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7화 (7/111)
  • #7

    “우리 가문의 일에 신경 쓰지 말고 가시죠.”

    “폭력을 행사하는 당신 같은 사람과 한시도 같이 있게 할 수 없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헨리는 샐리를 들어 안고 그대로 공작부인을 지나쳤다. 그리고 샐리는 그의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으며 서러움을 참지 못해 우는 것 같은 모양새를 취했다.

    그리고 헨리는 자신에게 의지하며 안기는 샐리의 가녀린 체구를 느끼며 이를 부득 갈았다. 그러면서 식탁 위의 접시를 이리저리 던지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공작부인을 슬쩍 째려본 뒤 그대로 저택을 나와 대기하고 있던 마차로 향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샐리는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서투르고 어색한 손길을 느꼈다. 누군가를 위로해본 경험이 없을 그답게 쓸어내리는 손이 버벅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위로해주는 그의 따스한 품에 있으니 감성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번이 처음도 아닐뿐더러 오늘 일은 헨리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설계였다. 그런데 샐리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기 위해 좀처럼 가슴팍에 파묻은 얼굴을 들을 수가 없었다.

    ***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너무 편안한 공간이었다. 자신을 토닥여주는 어색한 손길도 짧지만 담백한 위로도 샐리에게는 이보다 더 큰 힘이 되어줄 것이 없을 정도였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이어질 수 있었던 관계이지만, 이런 사람이 내 편이 되어준다니 그녀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 하나 더 생긴 것이었다.

    “그렇습니까.”

    너무 오랫동안 안겨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한 듯 허둥지둥 품에서 떨어져 반대편에 착석하는 샐리를 바라보는 헨리의 눈에서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예전부터 이런 일이 줄곧 있었던 겁니까?”

    “자주는 아니고 가끔 그래요.”

    애써 덤덤하게 말하는 것이 결코 이번에 처음 있는 일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공녀를 대하는 공작부인의 태도는 이미 그녀를 공작가의 식구가 아닌 하찮은 노예를 취급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도 지금쯤이면 진정 좀 되셨을 테니까 전 이만 들어갈게요. 안 좋은 모습 보여 드려서 죄송해요.”

    그의 품에 안겨 잠시 잊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샐리 본인은 지금 연기를 해야 했다. 그 어떤 감정보다도 큰 동정심을 눈앞의 남자에게서 끌어내어 감정적으로 본인의 편을 들도록 유도하는 것이 오늘의 목표였다. 그녀는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에 구겨지는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헨리를 보고 제법 성공적인 연기였다고 생각했다.

    “가지 마십시오.”

    “네?”

    샐리가 마차에서 내리려던 그때 헨리는 황급히 손을 뻗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오늘 직접 눈으로 보니 일 처리를 빨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내 방에서 자고 내일 함께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제 폐하를요?”

    “작위와 관련해서 곧바로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내일 폐하께 공식적으로 우리의 결혼을 알릴 생각입니다.”

    확실히 이건 좋은 기회였다. 지금 스테판 공작가는 주인을 잃고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은 공작가의 차기 당주에게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차기 당주로 유력한 이가 아버지의 사고사 소식을 듣고도 코빼기 하나 비추지 않는 망나니 아들이니 초비상 사태라 보는 것이 맞았다.

    지금처럼 공작부인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 역시 자신의 아들 문제와 연관이 있었다. 근데 한 가지 의문점은 아무리 망나니라도 차기 당주 자리를 거의 확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공작부인이 이렇게까지 예민해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였다.

    그녀의 행패를 직접 겪으면서 든 생각은 레너드는 단순히 공작가의 새로운 주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서재에 비밀이 있겠지.’

    공작의 비보가 전해지자마자 서재에는 공작부인의 하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었다. 메리의 말에 따르면 그곳을 그냥 지나가는 데도 문 앞을 지키는 하인들이 무섭게 노려본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차기 당주 자리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기 이보다 더 적절한 시기가 없었다.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헨리는 내일 바로 황제를 알현한다는 말에 생각을 정리하느라 다소 어두워진 샐리의 표정을 보며 완전히 착각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저택에서 벗어나고 싶은 고충이 얼굴에 드러난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잠깐만요!”

    “공녀?”

    “저 혼자 갈 수는 없어요.”

    헨리는 출발하기 전 마차를 점검한 뒤 보고를 하러 온 마부에게 출발해도 좋다는 눈짓을 했다. 그리고 출발을 알리는 마부의 목소리와 함께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한 마차의 바퀴를 샐리는 다급한 목소리로 멈춰 세웠다.

    “메리라고 저를 돌봐주는 하녀가 있어요. 그 아이와 함께 가야 해요.”

    이렇게 된 이상 메리를 이 저택에 두고 갈 수 없었다. 만약 여기에 남게 된다면 공작부인이 메리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지금 저택에서 메리라는 하녀를 데리고 오도록.”

    헨리는 곧바로 마차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 기사에게 메리라는 하녀를 찾아오도록 명령했다. 그의 명령이 끝나자마자 기사는 빠르게 저택 안으로 들어가 샐리가 설명한 용모에 맞는 하녀를 데리고 나왔다.

    “아가씨!”

    검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달려온 메리는 그대로 샐리의 품에 안겼다. 크리스토퍼 경이 함께 있다고는 해도 날카로운 유리 깨지는 소리에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아가씨가 큰 봉변을 당한 것은 아닐까 걱정하던 메리는 마차에 내려 자신을 반가워하는 샐리를 보자마자 안심한 마음에 그녀의 품을 향해 달렸다.

    “이번에는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졸이던 마음이 안심되자 자연스럽게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샐리는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의 가슴팍을 축축하게 적시는 메리의 눈물을 알고 그녀를 토닥이며 괜찮다고 위로했다.

    “계속 아가씨를 찾고 계셔요.”

    기사가 조금이라도 늦게 데리러 갔다면 메리가 큰 화를 입을 뻔했다. 공작부인은 자신의 폭력성을 반드시 만만한 누군가에게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었으니 말이다.

    “내 방의 침대가 넓으니 둘이 함께 자면 되겠군요.”

    “그럴 수는 없어요. 이렇게 도와주시는 것도 너무 감사한데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이제 곧 결혼할 사이에 이 정도는 민폐 축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결혼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메리는 눈물이 쏙 들어갔다.

    “결혼이라뇨?”

    “내일 헨리 경과 함께 황제 폐하를 알현할 거야.”

    샐리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결혼 소식에 사고회로가 멈춰 그 자리에 돌처럼 굳은 메리를 얼른 마차에 태웠다.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됐는데, 저택의 문을 거칠게 열고 나오는 남정네들이 보였다. 분명히 공작부인의 명령을 받고 샐리와 메리를 잡으러 온 하수인들임이 분명했다.

    “어떡하죠.”

    게다가 저택의 정문에도 이미 남정네들 몇몇이 서서 철창을 굳게 잠근 채 마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얼굴에서 드러내놓고 있지는 않았지만, 긴장감으로 인한 떨림이 샐리의 목소리에서 드러났다.

    “하녀와 같이 마차에 가서 기다리십시오. 금방 끝날 터이니.”

    헨리는 샐리와 메리가 마차에 들어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짐칸에서 자신의 검을 가져왔다. 그 뒤 경고하는 한 마디조차 없이 굳이 검을 뽑지 않고, 곧바로 오러를 담아 철창을 향해 휘둘렀다.

    “이게 뭐예요, 아가씨?”

    “오러….”

    마차의 창문으로 밖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헨리가 실력행사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샐리의 푸른 눈동자에 태양과도 같은 밝은 황금색 별빛들이 하나둘 담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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