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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10화 (10/111)
  • #10

    황제의 정부. 그녀는 특별한 출신 성분 없는 평범한 무희였지만, 황제는 그 무희에게 반해 제국의 공작가 중 한 곳인 슬리피 공작가에 그녀를 입적시킨 뒤 자신의 곁에 두었다. 그러면서 슬리피 공작이 지병으로 혼수상태에 빠지자 여자도 작위를 이을 수 있다는 법을 제정하였고, 그 결과 평범한 무희였던 황제의 정부가 공작가의 당주로서의 권한을 쥐게 된 것이다.

    물론 그녀의 뒤에는 황제가 있었다. 평소 황실에서 탐내던 슬리피 공작가의 보석 광산을 이때다 싶어 황제 본인이 원하는 대로 쓰기 시작했다.

    원로 귀족들은 강력하게 반발했으나 변화만을 추구하는 젊은 신진 세력들과 현 황제를 지지하는 일부 원로 귀족들에 힘입어 제정된 법.

    이제 그 법안의 혜택을 샐리 본인도 받을 시간이었다.

    “제 옆에 있는 헨리 경과 결혼하여 스테판 공작가의 작위를 제가 잇겠다는 뜻을 표명하고자 이렇게 황제 폐하께 알현을 신청했습니다.”

    “공녀 그대가 작위를 잇겠다고?”

    “그렇습니다.”

    황제는 자신의 수염을 연신 쓸어내리면서 헨리와 샐리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공작가에는 이미 후계자가 한 명 있지 않나.”

    황제가 지칭한 그 후계자는 분명 레너드였다. 스테판 공작의 아들이자 공작가의 장남인 그는 샐리가 넘어야만 하는 장애물 중 하나였다. 그러나 샐리는 그 부분에 대해 큰 걱정이 없었다.

    레너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으면서도 오히려 찜찜해 하는 표정. 그것은 황제의 입장에서도 망나니인 레너드가 공작가를 이끌기에는 부족함이 여실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미 레너드의 망나니 같은 행실은 모르는 귀족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제 아비가 죽었음에도 코빼기 하나 비추지 않는 것에서 그가 얼마나 막 나가는지, 그리고 얼마나 통제 불능인지 모두 밝혀졌다.

    “그것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오라버니는 후계자의 자리에 부적합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공녀가 직접 공작가를 이끌어가겠다 이건가?”

    “그편이 폐하께 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황제는 다시 한 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새로운 법안도 제정되었겠다. 공녀가 작위를 물려받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야. 다만, 아무런 검증도 없이 그대의 말을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지.”

    황제의 말에 샐리는 그만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정부를 통해 슬리피 공작가를 제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는 황제의 입에서 검증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아마도 황제가 말한 검증은 바로 자신에게 얼마나 이득이 될 것인가를 따지고 싶다는 것으로 생각하면 될 터였다.

    “제 자격을 입증한다면 허락해주실 건가요?”

    “물론이지, 공녀. 내 말하지 않았나. 제국의 법이 바뀌면서 그대에게도 후계자로서의 정당한 자격이 있어.”

    샐리에게 있어서 불리한 조건임에 틀림없었다. 아무리 망나니라고 해도 레너드를 지지하는 공작부인이 존재하는 한 그녀의 역량을 보여주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만만해하는 샐리를 보니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헨리의 속에서도 묘한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

    “단장님.”

    언제나 격식을 차려야 하는 황궁 안이었지만, 기사들에게는 예외로 적용될 때가 있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급한 일이 있어 보이는 때에는 더더욱 그랬다.

    도착하여 가볍게 묵례를 한 뒤 샐리의 눈치를 살피던 기사는 단장인 헨리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이내 혀를 차는 헨리를 보며 샐리는 썩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음을 직감했다.

    “미안하오.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겠소.”

    이제는 완전히 녹아든 듯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헨리는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부하와 달리 침착하게 샐리를 향해 몸을 틀어 마주한 뒤 양해를 구했다.

    “급한 일인 것 같은데 얼른 가보세요.”

    샐리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대답하였고, 헨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제를 해결하기 부하의 안내를 받으며 자리를 떴다.

    “1 기사단….”

    나지막한 목소리로부터 뚜렷하게 들린 하나의 단서였다. 1 기사단은 분명 황궁을 지키는 정예부대 중 하나였는데, 정황상 헨리의 기사단과 무슨 이유 때문인지 충돌이 있었던 것 같았다.

