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샐리는 오러에 대해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능력으로 그 재능은 여신에 의해 부여된다. 여신을 위해, 인간을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하여야 하며 오러의 색은 그 사람 자체를 나타내는 빛이다.]
이론적인 내용을 보고 샐리는 머릿속으로 오러에 대해 여러 번 그려보았다. 직접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빛일지 기대하며 사람이 타고날 수 있는 최고의 재능 중 하나라는 것에 동경심도 갖고 있었다.
‘예쁘다.’
어둠을 밝히는 황금빛에 빠져들어 그대로 넋을 놓아버렸다. 철창을 뚫어버리고 난 뒤 헨리가 마차의 문을 열기까지 황홀하게 빛나던 오러의 색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공녀?”
“아, 밖에는 다 해결됐나요?”
천진난만한 마음이 드러난 것 같아 부끄러웠던 샐리는 처음으로 헨리의 앞에서 얼굴을 붉혔다.
“일부러 힘을 뺐으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칼을 뽑지도 않았고, 오러의 힘을 전시상황 때처럼 끌어올린 것도 아니었다. 철창을 부술 정도의 힘이었지만, 그 검기를 사람에게로 날린 것이 아니었으니 철창 앞을 막던 하인들의 경우 타박상 정도로 끝났을 터였다.
‘얼굴이 빨갛던데.’
마차로 돌아온 헨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상기된 샐리의 얼굴이었다.
흥분, 분노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곧게 뻗어있던 눈동자의 방울이 흐트러지는 것은 그가 착각하기에 좋은 신호였다.
‘나에게 반한 건가.’
헨리의 입장에서 마차의 문을 열면서 인기척을 충분히 냈음에도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를 생각하면 이 추측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덤덤하게 먼저 두 사람을 피신시킨 뒤 순식간에 일을 처리하고 왔으니 나름대로 멋있게 보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었다.
평소 신중한 성격의 헨리였지만, 그가 샐리에게서 봤던 표정은 자신에게 접근하던 영애들에게서 많이 봐왔던 것이었다.
“공녀께서 머무시기에 많이 누추한 곳이겠지만, 지내시기에 불편하지 않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누추하다니요. 경께서 제 옆을 지켜주신다는데, 그 외에 다른 게 뭐가 필요하겠어요.”
바로 옆에서 하녀인 메리가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에 걸맞은 언제 어디서나 꿀이 떨어지는 연인의 모습을 샐리는 놓치지 않고 연기했다.
하지만 방금 전 착각으로 생각이 많아졌던 헨리는 순간 샐리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부분을 완전히 망각해버렸다.
“크흠, 일단 가는 대로 필요해 보이는 것들을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저기….”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메리가 헨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의사를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의사?”
물론 뺨이 붇기는 했지만, 의사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서 시선을 옮기니 샐리는 애써 헨리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행동은 이미 답을 알려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헨리의 방은 황궁에서 기사들이 훈련하는 연병장 바로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백작가에서 머무르는 것이 맞았지만, 그의 집안은 이미 망한 지 오래되어 이곳 임시거처에서 생활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임시거처답게 그가 업무를 보는 사무실과 문 하나로 연결된 침실. 그리고 그 침실의 크기는 적당히 넓은 환경에 2명 정도가 함께 누울 수 있는 침대와 성인 남성 키 정도 되는 소파가 하나 놓여 있었다.
단출하기 그지없는 방은 제국 최고의 기사가 지내는 방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쓸데없는 공간 낭비를 싫어할 그의 성격에 딱 맞는 방이기도 했다.
“왜 말 안 했습니까.”
헨리는 소파에 앉은 채 샐리가 헨리와 그의 부하들을 전담하는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먹고 연고까지 바르는 것을 본 뒤 물었다.
“일부러 말을 안 한 건 아니에요. 그저 타이밍을 조금 못 잡았을 뿐이에요.”
샐리에게는 종아리의 상처보다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았다. 오늘만 하더라도 상처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폭풍과도 같은 공작부인의 성화를 받아냈고, 끝내 그녀에게 있어서 지옥과도 같았던 저택에서 탈출까지 했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본인의 몸 상태부터 살피십시오.”
