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30화 (30/111)
  • #30

    “1 기사단의 단장은 나인데 네가 뭐라고 훈계를 한다는 거지?”

    “그럼 이런 일이 안 생기게 관리를 잘 하시던가요. 1 기사단 단장님.”

    짧게 자른 붉은 머리에 각진 턱이 인상적인 펠릭스는 야닉의 무례한 태도에 이마에 주름살이 생겼다.

    “그대는 검술 훈련보다는 예의를 먼저 배울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

    “앞으로도 예의하고는 담을 쌓을 예정입니다요.”

    “그대의 상사는 부하들에게 예의란 것을 가르치지 않나 보군. 그렇게 본다면 내 부하들이 그대들의 단장에게 한 이야기가 꼭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은데.”

    “하, 우리 단장의 출신성분을 가지고 저지른 무례가 틀린 말이 아니란 거요?”

    “그렇지 않나. 황족 취급도 못 받고, 귀족 취급도 못 받는 천출과 다를 것 없는 신세가 아닌가.”

    1 기사단은 야닉을 완벽한 타깃으로 잡았다. 지금처럼 그의 성질만 좀 더 긁어주면 화를 참지 못하고 날뛸 것이 뻔했고, 그걸 트집 잡아 황궁 근위대라는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 헨리와 그의 기사들을 내쫓는 성과까지도 바라볼 수 있었다.

    “말이 좀 심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내가 없는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지 않나.”

    보다 못한 주안도 나서봤지만, 펠릭스는 오히려 콧방귀를 뀌며 야닉을 더욱 자극했다. 그가 뽑아 든 대검을 단순히 위협용이 아닌 실제로 사용하길 바라면서 그의 붉은 눈동자가 사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멈추세요!”

    연병장에 울려 퍼진 여자 목소리에 양 기사단은 으르렁거리던 것을 멈추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샐리가 헨리와 함께 기사의 안내를 받아 연병장에 도착했다.

    “공녀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인 일이십니까.”

    “누추하다니요. 제국을 위해 기사들이 땀을 흘리는 곳을 어찌 누추하다 표현하십니까.”

    샐리의 날카로운 지적에 펠릭스는 곧바로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황궁을 지키는 기사단의 단장씩이나 되는 인물이 기사에게 가장 중요한 훈련장을 낮추어 표현한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본인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작위 수여식을 마치고 오는 길입니다. 호칭을 똑바로 해주세요.”

    “죄송합니다.”

    펠릭스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숙였음을 뒤늦게 인지했다. 그가 자신의 행동을 인지한 뒤에는 이미 샐리에게 허리를 숙여 사과하고 난 다음이었다. 지금껏 여자에게 이런 압도당하는 분위기를 느껴본 경험이 없는 그에게 있어서 익숙한 연병장이 낯선 곳으로 변해버렸다.

    “야닉도 검을 내려놓으세요.”

    또박또박 절도 있는 발음과 차분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당장에라도 펠릭스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던 기세는 사라졌다. 그리고 야닉은 그녀의 말대로 뽑아 든 대검을 손에서 놨다.

    “이제 말해보세요. 이번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제국의 자랑스러운 두 기사단 사이에서 이런 싸움이 벌어졌는지.”

    “기사단의 일은 저와 헨리 경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샐리의 등장은 1 기사단에게 있어서 예상치 못했던 변수였다.

    전장에서와는 다르게 헨리는 황궁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언제나 피해왔다. 그들이 자신을 멸시한다고 하더라도 부하들이 더 큰 불이익을 받을 수 있었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샐리는 이참에 완전한 서열정리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1 기사단이 어째서 저리 당당한 것인지 헨리의 성격을 미루어 봤을 때 그녀 역시도 그동안 어떤 식의 대응이 오갔는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당신이 이 상황을 설명해 봐요.”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요, 싸움의 당사자가 설명하는 게 더 정확하니까 그냥 가만히 계세요.”

    샐리는 먼저 나서서 불리한 상황을 피하려는 펠릭스를 가볍게 저지한 뒤 야닉과 신경전을 벌인 기사에게로 다가갔다.

    “어이, 아까는 잘만 떠들더니 지금은 왜 벙어리가 됐냐.”

