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5화 (5/111)

#5

“아가씨, 저예요.”

메리는 따뜻한 양파 수프와 바게트가 담긴 쟁반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어? 이게 웬 새에요?”

“크리스토퍼 경이야.”

“네? 이 새가 크리스토퍼 경이시라고요?”

“아니, 크리스토퍼 경의 새라고.”

메리는 진짜 크리스토퍼 경을 앞에 두고 곧바로 예의를 차리지 못한 것에 대해 당황하다 이내 샐리를 보며 볼을 부풀렸다.

“자, 마시렴.”

샐리는 컵에 들어있는 물을 자기 손에 살짝 부어 새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새는 곧바로 작은 부리로 샐리의 손을 가볍게 쪼며 목을 축였는데, 그 동작이 손바닥을 간질였기에 샐리는 새가 부리를 떼어낼 때까지 몸을 움찔거렸다.

“공작부인께서는 이른 아침부터 외출하셨어요.”

“그래?”

“네, 아가씨께 진통제 좀 가져다드리려고 했는데 부인께서 저녁 늦게 들어오신다고 하인들한테 약품을 보관하는 수납장을 지키라고 하시던데요.”

메리는 공작부인이 너무하다는 푸념을 함께 쏟아내었지만, 샐리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자리를 비워준 것이 절호의 기회였다.

“메리.”

“네, 아가씨.”

“저녁때 크리스토퍼 경께서 저택을 방문할 거야.”

“네? 크리스토퍼 경께서요? 하지만 괜찮을까요?”

분명 샐리가 아무 생각 없이 이런 행동을 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자세한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는 메리는 혹시라도 오늘 일이 공작부인을 더 자극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몸도 성치 않으신데 꼭 오늘 약속을 잡으셔야겠어요?”

“그래서 더더욱 오늘 잡아야 해.”

어제의 만남에서 자신의 처지에 대해 당당하게 밝혔을 때 무뚝뚝하던 얼굴이 일순간이었지만, 찡그려지는 것을 포착했었다. 그리고 분명 하루의 유예기간 동안 자신에 대한 뒷조사 역시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다 알아내려 했을 터였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아예 못을 박아두는 편이 좋아 보였다.

“메리, 심부름 하나 해줄래?”

오늘 이 기회를 잡아 스테판 공작가의 공녀와 제국 최고의 기사인 헨리 크리스토퍼 경의 스캔들이 공식적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할 작정이었다.

“제인 빵집에서 이따 저녁때 크리스토퍼 경께 대접할 빵을 좀 사 와줘.”

제인 빵집은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골목길 어귀에 자리 잡고 있는 빵집이었다. 위치가 그리 좋지 않아 빵을 사 가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샐리의 심부름으로 빵을 사러 갈 때마다 몇몇 단골들만 보이는 그런 빵집이었다.

빵이야 주방에 부탁해도 될 일이었지만, 메리 역시도 제인 빵집의 빵 맛을 공작가 주방에서 만드는 빵보다 좋아했다. 특히 단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기로 소문난 크리스토퍼 경이었다. 그렇기에 제인 빵집의 빵이 단맛이 많이 첨가된 공작가에서 만드는 빵보다 더 입에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사 올 빵 목록을 적어둔 쪽지야.”

샐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메리에게 사 올 빵 목록을 적어둔 쪽지를 건넸다.

“그럼 다녀올게요, 아가씨.”

“응.”

“괜히 돌아다니지 마시고 침대에 얌전히 누워 계세요.”

“알았어.”

자고 일어난 직후에는 괜찮았지만 이제 다시 종아리에서 통증이 올라오기 시작해 샐리는 메리가 말하지 않아도 침대에 가려 했었다.

애초에 진통제와 같은 약은 공작부인의 수족들에 의해 섭취할 수 없었다. 그러니 굳이 연기를 하지 않더라도 이 정도 통증이면 자연스럽게 그의 앞에서 가녀리고 불쌍한 모습을 선보일 수가 있었다.

“공작가에서 맞는 최고의 저녁이 될 것 같네.”

현재까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아직 샐리에게 찜찜함을 남기고 있는 변수가 하나 있었다.

