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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29화 (29/111)
  • #29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그렇게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며 1 황자가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드디어 작위 수여식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황제가 등장했다. 언제나 그렇듯 거칠 것 없는 위풍당당한 걸음걸이. 오늘은 평소에는 쓰지 않는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왕관을 머리에 올린 채 황권의 상징인 지팡이와 함께 나타난 황제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샐리를 응시했다.

    “제국의 법이 바뀐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좋은 사례가 속출하니 짐은 참으로 기쁘도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샐리는 곧바로 무릎을 꿇으며 황제를 우러러보는 자세를 취했다.

    “가문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대는 다를 것이라 믿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언급에 먼 곳에서 바라보는 헨리의 표정이 구겨졌다. 별 뜻을 담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앞으로 스테판 공작가를 이끌어 갈 샐리를 앞에 두고 작위 수여식에 참여한 많은 귀족들 앞에서 언급하기에 불필요한 내용이었다.

    “그대는 어떤 공작이 될 건가.”

    작위를 잇는 것에 대한 간단한 축하 연사가 끝난 뒤 가슴팍에 직접 훈장을 달아주던 황제가 샐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대의 아비는 나의 뜻을 받들어 제국의 영향력을 대륙에 행사하는 데 발판을 세웠었지. 그대는 앞으로 날 위해 뭘 할 것인지 묻는 걸세.”

    “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노골적으로 황제를 위한다는 말을 피한 티를 내는 그녀의 태도에 헛웃음을 지으며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을 샐리는 피하지 않고 맞섰다.

    “정무 회의에 참여하여 제국을 위한 안건을 내겠습니다.”

    “그것이 내 마음에 들면 좋겠군.”

    황제는 지금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괜히 나서서 그녀가 공작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그저 관망하기만 해준 것에 대한 충성의 요구였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짜 의도를 감추는 능글맞은 미소였다. 그러나 지금 당장 황제와 척져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그가 요구하는 바를 수용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

    “수고 많았소.”

    “힘든 것도 없었는데 수고랄 게 있나요.”

    작위 수여식이 끝나자마자 샐리는 헨리에게로 한달음에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정돈된 의복에서 느껴지는 그리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약간 달큼한 향이 섞여 있는 향수 냄새가 그녀의 코를 어루만졌다.

    “참 보기 좋네요.”

    “그러게요. 우리 남편도 저렇게 좀 챙겨줬으면 좀 좋겠네요.”

    중년의 귀족 부인들은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지나갔다. 그 밖에도 작위 수여식을 지켜본 귀족들은 하나둘 무슨 희귀 동물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두 사람을 힐끔힐끔 구경하기 위하여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모습이었다.

    “단장님!”

    그런데 그때 헨리를 발견하자 황급히 달려오는 한 병사에 의해 꽃가루가 휘날리는 듯한 핑크빛 기류는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귀족들이 많은 곳에서 기사의 경박한 행동은 기사단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였기에 헨리는 다급하게 자신에게 달려온 병사에게 우선적으로 따끔한 주의를 줬다.

    “그래, 무슨 급한 일이기에 황궁의 기사씩이나 되면서 이리 뛰어온 것이냐.”

    “1 기사단이랑 싸움이 났는데, 단장님께서 부단장님들 좀 말려주세요. 저희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

    또 1 기사단과의 갈등이었다.

    그런데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급박해 보이는 병사의 모습에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다르게 싸움이 제법 크게 번진 듯 보였다.

    “하아, 오랜만에 그대와 단둘이 식사라도 하려 했는데.”

    헨리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서로의 공사가 다망했기에 사람들에게 가벼운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데이트조차 하지 못했다. 헨리 본인이야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었지만, 샐리는 저택의 새로운 사용인들의 이력서를 확인하고, 개인적인 공부도 하고, 이제는 어엿한 가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이래저래 바빴다.

    “그럼 일을 해결하고 간단하게 먹어요.”

    “싸움이 제법 커져서 오래 걸릴 수도 있소. 그리고 위험할 수도 있으니 그대는 먼저 들어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니요, 수도에 자리를 잡아야 하니 이런 트러블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죠.”

