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괜찮겠습니까.”
헨리는 포크를 자신의 앞에 있는 접시에 내려놓은 뒤 심각해진 얼굴로 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지금 이 공작가의 주인이 되어 정계에 진출까지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힘을 써서 헨리 본인과 기사단의 처우를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게 바꿔버리겠다는 것인데, 과연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이는 그녀의 출신 성분이 독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괜찮아요. 대중들은 이런 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단순하게 첩의 자식인 것만 밝힐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공작부인이 자신에게 행사한 폭력들과 더불어 그녀의 아들인 레너드가 공작가를 이끌어가기에 부적합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퍼트리면 됐다.
황제의 정부에 이어서 샐리 자신이 여성으로서 사회에 진출하는 모습과 제국에서 추앙받는 기사인 헨리 크리스토퍼와 세기의 사랑 이야기가 최고의 양념이 되어줄 터였다.
“이렇게 하죠. 제가 예전에 몰래 외출했는데, 때마침 개선식을 하는 헨리 경을 보고 첫눈에 반한 거예요. 그러고 나서 제 마음을 표현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경께서 호기심을 느끼고 저랑 만나주셨다가 사랑에 빠지는 거예요.”
“괜찮은 이야기지만, 그건 힘들 것 같군요.”
평소에도 귀족 영애들에게 질릴 정도로 편지를 받는 헨리였다. 그리고 그는 그 어떤 편지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몇 번 읽었을 때 다 비슷한 내용이었고, 그 뒤로는 편지를 개봉하기는커녕 편지가 도착하는 족족 곧바로 버렸다.
즉 귀족 영애들에게 차갑기로 소문이 나버린 헨리였기 때문에 샐리가 지어낸 이야기를 쓸 수가 없었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샐리는 괜찮게 지어낸 이야기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다는 아쉬움과 함께 고민에 빠졌다. 오래간만에 접하는 다양한 음식들을 앞에 두고 그것들에 시선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기 바빴다.
그리고 샐리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 헨리는 아까 먹지 못했던 닭고기와 함께 빵에 버터를 발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영웅이니 대륙 최고의 기사이니 해도 그도 결국 인간이었다. 오늘 아침부터 시작된 고된 훈련과 더불어 제대로 된 첫 끼니였기에 허기진 배를 조금은 달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괜찮군.’
적당한 단맛과 더불어 빵 자체가 부드럽고 푹신푹신한 식감을 자랑했다. 평소에 빵으로 대충 끼니를 해결하는 헨리였기에 여러 가지 빵을 맛보았고, 그중에서도 먹는 것은 그의 취향에 부합한 서너 가지 종류의 빵뿐이었다.
“입에 맞으시나 보네요.”
“미안합니다. 제대로 된 식사는 오늘 처음이라.”
헨리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샐리를 앞에 두고 혼자만 배를 채우려 했던 것이 민망했는지 헛기침하며 집었던 빵을 다시 내려놓았다.
“제가 좋아하는 빵집에서 사 온 빵이에요. 공작가에서 만드는 빵은 너무 달아서 저도 싫어하거든요.”
공작가에서의 제대로 된 식사를 해본 것은 그녀의 엄마가 살아있었을 적의 이야기였다. 당시에 두 모녀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어야 한다는 공작의 명령 때문에 식사 자리에 함께했었다.
물론 그 이후로 혼자 남은 샐리에게 공작은 신경을 꺼버렸고, 결국 샐리는 방에서 메리와 끼니를 해결해왔다.
“어디서 산 겁니까.”
평소 수도에서 유명한 빵집들에서 빵을 사 먹는 헨리였다. 그런데 오늘 먹은 이 빵은 그의 취향에 있어서 그 어떤 유명 빵집보다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 유명한 곳은 아니에요. 위치도 골목길 어귀라 사람들의 왕래도 적고요.”
이리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무덤덤하게 가라앉아있던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서 생기발랄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봤을 때도 든 생각이었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뿐만 아니라 같은 취향을 공유하고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에서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빵집에 대한 샐리의 설명을 듣던 헨리는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황급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 예의를 중요시하는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샐리는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듣기 위해 집중했다.