    앞으로 헨리를 수도에 정착시키려면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빠른 걸음걸이로 부하를 따라가던 그이의 늠름한 자태에 샐리는 지금은 일단 걱정을 덜고 처음 방문한 황궁을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원래였다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황궁의 정원이었지만, 처음 방문한 황궁이니 한 번 둘러보는 게 어떻겠냐는 황제의 허락이 있었다.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했지만 일단 황제에게 잘 보여서 나쁠 것 없다는 판단이 섰다. 또한 샐리도 외국의 사절단이 올 때마다 감탄한다는 황궁의 정원을 한 번쯤은 직접 보고 싶다는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황궁 어디에서나 보이는 제국의 상징인 거대한 세계수를 꼭 한 번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생각에 들뜬 발걸음을 옮겼다.

    ***

    외국에서도 극찬받는 황궁의 정원은 싱그러운 풀들과 본 적 없는 형형색색의 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걷기 편하게 잘 포장된 길과 더불어 길옆에 나란히 졸졸 흐르는 냇물도 있어 완벽한 자연경관을 형성하며 제국 황실의 웅장한 권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샐리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크기가 점점 더 커져 올려다보기도 힘들 정도로 거대한 세계수에게로 꽂힌 상태였다.

    세계수란 인류의 시작을 알린 비옥한 토지에서 자라난 나무로 여신의 축복과 함께 악마를 이겨내기 위한 삶의 터전으로써 사용되어 왔다. 또한 세계수 자체로도 악한 기운을 내쫓을 정도의 신성력을 내포하고 있는 신비한 나무였다.

    즉 지금의 제국이 신전으로부터 우대받으며 대륙 최고의 국가로 군림하기까지 이 세계수가 했던 역할이 정말 컸었다.

    “누구세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압도적인 크기. 어디서부터 시작된 지 감조차 잡을 엄두가 나지 않는 거대한 뿌리를 시작으로 황성만 한 두께의 줄기와 나무의 크기는 그저 우러러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이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세계수를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던 샐리는 뒤에서 자신에게 신원을 묻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았다.

    허리 밑으로 내려오는 화려한 백금발에 머리에 쓰고 있는 황실을 상징하는 사자의 문양이 박힌 티아라. 햇빛을 받아 더욱 화사하게 빛나는 뽀얀 피부와 함께 빛을 담아 빛나는 검은 보석과도 같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

    “스테판 공작가의 샐리 스테판 제국을 빛내는 성녀를 뵙습니다.”

    그녀는 근 몇 년간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존재. 여신의 선택을 받아 대신관 이상의 치유력을 타고난 성녀였다.

    “어머, 처음 뵙겠습니다. 클로에 크리스토퍼라고 합니다.”

    스테판 가 공녀의 이야기라면 그녀도 알 터였다. 그렇기에 황궁을 방문한 샐리를 보고 놀란 눈치였지만, 성녀라는 호칭답게 금세 표정을 숨긴 뒤 예의를 갖췄다.

    “참 멋있는 나무죠?”

    성녀 클로에 크리스토퍼.

    그녀에 대해 알려진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 원래부터 제국에 존재했던 인물이 아닌 어느 날 갑작스럽게 자신의 등장을 알렸다. 처음 제국민들 역시도 그녀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그녀의 치유력을 실험하는 자리에서 화려한 빛과 함께 빈사 상태에 빠졌던 환자를 치료해내는 것을 본 이들은 곧바로 성녀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

    그리고 성녀의 출현으로 인해 당연히 신전의 이목 또한 집중되었고, 처음에는 온갖 이유를 갖다 대며 성녀를 신전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황제의 단호한 거절로 인해 무산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그녀는 황족의 성을 쓰며 이곳 황궁에서 생활하며 지냈다.

    그런데 그 성녀가 때마침 샐리 본인의 앞에 나타나 친숙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 네….”

    “저도 볼 때마다 놀랍거든요. 어떻게 이런 크기의 나무가 황궁 옆에 떡하니 있는지. 또, 이렇게 큰 나무가 있는데 그늘도 지지 않잖아요.”

    샐리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거대한 나무 아래에 있었음을 인지했다. 이런 거대한 나무 밑이라면 당연히 그 아래는 나무 크기에 맞게 거대한 그늘로 덮여있어야 했다. 그러나 햇빛은 마치 나무를 통과한 것처럼 원래 그늘이 졌어야 할 자리까지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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