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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13화 (13/111)

#13

가벼운 말다툼에서 시작된 싸움은 서로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결국 주먹다짐으로까지 번졌다. 담배 연기로 자욱한 실내에서 술 냄새를 풍기는 두 남자의 싸움. 주변 사람들은 그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환영하면서 흥미진진하게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크하하, 오늘은 운이 좋구만.”

구경꾼들이 하나둘 모이면서 싸움 구경이 한창인 와중에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큰돈이 걸린 도박에 혈안인 한 남자가 있었다. 바로 스테판 공작가의 장남인 레너드 스테판이었다.

제 아비의 죽음을 전해 들었으면서도 집으로 들어가기는커녕 사채를 끌어다 쓰며 도박에 혈안인 그였다.

“젠장, 오늘 대체 얼마를 잃은 건지.”

“딸 때가 있으면 잃을 때도 있는 법이지. 오늘은 내가 딸 차례라고.”

귀족, 그것도 공작가에 어울리는 격식과 예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탐욕스러운 눈으로 자신이 딴 칩을 긁어모으며 경박하게 웃는 것이 이미 공작가의 장남이 아닌 천성이 도박꾼인 사람처럼 보였다.

“어이, 너드.”

한참 기분 좋게 웃으며 다음 게임을 시작하려던 와중에 레너드는 자신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테판 공작가의 상징인 금발과 푸른 자수정의 눈동자가 빤히 보이는 외모로 이 장소를 자주 들락날락하는 이들은 모두 이 남자가 망나니로 소문이 난 스테판 공작가의 레너드 스테판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있던 레너드는 자신의 수하이자 친구인 막시가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것에서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다.

“무슨 일이야, 막시.”

“자네 여동생 말일세.”

“여동생?”

자신에게 여동생이 어디 있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던 레너드는 이내 샐리의 존재를 기억해냈다. 하지만 이내 막시에게 그 계집년이 무슨 사고라도 쳤냐는 식으로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다시 도박에 임하려 했다.

“결혼할지도 모른다더군.”

“결혼?”

여기까지도 레너드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애초에 샐리는 공작이 괜히 싸고돌면서 공작가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일 뿐. 그게 아니었다면 자신의 어머니인 공작부인이 진즉에 어디 귀족가로 팔아넘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레너드는 공작이 죽자마자 바로 혼처를 알아본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감탄하면서 귀찮다는 손짓을 보이며 자신에게 쥐어준 카드 패를 훑었다.

“결혼 상대가 그 크리스토퍼 경인데도?”

상상도 못했던 인물의 등장에 레너드가 카드를 훑어보던 시선을 막시에게로 옮겼다. 그 두 사람의 관계를 자신의 어머니가 유도했을 리 없다는 확신 아래에 흥청망청하던 그의 눈빛이 순간 난폭하게 돌변했다.

기분 나쁜 상상.

도박에 빠져 살고 있다고는 해도 막시를 통해 중요한 소식들을 듣고는 있었다. 다만, 언제나 일관된 태도로 그 뉴스들이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하던 게임이나 마저 하던 그였다.

그러나 최근 제국에서 새로 제정된 법에 대한 뉴스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시작된 불편한 시나리오에 손에 쥐고 있던 카드 패를 테이블에 집어 던졌다.

“그거 사실이야?”

“내가 자네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겠나. 더군다나 신문 기사에도 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난리도 아닐세.”

제아무리 망나니라고 해도 나름대로 공작가의 영식 정도 되는 인물인 만큼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았다. 순리대로라면 당연히 자신의 자리가 되어야 할 공작가 당주의 자리가 생각도 하지 않았던 인물에게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레너드는 이를 뿌득 갈았다.

“자네 여동생을 만날 거라면 굳이 멀리 갈 필요 없네. 지금 크리스토퍼 경과 함께 로튼 거리에 있다더군.”

“하.”

당장 저택으로 달려가 건방진 여동생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생각을 하던 레너드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기가 차는 소식들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원래였다면 저택 밖으로 나설 수가 없는 몸인데 당당히 이렇게 외출을 하다니. 조용히 구석에 몸을 숨기며 살아왔지만, 죽지 않고 살아있던 샐리의 반항적인 눈빛이 떠올랐다. 결국 레너드는 도박장에서 나서 로튼 거리로 향했다.

