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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21화 (21/111)
  • #21

    “날 못 믿나요?”

    샐리는 공작가의 저택으로 향하는 내내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주안을 향해 지친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그런 겁니다.”

    “그런 눈은 아니던데. 어쨌든 궁금한 게 있다면 편하게 물어보세요.”

    나름대로 숨긴다고 숨긴 것인데 어떻게 눈치를 챘냐는 듯 당황스러워하는 주안의 모습이 우스웠다. 그런 것 치고는 느껴지는 시선이 꽤 노골적이었는데,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이 정도면 눈치를 못 채는 게 이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녀는 왜 두고 온 겁니까.”

    “날 보호해 줄 사람이 생겼으니까요. 굳이 메리의 안위가 위험할 수도 있는 일에 동참시키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위험할 게 있습니까?”

    “공작부인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위험하죠. 그 사람은 자기 기분이 안 좋을 때 보인 거슬리는 인간들에게 곧바로 앙심을 품거든요.”

    “그래서 공작부인의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두고 왔다는 겁니까?”

    “그렇죠.”

    생각했던 것보다 긴 대화가 끝나자 이내 다시 마차 안에는 고요한 적막과 어색한 침묵만이 남았다. 순환되어야 할 공기의 흐름이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딱딱하게 굳으니 푹신함으로 엉덩이를 보호해주는 쿠션조차도 딱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공녀께서는 절 믿으십니까?”

    저택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샐리는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문 채 창밖만 응시하고 있던 주안이 먼저 말을 건 것이 신기했는지 그의 질문에 순간 반응하지 못했다.

    “그건 무슨 의미인가요.”

    “전 공녀를 아직 신뢰하지 않습니다.”

    “알아요. 대뜸 믿기에는 너무 갑작스럽다는 거.”

    “그런데 공녀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는 제가 신용이 되시는지 묻는 겁니다.”

    솔직한 것이 자기 상관과 똑 닮았다.

    파티를 시작으로 샐리의 이야기는 일파만파 퍼져나갔고, 기사단 역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샐리는 그 뒤로 기사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걷고 안타까움과 동정의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나 하녀인 메리 같은 경우 어디서 나오는 수완인지 황궁의 주방에서 맛 좋은 간식들을 얻어와 기사단에게 선물했고, 메리와 기사단의 급속도로 상승하는 친분 역시 호전되는 관계에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안은 아직 샐리를 완전히 믿지 못했다.

    그녀가 한 일이 자신이 존경하고, 모시는 상관에게 크나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단장인 헨리가 샐리를 바라보는 심경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 두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안은 그러기에는 아직 공녀에게 있어서 의구심이 남는 부분이 있어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믿어요.”

    “믿는다구요?”

    “그럼요, 헨리 경이 못 미더운 사람을 저한테 붙여줬을 리 없잖아요.”

    제법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한 대답은 주안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자신보다 자신의 주군에게 보내는 신뢰가 먹힐 거라는 예상이 맞기도 했지만, 샐리의 마음속에서 헨리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올라갔음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했다.

    ***

    저택에 샐리가 등장하자 문을 지키고 있던 경호 인력들도, 정원을 가꾸고 있던 정원사도 눈이 휘둥그레져 이목이 집중되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말이 있듯이 저택의 사용인들이 최근 있었던 일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공작부인이 분명히 저택에 돌아와 가만히 있었을 리 없었다. 분명히 아주 난리란 난리는 다 쳐놨을 텐데 귀가 어두운 이들도 저택에 있다면 모두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택은 긴장감으로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처음 마차를 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경호 인력들은 샐리가 직접 기사와 함께 마차에서 내리자 곧바로 길을 비켰다. 그들 중에서는 헨리가 공작가를 방문했을 때 직접 호되게 당했던 얼굴들도 있었다.

    눈치를 보던 이들은 헨리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는 동료의 두려움 가득한 눈빛을 보고 곧바로 길을 비켰다.

    “꺄악!”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이 똑똑히 들렸다.

    “또 시작이네.”

    샐리의 중얼거림에 주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또 애먼 하녀를 잡아가며 분풀이를 하고 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조금 이따 가는 게 어떻습니까.”

    이후에도 끊이질 않는 비명과 무언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계속 들려오자 주안도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거슬리면 그저 죽이면 될 뿐인 전쟁터에서의 적보다 저런 귀족 부인들이 더 까다로웠다.

    “지금 가죠.”

    하지만 샐리는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잔뜩 일그러진 공작부인의 얼굴을 빨리 보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너, 네가 감히 내 아들을….”

    노크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무례를 저지르고도 당당하게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온 익숙한 얼굴에 공작부인은 득달같이 샐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곁에 있던 주안에 의해 저지당했다.

    “당신 아들이 왜요?”

    “너 때문에 내 아들이 황궁에 갇혔는데, 왜요?”

    “그야 잘못한 게 있으니까 갇히는 거죠.”

    피해의식도 정도가 있는데 이건 좀 심했다. 아무리 자기 아들을 감싸고 싶어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의 감정과 폭력성조차 조절하지 못하면 후에 그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레너드는 억울해할 일 없이 순전히 본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이었다.

    적어도 황제가 주최한 파티에서만큼은 뭐가 어떻든 본인의 진짜 모습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숨기기는커녕 망나니라는 타이틀과 본인의 뒤를 항상 쫓아다니는 더러운 소문이 모두 사실이었음을 스스로가 직접 시인해 버렸으니 황제의 입장에서도 더는 뒤를 봐줄 필요가 없었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나한테 따지지 말고 황제 폐하한테 가서 따지시죠.”

    샐리 본인은 그저 피해자에 불과했다. 물론 신경을 긁은 것은 맞지만, 어쨌든 레너드가 무차별적으로 행사한 폭력에 당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공작부인은 지금 피해자 보고 왜 사실을 알려 본인의 아들에게 피해를 끼쳤냐는, 이보다 악질일 수가 없는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내 잘못이지. 진즉에 널 팔아넘기든지 해야 했는데.”

    붉게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미친 사람처럼 저주를 퍼붓는 공작부인의 모습은 말 그대로 공포 그 자체였다. 귀신도 이렇게 무섭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작부인은 샐리에게 한이 많이 맺힌 것 같았다.

    “2시간 드릴게요.”

    내심 무서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움츠러든 것을 보이면 오히려 공작부인의 기세가 더 살아날 것만 같았고, 샐리 본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샐리는 공작부인이 뭐라 하던 그냥 본인의 할 말만 하기로 결정했다.

    “필요한 짐을 싸서 살몬 거리에 있는 마차 대여점으로 가세요.”

    공작부인은 처음으로 받아본 통보와도 같은 싸늘한 말에 더 날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직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구분하지 못했고, 자기 아들이 벌인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일말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쫓겨나게 생겼으니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니?”

    “기회를 주는 거예요. 나름대로 가족이었던 사이니 제가 베푸는 마지막 자비라고 생각하세요.”

    정말 의외의 동정심이 생겨 자비를 베푸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정말 맨몸으로 내쫓아내기보다는 여론을 계속해서 본인의 편으로 만드는 데에 있어서 약간의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만큼 보기 좋은 그림이 없었다.

    자신을 학대해온 이들에게도 못되게 굴지 못하고 끝내 보석을 챙겨주고, 스테판 공작가가 소유하고 있는 영지 중에서도 제일 생활이 편한 곳을 골라 보내줬으니 그럴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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