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기사님, 기사님!”
뭐라 해명하기도 전에 샐리는 신이 나서 헨리를 부르며 달려오는 한 무리의 아이들에게 순서를 뺏겼다. 들리기로는 헨리 본인이 공식적으로 후원하는 기관 이외에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 같았다.
“예전에 이 녀석들끼리 숲에 놀러 갔다가 길을 잃었던 것을 도와준 적이 있었소.”
헨리는 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화창한 오늘 날씨보다도 더 화창하게 열린 그의 표정에 샐리는 신이 나서 안부를 묻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면서도 본인이 더 신이 난 것 같이 들뜬 목소리의 헨리를 번갈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과거 저택을 몰래 빠져나와 외출할 때 입었던 허름한 복장의 기억이 헨리에게 매달려 떨어질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서 향수로 느껴졌다.
“잠깐 시간을 내어줄 수 있겠소? 아무래도 아이들이 그냥 떨어질 것 같진 않아 보여서.”
그때를 틈타 헨리에게 달라붙은 것은 이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하던 이들 중 일부가 헨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감사했던 일들을 털어놓으며 쑥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가운데에 두고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인파 사이에 끼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도 재밌었지만, 황족 출신의 기사인 그가 서민들과 이리 격 없이 인사를 나누는 것에서 샐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느끼는 바가 많았다.
“오랜만이다?”
그러나 그런 감상에 오래 젖어있을 새도 없었다. 샐리는 자신의 허리춤을 겨냥하고 있는 서늘하면서도 날카로운 감각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랜만에 만난 오라버니인데 그런 표정밖에 못 지어?”
익숙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악취와도 같이 더러운 기분. 샐리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인물이 레너드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오랜만이네.”
“오랜만이네?”
칼을 가까이 대고 있으니 칼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이리도 침착하다니. 레너드는 침착하다 못해 시큰둥한 샐리의 태도에 당황스러웠으나 이내 본인에게 서슴없이 말을 놓은 그녀에 대한 분노로 서서히 말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말이 짧다?”
한때 샐리가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지칭했을 때 레너드는 곧바로 폭력을 행사했다. 어디 감히 천한 것이 자신의 여동생인 척 하냐며 인정사정없이 주먹을 날렸다. 샐리는 그날 메리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을 수도 있었다.
얼굴 곳곳에 멍이 들었고 입가와 코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처참한 몰골을 목격하자마자 메리는 그 자리에서 레너드를 샐리에게서 떼어냈다.
그 일로 목숨을 잃을 뻔한 메리는 공작이 그냥 넘어가라며 레너드를 잘 타일러 겨우겨우 살아남았다.
그 이후로 샐리는 감히 레너드를 두 눈으로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괜히 말을 걸지도 않았고, 그가 혹시나 말을 건다면 존칭과 높임말을 써가며 어렵사리 넘겨왔다. 아직도 그 기억이 선명한 레너드는 지금의 샐리가 참으로 건방져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남매 사이에 말을 높이는 게 더 이상할걸?”
“하,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안 나는 거냐. 아니면 네 애인 믿고 이렇게 까부는 거냐.”
트라우마로 남았을 그 일이 아무리 오래전 일이라고 한들 기억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자신의 허리춤에 갖다 대고 있는 칼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은 절대 티를 내면 안 됐다.
그 순간 이 극악무도한 망나니가 더 자신감을 얻어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그래, 네 말대로 오랜만에 만났으니 남매간에 오붓한 대화가 필요하지 않겠어?”
“난 너랑 별 할 얘기 없어.”
“야! 건방지게 구는 것도 적당히 해. 지금 너한테 관심 두고 있는 사람도 없고, 여기 나 혼자 있는 것도 아니야.”
그 말에 샐리는 힐끗 눈치를 보며 레너드의 뒤에 있는 골목을 살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이는 몇몇 인영은 그의 말이 허세가 아님을 확인했다.
