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12화 (12/111)

#12

“그대는 비밀이 많은 여자로군.”

신기하게도 신문을 보는 사람들은 그 사진을 어떻게 찍은 것인지 전혀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그동안 비밀스럽게 감춰지던 스테판 공녀와 그런 스테판 공녀가 제국 최고의 기사인 헨리 크리스토퍼와 연인 관계라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

“황궁에 함께 방문하였으니 소문이 날 거란 건 알아요. 하지만 이것만큼 수도 전체에 우리 둘 사이를 확실하게 각인시키기는 힘들었을 거예요.”

“그 부분은 나도 이해하오. 다만 미리 언질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아….”

모든 것을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두 사람은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이렇게 함께하는 사이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일언반구도 없이 진행한 것에 대해서는 섭섭할 수밖에 없었다.

축 처진 목소리와 상처를 받은 얼굴. 샐리는 섭섭해하는 티가 팍팍 나는 그의 모습에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 거대한 맹수와도 같았던 그의 형상이 이제는 주인에게 외면받는 강아지 정도로 느껴졌다.

“미안해요.”

그 모습을 봤다면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절대 무너질 리 없는 단단한 바위 같았던 이 남자가 이토록 서운해 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니 샐리는 본인이 정말로 큰 잘못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은 제가 잘못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당신과 상의하든 미리 언질이라도 주든지 해야 했는데, 좀 이기적이었네요.”

서운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이렇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았다. 헨리는 괜히 분위기가 더 처지기 전에 아직 남아있는 의문도 해결할 겸 화제를 전환했다.

“그럼 이제 이렇게 사진까지 실어 가며 수도 전역에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를 퍼뜨린 이유를 말해줬으면 하는데.”

“우리 둘의 관계가 빨리 퍼졌으면 하는 것도 있어요. 하지만 그거보다 더 중요한 건 이건 일종의 대어를 낚기 위한 미끼라는 거예요.”

“미끼? 무엇을 낚기 위한 미끼라는 거요.”

아리송한 말에 헨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결혼한다고 해서 제가 공작가를 바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결혼은 필요한 조건 중 하나이지 그것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헨리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인물에 그녀가 어째서 신문에 두 사람의 이야기를 싣는 선택을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대의 오라비를 부를 생각이군.”

“누가 누구의 오라버니라구요?”

샐리는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완전히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가의 망나니와는 실제로 피도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을뿐더러, 그런 난폭한 인간은 단 한 번도 자신과 동격의 존재로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테판 가의 장남을 불러낼 미끼인 건가.”

“맞아요. 어쨌든 제가 공작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꺾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그렇군. 그런데 굳이 이렇게 해서까지 그를 불러낼 이유가 있나?”

“그냥 자극을 주면서 조급하게 만드는 거죠.”

그가 얼른 공작가로 복귀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 줘야 했다. 그래야 그가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자신과 비교해가며 더더욱 부각 될 테니 말이다. 이미 엉망진창인 공작가를 손에 넣는 것은 어떤 뚜렷한 성과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저 엉망진창인 인간들보다 본인이 더 적합한 인물이라는 것만 사람들의 머릿속에 심어두기만 하면 될 뿐.

“들리기로는 성정도 괴팍하고 질이 안 좋다고 하던데 괜찮겠소?”

스테판 공작가에 대한 조사는 자신의 부하인 주안이 대신했다. 그리고 그가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스테판 가의 장남인 레너드의 질 나쁜 행실이 여실히 적혀 있었다. 게다가 그것들은 과거의 행실일 뿐이었고, 지금은 또 어디서 어떤 짓을 저지르고 있을지 몰랐다.

“걱정해주시는 거예요?”

“당연히 걱정되지 않겠소.”

헨리는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었다. 샐리가 공작가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자신이 앞에 있는데도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공작부인과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방관하고 있는 사용인들에게서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질이 안 좋기로 소문난 레너드인데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샐리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은 거의 상수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며 걱정되었다.