***

“인기 많으셔서 좋겠네요.”

통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꼭 한 번씩 돌아보며 헨리에 대해 아는 척을 했다. 특히, 그 사람들 중 대부분이 여자였다는 사실에 샐리는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질투하는 거요?”

“제가 질투를 왜 하겠어요. 그냥 우리 둘은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처럼 보여야 하니 저런 시선이 조금 불편할 뿐이죠.”

“그건 그대도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베일에 싸인 공녀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소문에 샐리 역시도 많은 이목을 끌고 있었다.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기로 소문난 헨리 크리스토퍼를 반하게 만든 여인은 어떻게 생긴 것인지 그녀 역시도 만만치 않은 이목을 끌었다. 물론 헨리를 힐끗 보며 지나가는 많은 여인들은 옆에 붙어있는 샐리를 그리 곱지 않은 시선으로 훑어보며 자기들끼리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눴다.

“저런 관심이라면 전 필요 없네요.”

“나도 마찬가지요.”

사람들의 시선이 끌릴 것이란 건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두 사람의 생각보다도 더 과한 관심에 이제는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참, 어제는 너무 과했던 거 알죠?”

샐리는 방을 가득 채웠던 드레스 지옥을 떠올리며 소름이 돋는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특히나 방문한 디자이너와 함께 자신의 드레스를 고르는 데 열과 성을 다하는 메리 덕분에 식사도 거른 채 그 많은 드레스를 한 번씩 다 입어보았다.

그러나 이번 일정은 파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닌 제국의 거리를 거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샐리는 화려한 옷들을 젖혀두고 하얀 원단을 바탕으로 연파랑의 레이스와 리본이 가슴 부분과 치마 아랫단을 장식하고 있는 무난한 원피스를 선택했다.

“그대가 좋아하는 옷을 모르니 다 준비해봤소.”

“무슨 파티를 여는 것도 아니고 길거리를 나가는 데 그런 드레스들을 준비해요?”

“어쨌든 그 덕분에 황궁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니 그거면 되지 않았소. 너무 뭐라 하지 마시오.”

그런 엄청난 양의 드레스를 옮기는 데 기사단의 인력까지 소비되었으니 헨리가 스테판 공녀에게 푹 빠졌다는 이야기들로 황궁이 떠들썩했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사이에 대한 좋은 소문이 퍼진 것이기 때문에 샐리도 이 이상 핀잔을 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샐리의 물음에 헨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손가락으로 딱 봐도 화려해 보이는 가게를 가리켰다.

“저긴 캐스터 가에서 운영하는 보석 가게잖아요.”

“요즘 수도에서는 연인끼리 커플링이라고 서로의 이니셜이 새겨진 반지를 나눠 끼는 것이 유행이라고 해서.”

방금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드레스로 핀잔을 들은 터라 헨리는 괜히 샐리의 눈치를 살피며 자기 부하들에게 조언받은 충고를 토대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확실히 괜찮은 생각이긴 해요.”

사람들의 이목이 쏠려있는 지금.

헨리가 사랑하는 자신의 여자 샐리 스테판을 위해 제국 최고의 보석 가게에서 반지를, 그것도 연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커플링을 맞춰 자신의 손가락에도 반지를 끼운다면 엄청난 화제가 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샐리 스스로도 너무 계산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두 사람을 잇고 있는 관계가 그런 것이니 어쩔 수는 없었다.

다만, 샐리는 조금 전 괜히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그렇고 부하들의 충고를 들으면서 어설프기는 하지만 이렇게 노력하는 헨리가 귀엽게 보이기 시작했다.

첫인상부터 말투까지 딱딱하기 그지없는 남자였다. 그런데 그런 바위 같고 빈틈이 없어 보이던 그가 어제, 오늘 허당 같아 보이는 것에서 샐리는 자기도 모르게 눈으로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한 헨리의 표정을 따라가며 입꼬리가 살포시 올라갔다.

“드레스보다는 보석을 선호하나 보오.”

“네?”

“기분이 좋아 보이길래. 지금 그렇게 웃고 있지 않소.”

그의 말에 샐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만지며 입꼬리가 올라갔던 것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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