여전히 덤덤한 말투였지만, 이번에는 말의 어딘가에 가시가 돋쳐있다는 것을 샐리는 느낄 수 있었다.
“걱정 마세요. 저희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잘 관리할 테니까.”
또 이런 식으로 곪아가는 상처를 숨기지 말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이런 식으로 상처를 감추는 버릇은 결코 좋은 행동도 아니었기에 건넨 충고였다. 그런데 샐리는 헨리의 그런 말뜻을 조금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본인의 몸조차 관리 못 하는 사람이 앞으로의 큰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겠냐는 의미로 말이다.
샐리는 헨리의 말투에서 그녀가 느꼈던 어딘지 모를 위화감을 그런 식으로 해석했다. 군인이 그답게 전시상황을 앞두고 제 몸 관리를 못 하는 부하를 타박하는 느낌으로 건넨 충고로 받아들였다.
“조촐한 방이지만 쉬는 데 별 문제는 없을 겁니다.”
헨리는 진심으로 걱정이 돼서 한 말이었다. 그녀가 예전부터 이렇게 참아오던 상처들이 꽤 많았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앞에서만큼은 그런 상처들을 숨기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야 늦지 않게 치료할 수 있었으니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조금은 자신을 의지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어쩐지 목구멍이 계속 간질거리며 솔직해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헨리는 상처에 대해 더 언급하기보다는 그녀가 안정을 취하도록 방에서 나갈 생각이었다.
“아직도 일이 남아있나요?”
“내일은 새벽부터 훈련이 있기도 해서 일찍 자둘 생각입니다.”
헨리의 딴에는 샐리를 최대한 배려하는 것이었다. 굳이 여자 둘이 지낼 방에서 함께 잘 필요도 없었고, 여러 전쟁에서 활약한 그답게 어디서 자던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니까.
그러나 방을 나가려는 헨리의 뒷모습을 보는 샐리와 메리의 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다. 특히 메리의 경우 하녀인 자신이 헨리 경의 침대를 뺏은 것도 모자라서 아가씨의 옆자리를 차지해버린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제가 나가서 잘게요. 밖에 있는 작은 소파에서 자기에 제가 더 괜찮을 것 같으니까 헨리 경께서는 아가씨 옆에 있어 주세요.”
어디서 나온 강단일까. 아니, 애초에 샐리는 메리의 저런 과감하고 강단 있는 행동들을 예전부터 봐왔다. 하지만 그런데도 자신의 키보다 반절은 더 커 보이는 남자의 등을 떠밀며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밖으로 나가는 모습은 신기하면서도 재밌기도 했다.
특히나 숱한 싸움을 해오면서 수많은 강자와 싸워온 헨리가 여린 여자에게 밀리면서 당황한 얼굴이 제법 볼만했다.
“주인을 닮은 겁니까?”
“아뇨, 제가 메리를 닮아가는 거예요.”
아마 메리가 없었다면 샐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곁에서 자신을 든든하게 지켜주면서도 악으로 버티는 모습을 봤기에 샐리는 자신에게 찾아온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소파에서 자시게요?”
샐리의 말에 헨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자리를 잡으려 했다.
“그냥 침대에서 같이 자요.”
매트리스를 가볍게 두드리는 동작을 보자마자 헨리는 그 자리에서 바로 굳었다. 그에게 있어서 잠자리는 어디가 됐든 상관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에서 자본 적도 있고, 울퉁불퉁한 자갈밭에서도 자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면역이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여자였다.
지금껏 그가 덤덤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샐리와 그저 계약관계라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공작가의 저택에서 혹시 샐리가 자신을 마음에 두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을 시작으로 그녀의 존재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전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똑같이 있을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괜찮지 않아서 그래요. 안 그래도 얹혀서 지내는 처지인데 집주인의 침대까지 뺏으면 제가 너무 염치가 없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결혼할 사이인데 이 정도는 괜찮죠.”
“그렇군요.”
헨리는 논리 정연한 그녀의 설명에 침대 곁으로 왔지만, 그 앞에서 쭈뼛쭈뼛 서 있을 뿐 쉽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