    샐리 역시 헨리와의 시간을 내심 고대해왔었다. 이상하게도 일에 파묻혀 지내면서 정신이 없을 때에도,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의자에 앉아 넋을 넣고 있노라면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신기하게도 이제는 사람들의 눈초리를 의식하지 않아도 그와 붙어서 나오는 행동들이 많이 자연스러워졌다. 가령 자기도 모르게 그의 품에 안겨 그동안의 피로에 지친 몸을 기대는 행동 같은 것들 말이다.

    “안내하세요.”

    남들에게 말 못할 비밀을 숨긴 채 샐리는 자연스럽게 헨리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가져가 팔짱을 꼈다. 다만, 지금 두 사람 모두 나름대로 계획한 오늘 하루가 삐걱거리는 것에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그렇기에 걸음걸이부터 표정까지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전쟁에 나가는 장군과도 같은 비장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연병장으로 향했다.

    “진정해, 야닉.”

    “젠장,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고. 저것들이 우리 단장에 대해 말한 꼬락서니를 보라고.”

    주안의 만류에도 끝내 야닉은 화를 참지 못해 자신의 단장인 헨리를 모욕한 1 기사단의 기사에게 주먹을 날렸다. 안 그래도 힘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야닉의 주먹이었는데, 상대는 턱에 제대로 꽂힌 주먹에 공중에 몇 초간 뜬 상태에서 바닥을 뒹굴었다.

    “어이, 황궁 안에서 폭력은 금지란 거 모르나?”

    “난 무식해서 그런 거 몰라, 이 새끼야.”

    야닉의 덩치에서 나오는 힘을 목격한 1 기사단은 주춤주춤 물러나면서도 그를 노려보는 눈에서는 힘이 빠지지 않았다.

    “너희야말로 기사면 입만 놀리지 마라.”

    자신의 주먹이 효과가 있는 것을 확인한 야닉은 위풍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며 1 기사단을 위협했다. 수없이 많은 시체를 보고, 지긋지긋한 피 냄새를 맡으며 수많은 전장을 치러온 야닉에게는 가문에서 선생에게 배운 검술로 별다른 위험 없는 시험을 통과하여 기사가 된 샌님들과는 결이 다른 위압감이 존재했다.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네가 이러면 곤란해지는 건 단장님이라고.”

    헨리를 모욕한 것에 화가 나기는 했지만, 야닉보다는 훨씬 이성적인 주안이었다. 야닉이 휘두른 주먹에 잠깐이기는 했지만, 속이 후련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그들이 그동안 지내왔던 병영이 아닌 황궁이었다.

    단순한 주먹싸움도 황궁에서는 더 큰 싸움으로 퍼질 수 있었다.

    “다신 이런 짓 못 하게 확실히 각인시켜줘야 한다고. 도와줄 게 아니라면 빠져서 구경이나 해.”

    그러나 야닉은 말 그대로 야성이 살아있는 전사였다. 그에게 황궁의 규칙은 통용되지 않았고, 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성인 여성 정도 크기가 되는 거대한 대검을 뽑아 들고 1 기사단을 향해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입으로 떠들 때는 신나더니 왜 이제는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셨나? 기사라면 검으로 말해야 하는데 말이야.”

    야닉의 도발에 반응이 왔지만, 1 기사단의 기사들은 서로를 만류했다. 그들도 분명히 실력 있는 기사였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야닉을 상대로 조심스러워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상대와의 기량 차이를 굳이 검을 섞지 않아도 느끼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무슨 일이지.”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해결될 문제라면 헨리가 골머리를 앓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고충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의논하는 사람이 바로 주안이었다. 1 기사단이 시비를 거는 것은 아주 노골적인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말이 있듯이 1 기사단은 굴러온 돌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내주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1 기사단의 단장인 펠릭스 세티엔은 야닉이 날뛰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선가 갑자기 등장했다.

    “별거 아닙니다. 당신네 기사들이 우리 단장에게 무례하게 굴어서 내가 훈계 좀 해주고 있던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십쇼.”

    높임말을 쓰고 있기는 했으나 말투부터 태도까지 윗사람을 대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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