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9화 (9/111)
  • #9

    “왜 그러고 계세요?”

    “별거 아닙니다.”

    제국 최고의 기사가 여자에 대한 면역이 없어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 속마음을 알 수 없던 샐리는 의아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갸우뚱했다. 의문을 가진 샐리의 눈을 본 헨리는 의구심이 조금이라도 확대되기 전에 재빨리 침대에 누웠다.

    “하아, 당분간 편하게 누울 수도 없다니 불편하네요.”

    “어쩔 수 없습니다.”

    종아리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절대 눕지 말고 엎드려서 자라는 의사의 말이 있었다.

    “그보다 내일 폐하는 언제 알현하는 건가요?”

    “새벽 훈련이 끝난 뒤 일정을 잡겠습니다. 아마 오후쯤으로 예상이 되니 공녀께서는 아침까지 푹 쉬면 될 듯합니다.”

    “근데 말투가 너무 딱딱한 거 아닌가요?”

    그와 대화하다 문득 든 생각인데, 아무리 행동으로 보여준다고 해도 그의 딱딱한 말투를 고치지 않으면 믿으려던 사람도 둘 사이를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기사다운 말투이기는 했지만, 연인 사이에 오고 가기에는 말투와 문장에서 느껴지는 딱딱함이 문제로 보였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게 아니죠. 헨리 경.”

    “앞으론 유의하겠소.”

    헨리는 곧바로 자신의 말투를 교정했다. 확실히 이전에는 사무적인 티가 팍팍 났다면, 이제는 서로 가까운 사이처럼 보이는 말투가 되었다. 높고 낮음이 없는 완벽히 동등한 관계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샐리는 그에게서 느껴지던 벽이 하나 허물어진 기분이 들었다. 약간의 교정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마치 둘이 진짜 연인 사이라도 된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침대에 누워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기사단을 만나보겠소?”

    “네, 이참에 저를 정식으로 소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한층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 입이 쉬지 않았다. 막힘없이 술술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면서 헨리는 자신의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런, 내가 너무 지루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군.”

    “아니에요….”

    말은 아니라고는 했지만, 무거워지는 눈꺼풀은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이야기가 지루해서는 아니었다. 한바탕의 폭풍을 겪고 나니 갑작스럽게 몰려온 피로감에 눈이 조금씩 감기기 시작했다.

    “이만 쉽시다. 고초를 겪었으니 피곤했을 거요.”

    “네….”

    샐리는 잠들기 직전 슬며시 감은 눈으로 평온한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를 바라보며 한참을 곱씹던 헨리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그녀의 등에 살포시 덮어주며 종아리의 상처를 살폈다.

    “괜찮겠지.”

    그녀가 잠들었다는 확신에 마음이 풀려서일까.

    헨리는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들춰내며 샐리의 상처를 걱정했다.

    “괜찮아야 해.”

    이것이 정말 동정심에서 나온 말인지 조금은 헷갈렸다. 다만 그는 진심으로 상처가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아물기를 바랐다. 한참을 상처를 바라보던 헨리는 그녀에게 이런 상처를 입힌 공작부인에 대한 분노를 곱씹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처음 뵙겠습니다. 스테판 공작가의 샐리 스테판이라고 합니다.”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살포시 잡은 뒤 무릎을 살짝 굽히는 귀족식 인사. 흠잡을 데 없는 깔끔한 동작은 땀내 나는 연병장을 화사하게 빛내며 기사단의 이목을 끌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스테판 공작가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적대적인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곁을 지켜주는 든든한 이가 있어 생각보다 긴장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헨리가 나서서 샐리의 손을 맞잡으며 본인들이 공식적인 커플임을 발표하는 행동을 보였고, 샐리를 살피던 시선들은 이내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언제부터였습니까.”

    다른 기사들과 비교했을 때 여린 체구였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날카로운 눈빛을 한 사내는 부단장 중 하나인 주안이었다.

    “얼마 되지 않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할 테니 기다리도록. 지금 이 자리는 내 반려가 될 이를 소개하는 자리이니 경거망동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

    그의 말 한마디에 기사들 전원이 샐리에게 향해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대가 이해해주시오.”

    “물론이에요. 기사단에서 스테판 공작가를 곱게 볼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말은 여유롭게 했지만, 주안이라는 부단장의 눈빛은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이것은 샐리 본인이 극복해 나가야 할 일로 이제부터 기사단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

    “스테판 공작가의 샐리 스테판이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래, 스테판 공녀. 그대 아비의 죽음은 나도 참 안타깝게 생각하네.”

    스테판 공작 덕분에 자신의 정책에 힘이 실렸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움은커녕 여타 다른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형식적인 말투였다. 오히려 황제는 처음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샐리에게 더 관심이 있어 보였다.

    공작의 죽음과 그동안 숨죽이고 살고 있던 공녀의 등장이 교차하면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임을 직감이라도 한 듯 황제의 시선이 샐리의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었다.

    “크리스토퍼 경과 함께 나를 만나러 오다니. 이것 참 재밌는 상황이군. 둘은 언제부터 그린 친밀한 사이가 되었지?”

    황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황제의 귀에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즉, 샐리가 야밤에 헨리와 함께 입궁한 것을 황제는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은 그게 아니네, 크리스토퍼 경. 나도 참 주책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별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 흥미가 생기더군.”

    너털웃음과 함께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시키며 자연스럽게 대답을 유도하는 것이 분명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제의 미소에서 샐리는 곧바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황제를 지켜봐 온 헨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능구렁이 같은 인물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황제와 대면하기 전 헨리가 건넨 유일한 충고였다. 그리고 샐리는 지금 황제의 미소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으로부터 그가 건넨 충고가 무슨 뜻인지 곧바로 알아챘다.

    “빵집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빵집?”

    “제가 단골인 빵집에서 헨리 경을 만났습니다. 그런 유명 인사를 조촐한 빵집에서 뵈니 조금 들떠서 말을 걸어봤는데 경께서 친절하게 대해주셨답니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경은 왜 공녀에게 그리 친절하게 대했던 건가.”

    늙은이의 단순한 호기심으로 포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이내 두 사람의 사이를 심문하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별거 아닌 일이라도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성격을 타고난 것도 있지만, 살아 존재하는 것이 맞느냐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스테판 공작이 꽁꽁 싸매던 공녀가 수면 위로 떠오른 계기가 참 아리송했다.

    “첫눈에 반해서 그랬습니다.”

    “경이?”

    헨리는 놀라서 커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에도 덤덤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애초에 헨리에게 현 황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관계였으므로 이 이상 불필요한 대화는 지양하고 싶었다. 특히나 자신과 샐리 두 사람의 사이를 꼬치꼬치 캐물으려 하는 것에 기분이 언짢았다.

    “이런, 내가 실례했군.”

    옆에서 흘끔흘끔 헨리를 지켜보던 샐리는 속으로 참 솔직한 남자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의 앞인데 불편한 기색을 너무 대놓고 드러냈다. 그러나 권위 앞에 숙이며 아첨을 하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불편함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면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두 사람이 함께 날 찾아온 이유가 뭔지 물어야겠지?”

    드디어 샐리 본인이 나설 차례가 왔다.

    “얼마 전에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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