“공녀께서 알려주신 빵집을 내가 이전부터 좋아해서 종종 드나들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공녀를 만나게 되고 나도 모르게 사랑에 빠진 것이지요.”
“근데 저는 그렇다 쳐도 헨리 경께서 드나드는 것을 사람들이 모를까요?”
“눈에 띄기 때문에 외출할 때는 최대한 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일반적인 성인 남성과 비교해 봐도 훤칠한 키에 단련된 근육으로 인해 다부진 몸. 까무잡잡한 구릿빛 피부에 무엇보다도 가장 티가 날 것 같은 그의 타고난 황금빛 눈동자까지 튀지 않기가 힘든 외모였다.
“휴일에 그렇게 외출하는 편입니다. 그 빈도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효과는 충분했으니.”
본인이 몸소 증명한 것이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기왕이면 저희가 함께 데이트하는 장면에 대한 사진도 있으면 좋겠네요.”
글로 쓰인 기사만으로는 사람들을 믿게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하듯 입방아에 오르며 소문이 점점 커지기는 하겠지만, 두 사람이 함께 데이트하는 사진까지 실린다면 완벽하게 못을 박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헨리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부분이기도 했기에 샐리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것이었다.
“그건 우리 사이가 공식적으로 발표를 한 뒤에 해도 늦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곧 있을 2 황자 전하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파티라던가.”
샐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스케일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자리에 단 한 번도 참여해본 적이 없어 벌써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너! 네가 감히 저택에 멋대로 사람을 들여?”
갑자기 등장한 공작부인에 잔잔하게 흘러가던 두 사람의 식사 자리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머니 크리스토퍼 경께서 보고 계시니 진정하세요.”
“닥쳐! 내가 왜 네 엄마야.”
공작부인은 사용인들이 뭐라 말리기도 전에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왔다. 다른 사람이 없었다면 집사가 이리 당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광경은 그리 희귀한 장면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꺄악.”
공작부인은 이미 이성이 날아간 사람처럼 보였다. 이미 주위에 누가 있든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이토록 화내는 이유는 다른 것도 아닌 샐리가 마치 제집인 것처럼 저택을 휘젓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빨리 이 밥버러지를 괜찮아 보이는 혼처를 찾아 팔아버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던 공작부인은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에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간 스테판 공작가의 이름으로 몰래 투자한 돈만 해도 지방에 고성 하나 정도는 거뜬히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든든하던 투자자의 위상이 휘청거리니 지켜보며 투자하려던 이들이 하나둘 발을 빼기 시작했다.
사업은 별 탈 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오늘 다른 투자자들을 모아놓고 열성적으로 토로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차기 당주로 유력한 레너드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들을 모두 알고 있었고, 최근에 기세가 오른 신진 귀족 세력들에게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 그래도 공작부인 입장에서 열이 받았었는데, 저택의 하인이 전해준 소식에 곧바로 눈이 뒤집혀 저택에 돌아온 것이었다.
“그 손 놓으시오!”
헨리의 일갈에도 공작부인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샐리의 머리채를 잡아 뜯다가 이내 그녀의 뺨을 세차게 갈겼다.
“아악, 이거 놓지 못해? 어딜 망한 백작가의 자식이 공작부인인 내 몸에 손을 대!”
헨리는 악을 쓰며 바둥거리는 공작부인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이것이 그가 알던 스테판 공작가의 모습이었다. 현 황제와 뜻이 맞는다고 해서 오만하기 그지없는 추악한 인성들. 주변 사용인들도 말리기는커녕 당연하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었다.
이 사태를 안절부절 바라보는 것은 연차가 쌓여있는 집사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족인데다가 평판까지 좋은 헨리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은 집사 하나뿐이었다.
“여기 더 있어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헨리는 공작부인을 내팽개친 후 샐리의 뺨을 살피며 말했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곧바로 공작부인의 손바닥 모양으로 샐리의 볼이 벌겋게 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