    말해봤자 불리해질 것이 뻔하니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답답했는지 야닉은 돌덩이 같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퍽퍽 치며 샐리 앞에서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기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저 저희 기사단이 더 뛰어나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놈이 무슨 자격지심이라도 있는 것처럼 저러고 있는 겁니다.”

    “아닙니다! 저것이 분명 단장님의 가문을 가지고 험담을 하면서 공작님까지 모욕하는 걸 똑똑히 들었어요.”

    두 기사단은 늘 그렇듯 서로가 언짢아하며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싸움의 시발점이 된 1 기사단의 기사가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헨리에 대한 모욕과 함께 샐리가 성적인 수치심을 느낄법한 발언을 일삼았고, 우연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야닉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었다.

    샐리가 취하는 태도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헨리는 야닉의 입에서 자신뿐만 아니라 샐리도 그들의 더러운 입에 오르내렸다는 말에 미간이 구겨지며 1 기사단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서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니 오늘 일은 이 정도에서 넘어가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은데, 단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현명하신 판단이라 생각됩니다. 저도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부하들에게 주의를 주겠습니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펠릭스는 일을 더 크게 만들지 않겠다는 말에 화색이 돌았다. 반면 그 장면을 지켜보던 야닉이 대검을 다시 집어 들려는 것을 주안이 막아 세웠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가벼운 인사를 하고 펠릭스는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연병장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자신을 비웃으며 유유히 연병장을 빠져나가는 1 기사단의 모습에 분통이 터지는 야닉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샐리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저것들을 그냥 보내신 겁니까. 설마 저희 말을 못 믿는 겁니까?”

    답답해 미쳐 죽으려 하는 야닉을 보며 샐리는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어 보였다. 야닉을 포함해 헨리의 기사단 모두 그런 그녀의 태도에 실망한 듯 보였지만, 헨리는 샐리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곧바로 눈치챘다.

    “이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게 주안과 야닉은 날 따라오세요.”

    지명 받은 두 사람은 샐리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벙 쪄 있다가 헨리와 눈을 마주쳤다. 헨리의 따라오라는 손짓에 두 사람은 얌전히 샐리의 뒤를 따라 헨리의 방으로 향했다.

    ***

    “그래서 생각하고 계신 방안이 뭡니까.”

    야닉은 아무래도 아직 분이 안 풀린 것 같았다. 여전히 숨소리가 거칠었고, 자리에 앉는 행동 자체도 거친 분위기를 풍기며 요란했다. 그러면서도 눈은 단 한 번도 샐리를 놓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야닉, 무례하게 굴지 마.”

    참다못한 주안이 야닉을 째려보며 쏘아붙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야닉은 헨리보다도 머리통 두 개는 더 큰 거인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런 산만 한 덩치의 남자가 씩씩거리며 있는데 샐리의 입장에서 쉽게 입을 열지 못할 듯 보였다.

    “애써 분을 삭일 필요는 없어요. 야닉이 느끼는 분노가 어떤 것인지 느껴봐야 그 기분을 나도 알 테니까.”

    아리송한 문장에 야닉은 열을 내던 것도 멈추고 벙 찐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솔직히 말하면 야닉이 조지려고 했던 그 기사는 내가 원했다면 당장 징계를 내릴 수도 있었어요.”

    아무리 봐도 거친 사내의 입술과는 달리 보드랍고 촉촉해 보이는 입술이 열리면서 나왔을 단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것도 저리 아무렇지 않게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한 귀족 영애가 거친 사내들이 쓸 법한 말을 했으니 야닉과 주안은 당황스러움에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원래 공녀께서 저리 거칠었나?”

    “거침없으시기는 하지만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건 처음 듣는군. 그리고 호칭 똑바로 해, 야닉. 오늘부로 작위를 이으셨으니까.”

    샐리와 보낸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야닉과 주안 모두 샐리의 언어습관 모두를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귀족 영애를 생각해보면 때 묻지 않은 그들의 고급스러운 언어습관과는 거리가 한참은 멀어 보였다.

    “흠, 흠. 그렇다면 일부러 징계를 내리지 않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죠.”

    “어째서입니까.”

    야닉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같이 이야기를 들으며 별말 없이 앉아있던 헨리와 주안 역시 야닉과 마찬가지로 샐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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