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그 정보는 확실한 거야?”
“칼 녀석이 직접 전달해준 거야. 틀림없어.”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로 헨리는 대충 유추해볼 수 있었다. 칼이라는 정보원 중 하나가 카지노와 연결되어있는 어둠 길드 중 한 군데에 잠입해있고, 그곳에서 카지노에 숨겨져 있던 어두운 면과 동시에 그곳에 방문을 한 1 황자와 그를 따르는 귀족들을 목격했다는 것이었다.
너무 민감한 이야기로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들으며 반응하는 샐리를 보면 두 사람 사이에 두껍게 쌓인 신뢰 관계를 엿볼 수 있었다.
“좋은 정보 전해줘서 고마워. 일단 그 문제는 좀 더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볼게.”
다른 사람도 아닌 제국의 황자가 엮인 문제였다. 그것도 제국법에서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범죄가 성행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도 샐리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톰에게 수고비를 챙겨주고 돌려보냈다.
“저 말을 전부 믿는 겁니까.”
헨리는 아직도 아득히 먼 얘기처럼 느껴지는 정보에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정보가 확실한 게 아닌 이상 이렇게 찾아올 리 없어요. 제가 아닌 헨리 경에게 왔으니 더더욱 신뢰할만한 정보란 뜻이고요.”
설득력 있는 의견이었다. 찾아온 톰이란 소년이 정말 믿을만한 인물이라는 가정하에 이야기를 진행한다면 말이다. 헨리의 경우 샐리와 그 정보원과의 신뢰 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어 선뜻 긍정의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못 미더우세요?”
“그런 건 아니오, 다만 내가 생각하고 있던 제국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서 그런 것이오.”
대우가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헨리는 자신의 조국에 대해 언제나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그 밝게 빛나는 겉면에 안으로 속에서 썩어 문드러져 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니 그 충격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사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얘기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거 제 옛날얘기를 좀 해도 될까요?”
헨리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표현했다.
그녀의 과거 이야기는 분명 자신의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켜줄 실마리가 존재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
“달려!”
한 남자아이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아이들이 다짜고짜 대장간으로 쳐들어갔다. 그 대장간은 조수랍시고 길거리에서 아이를 데려다가 학대하면서 여러 가지 잡일을 시키는 곳이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나고 자라면서 불합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싶어 하는 한 정의감 넘치는 소년은 아이를 구출해낸 뒤 자신들의 아지트로 향했다.
“너 또 왔냐?”
“응, 또 왔어.”
“내가 오지 말라고 했지. 여긴 너 같은 사람들이 올 곳이 아니야.”
“나 같은 사람들이 뭔데?”
“귀족들.”
소년이 지칭한 귀족들은 빈민가의 절박함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뜻대로 휘두르는 이들을 말했다. 사람 목숨을 짐승보다도 하찮게 여기는 족속들로 소년은 그런 귀족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봤다.
그런 소년의 눈에 저택이 답답하여 탈출했다는 샐리는 그리 탐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소년의 눈에 샐리는 그저 철이 없어 보였다. 자신이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상한 책이나 보고 바깥세상에 대한 낭만을 가지고 나온 것이라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
“싫어!”
“왜 싫은 건데. 이러는 게 정말 재밌어 보여?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절박한 매일을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나도 그 정도는 알아, 페드.”
“내 이름은 페드로야. 멋대로 내 애칭을 부르지 말라고.”
소년은 이 철부지 아가씨를 어떻게 떼어놓을지 심히 고민되었다. 복잡한 골목을 이용하여 뒤쫓는 괴한들을 따돌릴 수 있는 이 낡은 마구간을 버리기에는 그 위험도가 너무 컸다.
원래 그의 성격이었다면 정말 몇 대 쥐어박고 내쫓았을지 모르지만, 어째서인지 동질감이 느껴지는 듯한 그녀의 깊은 골이 보이는 가라앉은 눈동자에 강하게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놈들 여기 있었구나.”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 대장간의 주인과 함께 그동안 소년들이 헤집고 다녔던 곳들에서 봤던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들이 하는 일을 망친 아이들에 대해 단단히 열이 받아 있는 듯한 핏대가 세워져 있는 얼굴에 용감하던 소년들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다 잡아!”