레너드 스테판.

스테판 공작의 아들로 원래라면 공작가의 차기 당주가 확정적이었다. 하지만 제 아비가 죽었음에도 술과 노름판에 빠져 아직까지도 저택에 코빼기 하나 한 번 안 비추니 공작부인 입장에서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샐리는 갑자기 이상한 바람이 불어 그가 오늘 저녁까지 저택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나타난다고 해도 계획에 엄청나게 큰 차질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수는 아예 없는 편이 좋았다.

***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공녀.”

“그런 딱딱한 호칭은 거두어두세요.”

제국의 영웅이라고까지 추앙받는 헨리였지만, 스테판 공작가와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가 스테판 가의 저택에 그것도 저택에서 제대로 된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공녀의 초대에 응하니 저택 사용인들 모두 놀란 눈치였다.

“그럼 어서 들어오세요.”

무엇보다도 이미 예전부터 아는 사이를 넘어 친근해 보이는 두 사람의 사이에 저택의 하녀들은 샐리 쪽을 힐끗 쳐다보며 수군대기 바빴다.

“저택의 사용인들이 무례하군요.”

“괜찮아요. 이런 건 이미 익숙하니까.”

종아리로부터 올라오는 통증이 더해져 이보다 더 처연할 수 없었다. 딱한 사정이 묻어나는 눈빛부터 시작해서 축 처진 눈꼬리까지 방에서 거울을 보고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아가씨, 이리 멋대로 손님을 들이시면 안 됩니다.”

계속해서 눈치를 보던 집사가 나서보았지만, 헨리의 매서운 눈빛에 금방 뒤로 물러났다. 제아무리 귀족사회에서 힘이 없고, 견제를 많이 받는다 해도 황족의 혈통인데다가 기사답게 키도 크고 몸도 좋았다.

일개 집사 따위는 그의 기백 앞에 입조차 제대로 못 열었다.

“연기가 능숙하시네요.”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니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해야지요.”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참 꾸밈이 없어 보이는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없었으니 그 장면을 바라보는 이들은 두 사람의 분위기를 훈훈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표정이 다양하지 않기로 소문난 헨리 크리스토퍼였다.

맡은 바 임무에도 충실하고 선행도 많이 하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냉정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봄바람과 함께 찾아온 봄을 맞이하기 위해 갓 피어난 꽃과도 같은 미소를 지었으니 그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충격을 받은 사람은 샐리도 마찬가지였다.

내색하지 않았어도, 바로 앞에 있는 남자가 이런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순간 샐리는 헨리가 지은 미소를 연기가 아닌 진짜로 받아들였을 정도였다.

“그렇게 놀라는 것을 보니 내가 제대로 하고 있군요.”

어느새 미소를 거둔 뒤 이전처럼 딱딱한 벽돌과도 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하지만 자신의 미소에 놀라 벙 찐 샐리의 표정을 본 터라 헨리의 말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미, 미안해요, 그런 미소를 지을 줄 몰랐어요.”

샐리는 여전히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을 하면서 약간 더듬었다.

“접점이 없던 사이에서 이렇게 발전한 것이니 죽고 못 사는 사이처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에요.”

헨리가 한 말처럼 이 관계는 갑작스럽게 발전한 관계였다. 두 사람의 자세한 내막은 아직 정해진 이야기가 없으므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서로 합을 맞춰가야 할 터였다. 무엇보다 운명적이고 극적인 사랑 이야기에 부합하게 서로를 볼 때 눈에서 꿀 정도는 기본으로 떨어져 줘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공녀께서는 연기에 더 신경 써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답지 않게 짓궂어 보였지만, 두 사람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말 그대로 정곡을 찔렀기에 샐리는 아무 말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게 서로를 향한 애정이 담긴 웃음을 나누며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들로 채워져 있는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지어낼 생각입니까.”

“음, 생각을 해봤는데, 제가 첩의 자식이란 게 밝혀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 말에 헨리는 입으로 음식을 가져가던 손을 멈췄다. 바삭하게 구워 기름기를 머금고 있는 것이 먹음직스러워 헨리가 샐러드를 곁들여 먹으면 참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처음 선택한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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