분명히 충분히 위협이 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레너드는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칼을 쓸 용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먹을 쓰는 거야 감정에 못 이겨 우발적으로 행사하는 것이더라도 칼은 조금만 잘못 다뤄도 사람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아무리 망나니라고 허세를 부려봤자 이 자리에서 칼로 누군가를 찌른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 점을 공략할 생각에 샐리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누구십니까.”
정중한 말투였지만, 목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수많은 전쟁을 겪어온 기사답게 불온한 기를 읽는 능력이 발군이었다. 헨리는 긴장감에 두 손을 꽉 쥐고 있는 샐리와 자신의 등장으로 당황스러워하는 남자를 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쳇.”
레너드가 손에 들고 있는 칼은 위협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에 최대한 띄지 않으려고 허리춤에 칼을 댄 채 여기저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협박을 통해 샐리를 골목으로 데려가 준비한 남자들을 시켜 그녀의 몸을 더럽힐 계획이었다. 덤으로 얼굴에 흠집까지도 낼 생각이었는데, 그의 계획은 미리 눈치를 채고 등장한 헨리에 의해 완전히 산산이 조각났다.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뜨려던 그때였다.
“레너드 스테판.”
레너드는 자신의 풀네임을 부르는 헨리의 목소리에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내 사랑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려 한 거지?”
압도적인 분위기였다.
분노가 느껴지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한 황금빛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기에 레너드는 그 자리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하지만 그 상황에도 머리를 굴려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자신의 허리춤에 숨기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 어색한 동작을 놓칠 헨리가 아니었다.
“너….”
당장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눈으로 성큼성큼 레너드에게 다가가던 헨리는 자신을 붙잡는 여린 손길에 저지당했다. 너무나도 미약한 힘이기에 신경 쓰지 않고 뿌리쳤어도 됐지만, 그 손길의 주인이 샐리인 것을 아는 이상 헨리는 감정보다는 이성을 먼저 찾았다.
“너무 흥분했어요.”
샐리는 사람들의 이목이 자연스럽게 헨리를 쫓아 레너드에게 집중된 것을 확인했다. 이 이상 감정적인 행동은 필요가 없었고, 그녀가 달성코자 한 소기의 목적도 이미 달성한 상태였다.
“이만 저택으로 가는 게 어때요? 공작부인께서 쓰러지셨다는데.”
든든한 아군을 얻은 샐리는 일부러 레너드의 신경을 더 긁었다. 그는 이런 일은 절대 잊지 않고 속에 쌓아두었다가 나중에라도 어떻게든 풀어내려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도발은 그가 후계자로서 부적격한 인물임을 판별할 자리에서 요긴하게 쓰일 하나의 장치였다.
“넌 나중에 두고 보자.”
삼류 악당이나 할 법한 대사였다. 샐리의 곁을 지키는 든든하고 강력한 기사인 헨리에게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면서 상대적으로 본인보다 약자에게는 어떻게든 발악하는 모습이 찌질하기 그지없었다.
금발에 푸른색이 감도는 눈동자는 스테판 가의 상징으로 이를 모르는 수도의 백성은 없었다. 하나둘 자신을 알아보고 쑥덕이는 눈초리에 레너드는 샐리를 잠시 노려보다가 골목으로 황급히 도망쳤다.
“괜찮소?”
레너드가 사라지자마자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힘이 풀린 목소리의 헨리가 샐리의 양어깨를 살포시 잡은 채 안색을 살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접촉에 주변에 있던 구경꾼들은 물론이거니와 샐리 역시도 깜짝 놀라 가까이 보이는 헨리의 잘생긴 얼굴에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괜찮아요.”
“이렇게 대범하게 나올 줄은 몰랐소.”
헨리는 본능적으로 레너드가 허리춤에 황급히 숨긴 것이 흉기란 것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샐리의 몸 구석구석을 확인하여 상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이 된 듯 그제야 샐리를 자신의 품에서 놓아줬다.
“저도 이렇게 대놓고 접근할 줄은 몰랐어요.”
“그 말은 그대의 오라비, 아니 스테판 공자를 이곳에서 만날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소만.”
“어느 정도 의도한 건 맞아요. 그런데 이렇게 급하게 나타난 것을 보면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를 채고 위기의식을 느낀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