남자들은 이내 마구간을 휘젓고 다니며 발과 주먹을 마구 휘두르며 소년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를 대비하여 비상사태에 탈출할 수 있는 구멍을 미리 마련해두었기에 당황했던 소년들도 정신을 차리고 남자들을 요리조리 피하다가 어린아이 몸집만 한 구멍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젠장! 저 구멍 막아.”
남자들은 아이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구멍을 하나 막았지만, 탈출할 수 있는 구멍은 그곳 하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덕분에 정문이 텅 비어버렸다.
“정문으로 달려.”
끝까지 남아 남자들을 유인하며 다른 아이들을 먼저 내보내던 페드로는 정문이 빈 것을 확인하자마자 샐리의 등을 밀며 소리쳤다.
“잡았다, 이 녀석.”
갑작스럽게 들이닥쳐 날뛰는 건장한 성인 남자들의 모습에 놀라 그 자리에 굳어버린 샐리는 자기 등을 밀쳐준 손길 덕분에 움직이기 시작한 다리로 그대로 달려 정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제 그대로 나가기만 하면 이 혼란스러운 난장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거슬리던 아이를 잡아 잔뜩 흥분한 남자의 목소리에 샐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잡힌 아이는 이미 한 대 맞은 듯 뺨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아악!”
무슨 생각이었을까.
샐리는 그 장면을 보자마자 도망치려던 발걸음을 돌려 그대로 페드로의 멱살을 잡아들어 올리고 있던 남자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팔에서 가장 살이 연해 보이는 곳을 찾아 있는 힘껏 깨물었다.
근육이 없는 살이어서 그런지 어린아이가 깨무는 힘에 생각지도 못한 고통이 수반되자 남자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다른 아이들을 전부 놓쳐 씩씩거리던 남자들은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오자 서로 바라보며 음흉하게 웃기 시작했다.
“저 정도면 괜찮아 보이지?”
“야, 근데 행색으로 봐서는 꽤 사는 집안의 아이 같지 않아?”
“그런 애가 여기서 이런 거지같은 애들이랑 놀겠냐. 분명 내 가게에서 털어간 돈으로 사 입은 옷이겠지.”
구석에 몰린 페드로와 샐리를 노려보는 남자는 귀족이나 서민을 가리지 않고 사채를 빌려주는 사채업자였다. 그 과정에서 몇 번 말도 안 되는 이자로 가난한 이들의 등골을 빼먹은 이력이 있어 페드로가 아이들을 이끌고 그의 집에 잠입해 돈을 털어간 적이 있었다.
그 돈은 지금까지도 페드로만이 아는 비밀 장소에 보관 중이었다.
“여자애는 데리고 가서 팔아먹고, 남자애는 그냥 죽여.”
“잠깐만, 저 녀석도 가꾸고 나면 제법 곱상하게 생겼을 것 같잖아.”
“넌 저 녀석을 길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큭큭, 괜찮은 곳을 알고 있지.”
남자들은 이미 샐리와 페드로의 생존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대놓고 제국에서 금지하고 있는 노예 매매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얘는 그냥 보내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페드로가 입을 열었다. 자기는 어떻게 돼도 괜찮더라도 샐리만큼은 몸 성히 돌려보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꼬마야. 저 여자애가 잘못되는 건 다 너 때문이란다.”
남자 중 하나가 히죽거리며 페드로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광기 가득한 눈동자에 입꼬리가 바짝 올라간 것이 제법 공포스럽게 보일만도 한데, 그때 페드로는 자신의 뒷주머니에 숨기고 있던 최루가스를 남자의 눈에 뿌렸다.
“아악!”
비명과 함께 거구가 바닥에 드러눕자 남자들은 순간 당황해 바닥에 쓰러진 자신의 동료의 상태에 시선이 쏠렸다.
“저것들 도망치잖아. 잡아!”
“젠장, 역시 저 건방진 꼬맹이는 죽여야겠어.”
남자들은 황급히 페드로와 샐리를 뒤쫓았다. 샐리는 숨이 턱 막히기 시작했지만, 자기 손을 꽉 잡은 채 놓을 생각 없이 전력 질주하고 있는 페드로의 뒷모습을 보며 어떻게든 젖 먹던 힘을 쥐어짜서 달리고 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