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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15화 (15/111)
  • #15

    생각과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 바로 레너드였다. 조금 위험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가 조급해하는 것을 알았으니 다음은 덫을 놓고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 생각보다 순조롭게 일이 진행될 것 같다는 생각에 방금의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샐리의 얼굴이 밝게 개었다.

    “자칫 잘못하면 큰 화를 당할 뻔했소.”

    “무사히 넘겼으니 됐잖아요. 마침 당신도 곁에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샐리가 언질 줬던 대로 레너드가 바로 반응을 보인 것은 호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헨리는 자칫 잘못하면 큰일을 당할 뻔했는데도 별거 아닌 일로 떠넘기는 것에서 귀족 영애라 볼 수 없는 일종의 위화감에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대에게 이 정도는 그리 큰 위기가 아닌 건가?”

    “당신 말대로 위험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손쉽게 넘겼고 원하는 것도 얻었잖아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라는 말이 있듯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보통의 귀족 영애라면 이런 상황에서 벌벌 떨기 마련이었다. 전쟁에 참여하는 용맹한 장군들도 죽음을 앞에 두고 아연실색하며 기절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일반적인 귀족 영애라면 흉기로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 이리 침착할 수가 없었다.

    물론 샐리 스테판이라는 여자가 일반적인 환경에서 자란 인물이 아니란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분명히 자신에게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더 있다는 것을 아는 헨리는 그녀에 대한 궁금증에 있어서 점점 조급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군. 그대는 이런 상황을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야. 그렇지?”

    “그렇다고 해둘게요. 그보다 이제 볼일 끝났으면 저랑 어울려 주시죠. 예비 남편님.”

    샐리는 자연스럽게 낀 팔짱을 보석 가게 쪽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어수선하던 주변 분위기가 어느새 정돈되었다가 팔짱을 낀 채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며 보석 가게로 향하는 두 사람을 보며 이내 다시 떠들썩해졌다.

    “즐거워야 할 날에는 즐거운 이야기만 해요. 아까 같은 일은 그냥 가벼운 해프닝으로 넘기고.”

    쉽게 말을 걸기 힘든 씁쓸한 표정에 헨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허공을 향하고 있는 아련한 눈빛은 그녀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걸 읽은 헨리는 그녀의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본인에게 숨기고 있는 남아있는 비밀들.

    관심을 가질 만한 일들이 많이 없었을 뿐 관심이 생겼다 하면 그 관심 분야를 완벽히 통달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헨리 크리스토퍼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새롭게 통달하고자 하는 이가 생겼으니 그것이 샐리 스테판이었다.

    “이 반지가 마음에 드는 데 어때요?”

    “그럼 그걸로 하시오.”

    헨리는 아까의 일은 이미 머리에서 지운 듯 직원이 소개해주는 반지를 착용하며 즐기는 샐리의 모습에 그냥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어떻게 파티에 가서 있는 것보다 가기 전에 준비하는 게 더 피곤하니.”

    몰리 캐스터.

    황제의 정부이자 현 캐스터 공작가의 공작. 그녀의 생일파티가 처음으로 황궁에서 열리는 공식적인 자리가 되었다. 특히나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직접 주최하고 황실의 이름으로 초대장이 보내졌으니 특별한 명분이 없는 한 참석을 거절할 수 없었다.

    “힘드셔도 해야 해요.”

    샐리의 불평에도 코르셋을 조이고 있는 메리는 단호했다. 안 그래도 잘록한 허리가 더 얇아졌다. 몇 시간의 목욕과 치장 끝에 피부도 도자기처럼 매끈했다.

    이렇게까지 꾸밀 일이 없던 샐리는 야무진 메리의 손길에 한 번 감탄하고, 자신의 피부를 만져보면서 느껴지는 매끈매끈한 감촉에 한 번 놀랐다.

    “이런 것도 할 줄 알았어?”

    “그럼요, 메이드 일도 다 공부가 필요한 법이라고요.”

    메리는 동화 속 공주님의 이야기를 항상 동경해왔고, 그 주인공이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인 샐리가 되기를 언제나 바라왔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낭만을 위해 메리는 여기저기서 정보를 구하며 공부했고, 갈고닦아왔던 미용 실력이 오늘 이 자리에서 발휘되는 것이었다.

    “오늘 주인공은 따로 계시지만, 전 아가씨가 제일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예쁜 사람은 넘치고 넘쳤어.”