“우리가 진행하게 될 일에 지장이 생길 일은 하지 않아요.”

헨리의 걱정에 대한 샐리의 해석은 이번에도 사무적이었다. 헨리를 그저 자신의 안위가 잘못되어 앞으로 진행될 일에 지장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았지만, 저택에서 믿을 사람이 자신의 하녀인 메리밖에 없던 샐리에게는 이런 태도가 당연했다.

“그것 때문이 아니오.”

“그게 아니면요?”

“부인이 될 사람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소.”

부인 될 사람의 안위라니.

그 말에 샐리는 자기 얼굴이 급격하게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어둠이 깔린 방에 작은 조명만 켜둔 상태라 헨리는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우리가 이해관계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부부가 될 사이요. 그리고 난 뭐가 됐든 부부의 의무와 함께 남편의 역할도 충실히 다할 생각이요.”

“저도 그럴 생각이에요.”

“그렇다면 그대를 걱정하는 내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겠군.”

“조금은요.”

샐리는 아까부터 이상해지기 시작한 몸에 혹시 열이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 이마에 손을 갖다 대보기도 하면서 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새로운 감정에 그녀는 심장이 턱 막혀버려 점점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이 감정은 뭘까 생각하던 샐리는 미처 다하지 못했던 말이 생각이 나 서둘러 입을 열었다.

“내일이나 모레 시간 괜찮으세요?”

“내일은 합동훈련이 있어 안 되지만, 모레는 괜찮소.”

“그럼 모레 같이 데이트나 한 번 해요.”

“데이트?”

“이렇게 기사도 났으니까 제대로 얼굴도장 찍어야죠.”

대놓고 거리를 활보하면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이 점이 조금 걱정이기는 했지만, 기왕 불을 지핀 거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만들어 버리면 좋을 것 같았다.

“연인과 데이트 같은 거를 해본 적은 없는데.”

헨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그 누구보다 빨리 움직여 단련을 시작하는 남자였다. 그의 인생에서 곁을 지켜온 것이라곤 그의 검과 충직한 부하들이었을 뿐이었다. 이성과 단둘이 즐기는 데이트에서 뭘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 자신이 없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그건 샐리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공작가에 꽁꽁 묶여있었는데 이런 데이트를 해본 적이나 있을까. 물론 예외적으로 남자들과 함께한 시간은 있었지만, 그들은 샐리에게 있어서 소중한 동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도 헨리 경이 저를 대하는 것도 아주 자연스러워서 연기에 대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요.”

헨리는 그제야 단둘밖에 없는 지금 이 시간에도 샐리에게 편하게 대했다는 것을 인지한 듯했다.

“그대야말로 내가 많이 편해진 것 같은데.”

“같이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다 보니까 편해지는 것도 있기는 하고, 그냥 이런 말투로 대화를 하는 게 조금 재밌기도 해서요.”

“재밌다니 다행이군.”

이럴 때 본다면 샐리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가씨 같았다. 그녀는 가끔 이런 반응을 보이곤 했는데, 가령 뭘 좋아할지 몰라 저녁 식사 후 디저트로 준비했던 각양각색의 쿠키를 보며 눈을 반짝이던 때가 그랬다.

그리고 그 눈빛은 헨리의 머릿속 깊은 곳까지 뿌리박으며 깊은 여운과 함께 각인되었다.

“내일 하루는 바쁘겠군.”

헨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어딘가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있었다.

헨리는 내일 당장 자신이 아는 드레스와 보석 가게에 연락을 넣어 가게에 있는 모든 종류의 드레스와 보석들을 샐리의 앞으로 주문해놓을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다시 한 번 그녀가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런 헨리의 속을 알 리 없는 샐리는 괜히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밤이 더 깊어진 후에야 잠에 들 수 있었다.

***

“이봐, 사람을 치고 갔으면 사과를 해야지.”

“사내놈이 쩨쩨하게 그런 걸로 시비를 걸고 있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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