몸 상태도 모르니까 그렇지. 이건 일종의 벌이라고 생각하시오.”

이런 식으로 남자의 품에 안겨 본 적이 없는 샐리였다. 거기에 이 방에는 단둘만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녀에게는 이 상황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헨리는 약간 상기된 그녀의 목소리에 움찔하면서도 단호하게 샐리를 들고 있는 양팔에서 힘을 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따라오세요.”

메리의 안내에 따라 헨리는 서재 밖으로 나와 샐리의 침실로 향했다. 때마침 최근에 쓸 일이 없었음에도 매일 침실을 청소하는 담당 하녀들을 마주쳤지만, 이제야 머리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열을 제대로 인지하게 된 샐리의 눈에 주변의 광경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곁에 내가 있을 테니 약을 가져오도록.”

“네.”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헨리는 깔끔하게 정돈되어있는 침대에 샐리를 살포시 눕힌 다음 그 위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무래도 몸살감기에 걸린 듯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빨리 저택 안에 구비되어있는 약을 먹일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침대에 눕자마자 끙끙 앓기 시작한 샐리의 상태에 안절부절못하던 메리는 아가씨의 곁을 지켜줄 든든한 존재 덕에 발걸음을 떼서 약을 가지러 갈 수 있었다.

“하아, 고마워요.”

한번 인지된 몸 상태에 그 아픔이 한 번에 몰려왔다. 지끈거리는 머리는 물론이거니와 한번 침대에 눕자 마치 몸 위에 바위라도 올려놓은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본인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도 싸움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요. 다음부터는 더 신경 쓰시오.”

“알았어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도 딱딱한 문장과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샐리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근데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아내가 될 사람을 보러 오는데 꼭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오?”

“그건 아니지만….”

“디자이너가 그대의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데 3일 정도 걸린다고 연락을 보내와서 알려주러 온 거요.”

“그렇군요.”

헨리의 말에 샐리는 온종일 돌아다니며 결혼식에 필요한 웨딩드레스와 초대할 하객들을 위해 준비할 음식 등을 살펴봤던 것이 떠올랐다.

당시에 아무 드레스나 괜찮다는 생각으로 디자이너가 처음 보여준 드레스를 고르려고 했다. 그러다 함께 온 헨리와 메리에게 저지당하면서 그들의 열과 성에 힘입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드레스를 입어봤던 힘든 기억에 몸에 닭살이 돋으며 부르르 떨렸다.

“몸이 많이 안 좋소?”

“방금 건 아파서 그런 게 아니에요.”

샐리에게 있어서는 다른 의미로 아픈 기억이었다. 당시에 처음으로 체력적 한계에 다다른 인간이 정신줄을 놓아버린다는 것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지 몸소 체험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상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헨리는 메리와 함께 의견을 주고받은 끝에 특별 제작하여 만드는 웨딩드레스를 선택하여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우리가 정말 결혼식을 올리네요.”

“애초에 결혼을 전제로 시작된 계약이었잖소.”

“그렇지만 왠지 실감이 안 나서요. 결혼이란 게 머나먼 남들 얘기처럼 느껴졌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마찬가지요.”

이 부분에서 두 사람 모두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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