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18화 (18/111)

#18

“한 번쯤은 만나볼 가치가 있어 보이네.”

말 그대로 딱 한 번 정도는 개인적인 만남을 추구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가래가 낀 것처럼 거슬리는 의문이 생겼을 때 샐리는 망설임 없이 그 의문을 정면 돌파하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그런 선택에 있어서 손해를 본 경험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머리를 굴리다가 이제는 좀 머리를 식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야.”

익숙한 남자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불쾌감. 그러나 샐리는 이 불쾌감에 오히려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왔구나?”

“허, 점점 더 건방지게 군다?”

처음 이 파티장에 왔을 때부터 샐리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레너드였다. 지난번 헨리에게 무기력하게 쫓겨나는 모습에서 굴욕감과 함께 그동안 자신에게 꼼짝도 못하던 샐리가 이토록 건방져졌다는 생각에 연신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의 성격상 이대로 넘어가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자신이 느낀 불쾌함을 씻어내기 위해 눈앞에 보이는 그 원인을 당장 해치워야 했다.

“뭐 어때. 이제 곧 스테판 공작이 될 몸인데.”

“크큭. 그런 법이 생겼다고 해서 너 같은 게 정말 공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살면서 반드시 잡아야 할 절호의 기회는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오기를 숨죽이며 기다리던 샐리는 자신에게 찾아온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이미 명분이 충분하다는 것을 레너드도 알고 있었다. 공작의 죽음으로 가문의 위신이 예전만 못한 상황에서 본인의 위상 또한 최근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장본인인 샐리에게 밀렸다.

더군다나 그동안 해온 게 없었으니 평판 이외에도 샐리에게 앞설 수 있는 무기가 전혀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신다면 통곡할 일이네. 애써 키워줬더니 은혜를 갚기는커녕 이렇게 뒤통수를 때리려 하다니 말이야.”

“그것보다는 제 장례식에도 오지 않은 불효막심한 아들 때문에 편히 눈도 못 감았을 걸?”

“이 미친년이!”

장례식에 코빼기도 안 보이고 그 시간에 도박이나 했을 인간이 제 아비를 언급하자마자 역정을 내는 꼴이 우스웠다.

너무나 우스워서 험악한 얼굴의 레너드가 자신의 멱살을 잡았는데도 샐리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웃어? 내가 우스워?”

짜악.

함부로 폭력을 행사할만한 장소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식의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은 독이 되었다. 그러나 머릿속에 이성을 넣고 다니지 않는 레너드였기에 흥분한 순간 바로 손이 올라갔다.

“이러지 마, 레너드. 네가 이러는 걸 알면 안 그래도 편찮으신 공작부인께서 또 쓰러지실 지도 모르잖아.”

“닥쳐!”

또 한 번의 경쾌한 소리와 함께 뺨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샐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네가 이러는 걸 보면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던 것 같네.”

아파하면서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어 보였다. 이제는 샐리의 눈동자에서 범상치 않은 광기가 흐르기 시작했단 것을 느낀 레너드가 오히려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 모습에 기세가 오른 샐리는 성큼성큼 걸어가 더 물러날 곳이 없어 벽에 몰린 레너드를 올려다봤다.

“내가 죽였어.”

“뭐?”

“공작이 정말 단순 사고로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

레너드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내 광기 어린 미소가 사라지고 진중해진 샐리의 얼굴에서 거짓 한 점 없는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레너드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믿기 싫으면 말고. 네가 믿지 않는다고 해서 사실인 일이 사실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닌데 뭐.”

레너드의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오히려 시큰둥해진 태도에 레너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시시각각 변했다.

아무리 봐도 지금 자신은 지금까지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으며 얕잡아봐 왔던 상대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자존심 상한 레너드가 괜히 쌍욕을 퍼부어 봐도 논리도 지성도 없는 행태일 뿐이었다. 샐리는 피식 웃으며 오히려 그의 신경을 더 긁어줬다.

“공작이 없다면 생각보다 쉽게 내 계획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쉬워도 너무 쉽더라.”

