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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17화 (17/111)
  • #17

    작렬하는 태양처럼 붉은 머리칼에 붉은 장미로 색을 입혀놓은 것 같은 고혹적인 입술. 오뚝한 코와 더불어 살짝 찢어진 눈매가 순식간에 사람을 홀렸다. 또한 몸매가 여실히 드러나는 그녀의 드레스 코드와 어울려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의 남자 귀족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남자들보다는 샐리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 증거로 우연인지 의도한 것인지 눈을 마주치자마자 샐리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물론 샐리는 무슨 꿍꿍이속인지 모를 그녀의 웃음과 관심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직접적인 비교를 하자면 호탕하고 구수한 느낌의 내셔스 백작과는 그 느낌이 완전히 정반대였다.

    “어머나, 공녀님?”

    깜빡 잊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어서 샐리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껄끄러운 존재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짧고 담백한 인사.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확실히 표명하는 냉랭한 표정까지 완벽했으나 클로에는 그것을 가볍게 무시했다.

    “지난번에는 제가 무례했던 것 같아요. 늦었지만 지금이나마 사과드릴게요.”

    클로에는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시했다.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성녀인 클로에가 아무 이유 없이 파티장에 왔을 리 없었다. 분명히 황제와 그의 정부 사이에 축복을 내려주기 위해 자리를 한 것이었다.

    “저한테는 축복을 내리는 힘이 없는데도 이런 부탁이 자꾸 들어오더라구요.”

    “그만큼 상징적인 존재시니까요.”

    “그런가요?”

    샐리는 자신이 가진 치유력과 성녀로서의 지위가 별거 없다는 듯한 클로에의 반응에 울컥 화가 났다. 여성 혼자 힘으로 이런 식의 권위를 누릴 수 있는 이는 제국의 역사를 찾아봐도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힘이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다니.

    샐리는 그녀를 철부지쯤으로 여겼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영광이 너무도 당연해서 누군가는 염원하는 그 힘이 원래부터 있었기에 그 소중함을 모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좋은 힘이죠. 남을 도울 수도 있고, 특별한 자리에까지 오를 수도 있으니까.”

    샐리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자신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 권능인지 직접 말해줘야 아냐는 식의 날카로움이 묻어났다.

    “말씀하신 대로 강력한 힘이죠. 절대 남에게서 숨길 수 없는 특별함도 있구요.”

    어째서인지 말을 마치고 난 뒤의 클로에의 표정에서 감히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은 사정이 있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샴페인 좋아하시나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해진 얼굴. 샐리가 첫인상에서 느꼈던 것처럼 머리가 꽃밭으로 정갈하게 꾸며져 있는 성녀의 모습이었다.

    “좋아하는 건 아닌데 맛있네요.”

    술이란 것을 예전에 먹어본 기억이 있었다. 당시에 그녀의 혀를 마비시키다시피 화끈거리면서 쓰기만 한 역겨움에 학을 뗐다. 하지만 지금 먹고 있는 샴페인은 톡 쏘는 달콤함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샐리는 그 맛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카나페랑 같이 드셔보세요.”

    “카나페?”

    “저기 보이시나요?”

    클로에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다양한 음식들이 구비되어있는 넓은 테이블이었다. 술과 함께 곁들일 수 있는 가벼운 다과 정도 돼 보이는 음식들이었는데, 클로에가 추천한 것은 크래커에 치즈와 햄이 올라와 있는 카나페였다.

    “전 폐하를 봬야 해서 이만 가볼게요. 대화 즐거웠어요.”

    대화를 하면 얼마나 했다고 즐거웠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괜히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샐리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지나가던 웨이터에게서 샴페인을 한 잔 더 받은 뒤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카나페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괜찮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으나 햄의 짭조름함과 치즈의 느끼함 그리고 크래커의 바삭한 식감이 잘 어우러졌다. 카나페를 먹은 뒤 샴페인을 한 모금 들이키니 달콤한 탄산의 맛이 혀를 깔끔하게 만들어줬다.