    “넘치고 넘친 예쁜 사람들 속에서도 아가씨가 제일 예뻐요. 아니, 예뻐야 해요.”

    의욕으로 활활 불타고 있는 메리의 눈을 보니 이건 말릴 수가 없겠다 싶었다.

    “자, 이제 마무리 화장 들어갈게요.”

    “또 있어?”

    처음에는 좀 즐기기도 했다. 따뜻한 욕조 속에서 다부진 손길의 마사지를 받으니 인생을 살아오며 쌓여있던 모든 피로가 다 사라지는 것같이 개운하고 말끔한 기분이었으니까. 그런데 넘어도 끝이 없는 관문에 이제는 정말 모든 걸 팽개치고 침대에 그냥 대자로 뻗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심정을 허용할 리 없는 메리였다.

    “움직이지 마세요.”

    메리는 자신의 손으로 샐리의 턱을 고정한 뒤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입술에 립스틱을 발랐다. 그렇게 또 한참을 공들여 꾸미고 나서 목에 담이 올 정도가 되어서야 예술의 혼이 불타오르던 메리의 작업이 끝이 났다. 그리고 그제야 샐리는 몸의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어떠세요?”

    조금 전까지 대담하면서 의욕적인 모습은 어디 가고 행여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떡할지 걱정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긴장으로 인해 입술까지 떨리는 모습이었다.

    “우와, 이게 진짜 나야?”

    솔직히 샐리는 내심 놀라기는 했지만, 지금과 같은 반응은 메리를 위해 과장을 좀 보탠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과장을 보태도 될 정도로 피부 톤과 이목구비에 맞게 제대로 꾸며졌다.

    “휴우.”

    칭찬을 받고 나서야 안심이 된 듯 메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샐리는 그런 메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연신 그녀의 솜씨를 칭찬했다.

    새하얀 피부에 묻히지 않도록 그린 아이라인. 갓 익은 사과처럼 탐스러워진 입술 색. 향을 넣은 탕에 몸을 담그고 있어서인지 코끝을 자극하는 향긋한 꽃향기까지 완벽했다. 이제는 미리 골라놓은 드레스와 보석들을 착용하기만 하면 됐으니 준비도 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모습을 가장 먼저 보여드려야 할 분이 따로 계시잖아요.”

    공작가의 저택을 빠져나온 이후로 얼굴에서 웃음꽃이 사라지지 않던 메리였지만, 오늘은 더 들떠 싱글벙글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헨리를 데리러 갔다.

    “어떠세요? 정말 아름다우시지요?”

    이 정도면 거의 대답을 강요하는 수준이 아닌가 싶었다. 처음에는 기사단의 분위기에 대한 적응을 걱정했지만, 샐리에게 굳이 접근하지 않던 기사들도 메리와는 서슴없이 지내는 것을 보아하니 헨리가 저렇게 잡혀 들어오는 그림도 볼 수 있었다.

    “어때요? 괜찮나요?”

    샐리는 내심 칭찬을 기대했다.

    단순히 본인이 예쁘다는 칭찬을 받고 싶다기보다는 공들인 노력과 자신을 이렇게 꾸며준 메리의 솜씨에 대한 칭찬이 듣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샐리는 자신을 보자마자 눈을 피하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는 이상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헨리를 의아하다는 듯이 멀뚱멀뚱 쳐다봤다.

    “예비 남편님, 그렇게 멀뚱히 서 계시지만 마시고 어떤지 얘기 좀 해주세요.”

    샐리의 말에 힐끗 그쪽을 쳐다본 헨리였지만, 시선을 맞춘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답답해진 샐리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바로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대답이 나올 때까지 질문을 던졌다.

    “손으로 얼굴은 또 왜 가리고 있는 거예요.”

    “잠깐!”

    제아무리 제국 최고의 기사라지만,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는 샐리의 과감하면서도 돌발적인 행동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 바람에 애써 감추고 있던 붉게 타오르고 있던 부끄러운 얼굴을 샐리에게 들킬 수밖에 없었다.

    “아름답소.”

    언제나 올곧은 황금빛 눈동자가 화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에 흐물흐물해졌다.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대놓고 그의 머릿속의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났는데도, 어쨌든 자신에게 던진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꿋꿋하게 칭찬했다.

    “어…. 고마워요.”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괜히 긴장되면서 먼저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그런 어색한 상황은 헨리에게도, 샐리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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