당장에라도 칠 것처럼 손을 파르르 떨고 있기는 했지만, 레너드는 핏대가 서 있는 눈으로 샐리를 가만히 노려보고만 있을 뿐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 뜻은 일단은 들어줄 테니 더 지껄여보라는 것으로 샐리의 입장에서 마다할 것도 없었다.

“공작이 투자하고 있던 사업들은 본인의 명성이나 지위에서 나온 힘을 바탕으로 하는 거였으니 생각보다 간단했어. 그리고 왜 항상 본인의 안위에 철두철미한 공작이 왜 호위 없이 헤튼 지방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갔을까 궁금하지 않아?”

스테판 공작의 힘으로 추진하고 있던 몇몇 사업들은 본인의 안위에 문제가 생긴다면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스테판 공작은 평소 자신의 안위에 무척이나 신경을 썼고, 언제나 호위 병력을 대동하고 다녔다.

그걸 잘 아는 레너드의 입장에서도 샐리가 말한 대목은 확실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거기 숨겨둔 여자가 있거든.”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에 레너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본 샐리는 그동안 당해왔던 묵은 체증이 한 번에 싹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네깟 게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다 방법이 있지. 못 믿겠으면 따로 알아봐.”

굳이 정보의 출처를 밝혀 자신의 소중한 정보원들을 위험에 빠트릴 필요가 없었다. 다시 한 번 기세를 살려 멱살을 잡고 위협하는 레너드를 상대로 샐리는 한심하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며 시건방진 대응을 보였다.

“나도 의구심을 가지는 일을 피로 이어진 너랑 공작부인은 몰랐다니 가족이라고 믿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멍청한 건지 모르겠네.”

“그쯤 해둬. 진짜 죽여 버리기 전에.”

“네 손으로 사람을 죽일 깡은 있고?”

샐리는 이보다 더 얄미울 수 없을 정도로 깐족거렸다.

“참 더러운 인간이야. 그렇지? 아내와 아들이 있는 남자가 그렇게 아랫도리를 못 참아서야 되겠어. 얼마나 변태 같았으면 엄마랑 닮았다고 나한테까지 손을 대려 했겠어.”

물론 이 말은 거짓이었다.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는 무대에 정점을 찍을만한 대사. 샐리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고, 복합적인 분노가 쌓인 레너드는 바로 앞에 있는 그녀를 향해 폭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

이미 이성이 날아간 지 오래인 그는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너무도 쉽게 망각해버렸다.

“꺄아아아아악.”

샐리는 입안에 비릿한 쇠 맛의 액체가 생기자마자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리를 지른 지 1초도 채 되기도 전에 헨리가 커튼을 걷고 등장하여 샐리를 향해 다시 한 번 내지르려는 레너드의 주먹을 막았다.

“고마워, 레너드. 이건 진심이야. 멍청하게 태어나줘서 정말 고마워.”

지금껏 속으로만 참아왔던 악담을 내지르고 나니 속이 뻥 뚫리면서 동시에 큰일을 끝냈다는 안도감에 다리가 풀렸다.

“고생했소.”

헨리는 모여드는 인파에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어 사색이 된 레너드를 노려보다가 샐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이가 나가거나 후에 문제가 될 만한 상처는 없는 모습에 안도하며 샐리에게 해야 할 일을 아주 잘 해냈다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헨리의 고생했다는 한마디에 샐리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큰 의미를 느끼며 기댈 수 있게 넓은 품을 허용해준 이 남자에게 의지하여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

폭력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퉁퉁 부은 샐리의 얼굴을 본 헨리는 이성을 잃고 그 자리에서 레너드를 죽여 버릴 뻔했다. 그녀가 자신의 오른팔을 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 않았더라면 당장에 손에 힘을 줘 팔목을 부러뜨릴 생각까지 했다.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제국 최고의 기사인 헨리에게는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파티가 시작되기 전 행여나 레너드에게 조금의 위해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던 샐리의 모습이 떠오르자마자 헨리는 날아갈 뻔했던 이성을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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