    “스테판 공녀 맞나요?”

    본인의 주량을 모르기에 술을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샐리는 못 보던 다양한 과일들을 하나씩 맛보며 나름대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니 홀가분한 것이 이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나 자유의 시간은 생각보다 더 짧았다. 샐리는 자신을 부르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의아해하며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에 띄는 화려한 적발과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은 여성.

    축복 의식이 언제 끝난 것인지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샐리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몰리 캐스터예요.”

    “가문에 여신의 가호가 있기를. 스테판 공작가의 샐리 스테판입니다.”

    샐리는 자신에게 건넨 손을 애써 모른 척하고 한껏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내가 여기 왜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궁금합니다.”

    “스테판 공녀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왔어요.”

    “저에게 잘 보이고 싶다니요?”

    원하는 대어는 안 오고 자꾸 꼬이는 피라미를 보는 낚시꾼의 심정이었지만, 샐리는 최대한 성심성의껏 대답을 하며 그녀와의 대화에 관심이 있는 척을 했다.

    “폐하께 들어서 알아요. 공작자리를 원하고 있다고.”

    “맞습니다.”

    “화나지 않아요?”

    황제가 대화 내용을 함부로 유출하였음에도 불편한 기색은커녕 오히려 더 평온해지는 얼굴로 덤덤하게 사실을 인정하는 샐리를 보는 몰리의 눈동자가 놀라움에 확대되었다.

    “그냥 공녀가 공작이 된다면 날 좀 좋게 봐줬으면 해서요. 여자의 전성기는 영원하지 않으니까.”

    몰리가 언급한 여자의 전성기라는 것은 자신의 미모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제아무리 외모를 가꾸는 데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시간의 흐름은 막을 수 없었고, 사람의 마음이 언제 변할지도 몰랐다.

    “그냥 가능성 있어 보이는 곳에 투자하는 거라 생각해요. 공녀는 나한테 빚이 있으니까 날 도울 의무가 있잖아요.”

    “빚이라니 그게 무슨.”

    “나 덕분에 공녀가 공작자리를 탐낼 수 있게 된 거잖아요. 맞죠?”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존재가 없었다면 황당한 법안이 제정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몰리는 몇 번을 더 빚에 대해 언급을 하며 몰아붙였고, 샐리가 따로 찾아가겠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놔주며 자리를 떴다.

    ***

    “하아, 피곤해.”

    아직 진짜로 해야 할 일은 시작조차 못 했는데 예상치 못한 불청객들의 등장으로 벌써 피로도가 제법 쌓여 몸이 무거웠다. 다른 것보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면을 클로에와 몰리에게서 봤기에 샐리는 그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가 더 아파왔다.

    본인의 앞가림이 더 중요한 시기에 괜히 귀찮을 것 같아 말을 아꼈지만, 샐리는 클로에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호기심이 생겼다.

    무언가 사건의 냄새를 잘 맡는다고 해야 할까.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만 했던 만남에 그리 좋지 않은 첫인상이었지만, 그녀가 숨기고 있는 사정들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테라스에 나오자 맞아주는 머리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에도 이미 머리를 굴리느라 가동되는 뇌의 과열은 식을 줄 몰랐다.

    ‘확실히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사연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얼굴을 가리는 그늘의 깊이에서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 샐리는 그녀와 만났던 날 들었던 자신의 기운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출신이 불분명한 성녀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느끼기 시작했다.

    [황궁 정원에 있는 호수에 하늘에서 빛이 떨어지더니 한 여인이 물에서 떠올랐고, 알고 보니 그 존재가 성녀였다.]

    아이들이 읽기 좋은 동화책에 나와 있는 구절로 신화와도 같은 현실성 없는 이야기였다. 여신의 존재는 언제나 목소리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을 뿐. 그 신성한 존재는 직접 인간 세상에 관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이 이야기는 황궁 내에 꽤 많은 이들이 목격했기에 사실로서 믿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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